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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이 성큼 지나간 이월의 늦겨울. 겨울이 끝나 가려 해서 그런지 창밖에는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애셔는 들고 있던 찻잔을 움켜잡으며 입안으
로 차를 한 모금 흘려보냈다.
“……몸 상태를 보니 곧 히트가 터지겠네.”
애셔는 며칠 전부터 자꾸만 밀려오는 두통과 몸살에 어깨에 걸친 카디건을 끌
어당겼다. 솔직히 아리아의 말처럼 히트가 이월 말경에 터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규칙한 열성답게 몸 상태는 내일이라도 히트가 터질 것처럼 좋지 못
했고 애셔는 서둘러 테이블로 가 약통을 찾아 알약을 하나 집어삼켰다.
“당분간 별장에 가 있어야 하나…….”
애셔는 손끝에 잡히는 별장 열쇠를 바라보다 그 열쇠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혹시 몰라 톰스에게 별장의 위치를 미리 알려 주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이성
을 잃거나 몸 상태가 이상해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그곳으로 옮기라
일러두었다.
“하아…….”
애셔가 긴 숨을 토해 내며 돌아서자 잉크병이 팔꿈치에 닿았는지 그대로 바닥
으로 추락했다. 덕분에 잉크는 주위와 옷을 검은 잉크로 물들이며 사방 곳곳
에 튀었다.
“오늘 왜 이러지.”
유난히 실수가 잦은 오늘에 애셔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날은 집에만 있는
게 상책이라며 밖에 있던 시종들을 불러 흘린 잉크를 치우게 했다.
애셔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톰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애셔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짓을 보냈고 그는 들고 있던 편지를 자신에게 내밀었다.
“도련님,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애셔는 톰스가 내민 편지를 받고는 인장을 확인했다. 하지만 편지에는 아무런
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편지에 애셔는 테이블로 가 나이프를
꺼내고는 서신 윗부분부터 개봉했다.
[오늘 아침 아리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에게는 꼭 알려야 할 것 같아 편지를 남깁니다.
장소는 당신이 아리아를 만났던 그곳. ]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은 편지에는 충격적인 글귀가 쓰여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보았던 아리아의 부고였다. 애셔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충격에 잠시
몸을 비틀대고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흔치 않은 핑크빛 머리를 가졌던 아리아. 조건 없이 제 편이 되어 주겠다던
아리아의 모습에 애셔가 감았던 눈을 떠 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무도 모르게 마차를 준비해 줘.”
“네.”
이렇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내온 걸 보면 보낸 이는 아리아의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애셔 역시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기에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
아리아의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애셔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모자를 꾹 눌
러썼다. 유난히도 퍼붓는 비의 양에 톰스가 우산을 받쳐 주었고, 애셔는 그
우산을 받으며 그녀의 집을 노크했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에도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쩌
면 당연하다는 생각과 함께 애셔는 낡은 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리아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겨울
과 맞지 않는 따뜻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채 그녀는 가슴에 꽃을 안고 있었다.
“달맞이꽃이라…….”
“기다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죠.”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애셔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한
남자가 저와 같은 차림을 한 채로 그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꽃을 한
송이 곁에 놓았다.
“참으로 따뜻하신 분이었어요. 진짜 엄마라고 오해할 만큼.”
“진짜 엄마……?”
“하지만 우습게도 진짜 엄마가 아니라네요. 그럴 거면 다정하지나 말지.”
남자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공허해 보였고
슬퍼 보였다. 보지 않아도 남자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애
셔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이없는 게 뭔 줄 아세요? 그녀는 단 한 번도 저를 꾸
짖어 준 적 없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진짜가 아니니까…… 단순히 가짜라서 온
전히 마음을 열지 못한 거죠. 그녀의 진짜 아이는 따로 있었으니까.”
“서, 설마……!”
“반응을 보니 당신도 짐작하고 있었나 보네요. 내가 누구고 당신이 누군지.”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던 자리에서 뒤를 돌아 애셔를 천천히 응시했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모습은 몇 주 전, 아네스트가의 성 앞에서 만났던 남자의 모습과
흡사했다. 애셔는 놀라움에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틀어막고는 눈꺼풀
을 떨었다.
“남의 인생을 훔쳐서 그동안 행복했나요?”
“…….”
“소문을 듣자 하니 세간에서 당신을 공작가의 망나니라고 부르던데.”
사람이 너무 놀라면 그대로 굳어 버린다고 했던가. 애셔는 브래든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반듯하게 살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제가 덜 미워했을 텐데. 당신은
아리아의 얼굴에 흠집 내고 아네스트가의 이미지까지 실추시켰어요. 복에 겨
운지도 모르고.”
“……당신의 이름이 브래든…… 맞나요?”
“이름까지 알 정도면 이미 저에 대한 조사를 다 마쳤나 보네요. 그런데도 지
금까지 모르는 척 제게 호의를 베풀었던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때는 정말 몰랐으니까.”
“뭐가 됐든 필요 없어요. 저는 이제 제 자리를 찾으려고 이미 마음먹었으니
까. 다만, 아리아의 마지막 부탁을 위해 당신에게 시간을 줄까 해요. 모든 것
을 정리할 시간……. 그게 그녀가 원했던 마지막 부탁이었으니까.”
끝까지 아들을 위하다 간 아리아가 원망스러웠는지 브래든의 눈가에 노기가
스며들었다. 그러다 허탈한 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편지를 바
닥으로 툭 던졌다.
“아리아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입니다. 나중에 제 정체를 알게 될
때, 그때 전해 달라 했지만, 지금 보니 딱히 그럴 이유는 없겠네요.”
“…….”
“아리아는 내가 아네스트가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아 했지만, 나는 돌아갈 생
각입니다. 그 자리가 원래 내 자리였고 당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조차 내가 누
려야 할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꼭 되찾고 말 겁니다. 당신이 누린
작은 행복조차도.”
원래대로라면 애셔와 브래든이 만나는 시점은 봄이 시작되는 사월이었다. 하
지만 예상보다 빨라진 일정은 아무래도 자신이 아리아의 집을 방문했기 때문
인 것 같았다.
“……우선 당신의 자리를 빼앗은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당신 덕에 제가 부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당신이 돌아온다면 저는 떠
날 겁니다. 아마도 집안을 속인 대가로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생기겠죠. 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머물러 있겠다는 건 아니에요. 단 한 순간도 마음 편
히 지낸 적 없었으니까.”
브래든의 말대로 자신은 가짜였다. 다만 그의 말과 달리, 자신은 가짜인 애셔
의 몸에 빙의한 사람이었고, 빙의한 그 순간부터 단 하루도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원작의 굴레에서 틀어지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보
았으니까. 애셔는 공작이 제게 페로몬을 퍼부었던 날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자리만큼은 아리아를 위해 조용히 끝냈으면 좋겠어요. 당
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니까.”
애셔의 말에 브래든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
을 하고서 그는 몸을 틀어 아리아를 내려다봤다.
“차라리 만나지 않는 쪽이 좋을 뻔했네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바랐던
대로 기다려 줄 테니까…… 아리아, 그만 울어요.”
브래든은 마치 밖에 내리는 비를 아리아의 눈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
스레 같이 서글퍼진 애셔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집어 들었다.
“기간은 오래 못 드립니다. 딱 두 달. 봄이 오는 그때 공작가에 찾아갈 거예요.”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듯이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문을 닫고 가지 않았는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거센 빗소리만 방 안에 가득했
다. 애셔는 차마 편지를 읽을 자신이 없어서 옷깃 안에 넣고는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애셔의 어머니였군요…….”
애셔는 이유 모를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을 그리 서 있었다. 정확히
는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아리아의
죽음이, 진짜 애셔의 영혼의 부재가, 모두 다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애셔는 하
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