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45화 (4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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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한 해가 끝나 가는 12월 31일. 애셔는 광장에 있는 신전에 다녀오는 길이었

다. 원래대로라면 새해를 맞이하는 날 기도를 드리는 게 맞았지만, 애셔는 많

은 인파가 몰릴 것을 대비해 혼자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오는 길이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

솔직하게 말하면 내일 바로 불독 왕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브래든이

돌아오는 시기와 맞물리지 않으면, 분명 공작가는 자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될

게 분명하니 도망가려는 계획이 실패로 끝날 거라는 걸 알았다. 샤키도, 루크

도, 공작도, 브래든이 존재하지 않는 한 자신을 끝까지 쫓아올 것 같았으니

까. 애셔는 뿌예진 창을 손으로 닦으며 밖을 내려다봤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온통 새하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아네스트가의 성이 애셔의 눈에 아름답게 보였다.

“벌써 이렇게 한 해가 가다니.”

애셔는 빙의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머릿속을 떠올렸다. 그러다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생각해서 뭐 해. 어차피 다 잊어야 할 사람들인데…….”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모든 것을 다 잊을 생각이었다. 불독 왕국으로 가 베타

인 척 새로운 삶을 살며 다시는 블레이크 제국에 돌아오지 않을 셈이었다. 그

렇게 생각하자 애셔는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공작이 마음에 걸리긴 하네.”

자신을 누구보다 제일 미워하고 싫어한 인물이었으니까.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서 마주하게 된다면 정말 저세상으로 하직할 것 같았다. 애셔는 괜스레

서늘해진 목을 문지르며 밖을 내다보다 성문 근처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짙은 갈색빛이 도는 남자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

지만 남자는 아네스트가를 방문한 손님이라고 하기에는 멍하니 성만 바라보며

미동조차 없었다.

“뭐지……?”

애셔는 의아한 마음에 마차를 멈춰 세우고는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소복이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집중했는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

고 애셔는 남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애셔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애셔가 다가오는 것도 느

끼지 못할 만큼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길을 잃어서 그만…….”

길을 잃은 것치고 남자의 시선은 성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막 나온

듯한 차림을 보니 근처에 사는 마을 주민 같았다. 애셔는 괜찮다는 듯이 남자

에게 고개를 들라 하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애셔는 톰스를 향해 눈짓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괜찮

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어쩐지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

이 묘하게 느껴졌다.

“집이 멀지 않아서요. 마음은 감사합니다.”

“길을 잃으셨다면서요.”

“……네.”

남자의 말에 애셔가 잠시 침묵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한 눈빛으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이곳 주위에는 집이 없습니다. 물론, 마을까지 나가려면 마차 없이는 힘들고요.”

“…….”

“혹시 공작가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라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수상쩍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애셔가 사무적으로 답했다. 남자는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가 팔을 문질렀다. 뒤늦게 추위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입술을 푸른색이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얇게 입고 다니시면 감기 걸립니다.”

애셔는 서둘러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남자에게 걸쳐 주었다. 그가 어떤 목적

으로 이곳에 왔든,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게 설령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일지라도.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아요.”

애셔가 제안한 호의를 받든 받지 않든, 마법 마차를 타고 마을로 가지 않는

이상, 마을까지는 걸어서 장시간 가야 했다. 애셔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를 보며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주었다.

“이 길을 따라 쭉 가시면 마을이 나올 거예요.”

“……원래 이렇게 친절하세요?”

“아니요. 저는 친절하지 않아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걸 보는 게 싫을

뿐이지.”

애셔는 사람들이 저를 망나니 공자로 기억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차갑게 말

했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지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남자는 애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물었다.

“……아네스트가 막내 공자님이세요?”

“네.”

“그렇군요…….”

애셔의 대답에 남자가 생각이 많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마치, 제 얼굴을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천천히 얼굴을 훑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베풀어 주신 친절은 꼭 답례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애셔는 신사적인 얼굴로 톰스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톰스는 알겠다는

듯이 마부에게 다가가 마차를 남자와 애셔가 있는 쪽으로 끌고 오게 했다.

“마차는……!”

“곧 있으면 날이 어두워져요. 연말인데 소중한 이들과 함께 보내야지 않겠어요?”

애셔의 말에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입술을 한번 다물었다가 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럼 행복한 연휴 되시길.”

애셔는 깔끔하게 대화를 끊으며 돌아섰다. 왜인지 그와 다시 한번 만날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애셔는 괜한 기시감이라 여기며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애셔.”

마침 나가려는 길인 건지 샤키가 애셔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요즘 들어 샤

키는 이른 시간 나갔다가 늦은 시간에 들어오고는 했다. 덕분에 애셔는 그를

바람의 정원에서 본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애셔가 반가운 기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근래 마음고생을 한 건지

샤키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야윈 것이 느껴졌다. 애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샤키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밥이랑은 잘 챙겨 먹는 거지?”

“당연하지.”

“그런 거치고는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

애셔의 말에 샤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샤키는 애셔에게 편안하

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형이랑 밥이나 한 끼 할래?”

“밥?”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인데 일만 하기는 싫어서. 아버지도 형도 오늘 약속

있다고 했거든.”

“아…… 그런 거라면 나는 좋아.”

바람의 정원에서 느꼈던 마지막 감정 뒤로 애셔 역시 샤키를 찾지 않았다. 아

직은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이 깊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그런 마음을 먹은 게 미안해졌다. 그래도 언제나 자

신이 힘들 때면 제일 먼저 달려와 걱정해 주던 사람이었으니까. 애셔는 좋다

는 듯이 웃으며 샤키가 안내한 장소로 이동했다.

샤키가 성을 떠나 자신을 데려온 곳은 가까운 마을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애셔는 먹을 메뉴를 주문하고는 물잔을 들어 목을 가볍게 축였다.

“술 한잔 할래?”

“웬일이야? 형이 술을 다 권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특별한 날이니까?”

샤키의 말에 애셔가 맥빠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샤키는

멀리서 대기하고 있는 직원에게 술을 가져오라 일렀다.

“이 가게는 밤이 되면 별이 많이 보인다더라. 이 자리가 별이 잘 보이는 자리고.”

“그래? 정말 멋진 곳이다.”

애셔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샤키를 응시했다가 잔에 채워지는 술을 응시했다.

가운데 켜 있는 초가 있어서 그런지 반쯤 채워진 포도주가 영롱하게 보였다.

애셔는 잔을 들어 샤키를 향해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술을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떫은맛이 날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포도주는 달짝지근한 맛을 냈다. 이 정

도면 술을 못 마시는 자신이라도 몇 잔은 거뜬히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샤

키는 그런 애셔의 생각을 읽었는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딱 한 잔까지만이야.”

“에이, 오늘같이 특별한 날, 어떻게 딱 한 잔만 마셔.”

“그래도 안 돼. 나는 취해도 너만큼은 그러면 안 되니까.”

샤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안 본 사이에 그의 모습이

더 성숙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셔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잔에 담긴

술만 홀짝이던 그때, 광장에서 사 온 물건이 떠올랐다.

“아 참. 내가 아까 광장에 갔다가 사 온 게 있는데 잠깐만.”

애셔는 바지 주머니에서 긴 상자를 꺼내 들었다.

“별건 아니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래. 새해도 다가오니까 이런 것쯤은

하나 지니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 형은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네 잎 클로버 모양이 각인된 만년필이었다. 혹시라도 그런 건 미신이라며 믿

지 않는다 할까 걱정됐지만, 그는 애셔의 손에 들린 물건만 물끄러미 바라보

고는 천천히 천을 받아 갔다.

“……싫은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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