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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저는…… 지금껏 도련님 때문에 마리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
“그런데 소르타라니…….”
쟌이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
에 옷깃 속에 숨겨 둔 검으로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찌르고는 애셔의 목을 졸
랐다. 방심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괴롭힌 건 변하지 않아!”
눈가에 핏대를 세우며 쟌이 애셔를 창가로 밀었다. 무게로 인해 창가의 유리
에 실금이 갔고 번쩍 빛나는 번개만이 애셔의 얼굴을 드리웠다 사라졌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놓아.”
애셔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배를 가격했다.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조른 건지 애
셔는 밀려나기 무섭게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네 말대로 내가 괴롭힌 건 변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렇게 한다 해서 마리
가 좋아할 것 같아?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한다면 그러면 안 돼.”
“……그건 모르죠. 마리가 정말 좋아할지.”
쟌은 기사를 찔렀던 검을 주워 쥐고는 애셔에게 달려들었다. 애셔는 순식간에
검을 피하고는 손목을 낚아채 쟌의 등을 내리눌렀다.
“제발…… 정신 차려, 쟌!”
“……흐흑.”
“마리를 괴롭힌 건 미안해……. 만나면 네게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대로 삶을 포기할 건 아니잖아. 네게는 보살펴야 할 가족도 있는 거잖아.”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던 상황이었다. 애셔는 아릿해진 목을 한 번 문지르고
는 그가 쥐고 있던 검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돌아온 톰스가 서둘러 애셔에게 다가와 쟌을 제압했다. 하지만 애셔는
계속해서 나오는 기침을 손등으로 틀어막고는 톰스에게 말했다.
“뒷일을 부탁할게.”
“네.”
애셔는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신을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에게 다가갔다.
그는 애셔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주름이 깊게 팬 얼굴로 조곤조곤하게 답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톰스가 곧 해독제를 가져올 거야.”
애셔는 많이 지친 얼굴로 침대로 가 누웠다. 톰스가 어서 해독제를 가져오길
바라며 잠시 누워 있자, 일이 해결되었는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해독제를 가져왔습니다. 독약의 성분은 말라니초라는 식물이라고 합니다.”
“……말라니초요?”
톰스의 말에 주치의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그것만 봐도 그 식물이 얼마나 나
쁠지 짐작이 갔다. 애셔는 톰스가 내민 해독제를 마시며 주치의에게 설명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말라니초라는 식물은 알파와 오메가에게 치명적인 독초입니다. 일반 사람들
처럼 치사량을 넘어서면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하지만?”
“페로몬에서 간혹 향이 나지 않는 부작용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하나, 도련
님께서는 열성이시다 보니 어쩌면 부작용이 보통보다 높은 확률로 발생해 페
로몬의 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애셔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덤덤한 표정
으로 “그래?”라는 말을 덧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의 향을 잃는다는 것, 오메가의 숙명으로선 되게 슬픈 일이었지만 애셔
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면 베타인 척 평범하게 삶을 살려고 했었
으니까. 어쩌면 향을 잃는 쪽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주치의의 얼굴이 곤란함으로 변했다. 애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톰스에게
미리 준비하게 한 금품을 주치의에게 내밀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평생이 아닙니다. 딱 일 년간만 모르는 척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당신께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할 테니까요.”
주치의는 톰스가 내민 금품을 확인하고는 놀란 듯 눈을 키웠다. 평생을 먹고
놀아도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는 돈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혹여라도 몸이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네.”
애셔는 주치의와 함께 나간 톰스를 보며 참았던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래도 이 돈이 있어서 다행이네…….”
서늘해진 목을 문지르며 애셔는 며칠 전 과거를 회상했다. 바르한과 공조한
계약서를 찾기 위해 방을 뒤적이던 그는 낡은 창고를 발견했다. 낡은 책들로
가려진 그 공간은 빙의 전 애셔가 몰래 만들어 놓은 비밀 금고 같았고 애셔는
열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화단 아래 놓인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그곳에는 여러 개의 문서와 엄청나게 많은 금품과 금화
가 놓여 있었다.
귀족들은 이렇게 따로 금품을 모아 둔다고 하던데, 충분히 도망치고도 남을
액수에 애셔는 반절을 그대로 두고 반절은 미리 은행으로 가 수표로 바꿨다.
그리고 그 금액 중 일부분을 주치의에게 사용했고 나머지는 책 속에 끼워 두었다.
“이제는 지형만 알아 두면 되는 건가…….”
애셔는 근처에 있는 물을 한 잔 비워 내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이틀 뒤 루크와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애셔는 직접 블레이드가를 찾았
다. 루크는 분명히 이 일을 파고들려 할 것이고 자신 역시 공작의 일을 조용
히 덮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당신이라면 언제든지 방문해도 괜찮으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때 이후로 처음 이루어지는 만남이라 그런지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히트가 왔다지만 그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애셔는 민망한 듯 볼을 붉힌 채로 입술만 조용히 깨물어 댔다.
“얼그레이 차를 준비하라 일렀는데,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여전히 그의 손끝을 응시한 채로 애셔가 답했다. 그런 애셔의 모습에 루크가
살짝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글쎄요. 저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루크는 시종이 방금 내온 따끈한 차를 바라보며 입술을 부드럽게 휘었다. 심
장이 찌르르하다 못해 간지러울 만큼 포근한 미소에 애셔는 얼굴을 붉게 물들
인 채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사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무엇입니까.”
“그날 수도에서 있었던 일 말이에요.”
“당신은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깔끔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니 그는 이미 이 일에 공작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이미 전하께서도 짐작하고 계신 것 같네요. 저희 아버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애셔는 일부러 아버지라는 말을 강조하며 루크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제
속을 꿰뚫어 보듯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이미 알고 있다고는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요…….”
“신경 쓸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확실치 않은 정황이고요.”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걸 원치 않아요. 무엇보다 저는 이미 이 일에 개입
했으니까요.”
애셔의 말에 루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애셔는 뜻을 굽히지 않
겠다는 듯이 허벅지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며 루크를 올려다봤다.
“만약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제가 그 어떤 일이라도 도와 드릴게요. 앞으로
정보는 제가 최대한 빼 올 수 있을 만큼…….”
“애셔.”
“네?”
“저는 당신이 이 일에서 손을 뗐으면 좋겠습니다.”
애셔의 간절한 뜻에도 루크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알겠어요.”
애셔는 완강해 보이는 그를 보며 한발 뒤로 물러나 있기로 했다. 물론 절대로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지만, 수긍하는 척 물러나 있다가 자신이 가져올 수 있
는 정보를 그에게 제공할 셈이었다. 저 역시 루크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았
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제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제가 당신께 약속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어떤 약속이요?”
“뿌리째 뽑겠다고 했던 말 말입니다.”
그제야 애셔는 루크가 수도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도 제국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니. 축제가 끝나면 제대로 수사해 뿌
리째 뽑도록 해야겠습니다.
애셔는 그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루크는 잘했다는 듯이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이건 제가 당신께 한 약속입니다.”
그러니 더는 개입하지 말라는 듯이 말을 하는 루크를 보며 애셔가 말없이 찻
잔만 움켜쥐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크의 행동에 애셔가 의아한 얼
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던 루크가 애셔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애셔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애셔와의 거리를 좁혔다.
“저, 전하……?”
애셔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또다시 키스를 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때아닌 스카프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