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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양해를 구하는 엠버의 말에 루크가 애셔를 응시했다. 애셔의 의사를 보고 결
정하겠다는 눈짓이었다. 애셔는 루크를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입
고 있던 겉옷을 돌려주며 양해를 구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준다는 말이 이렇게도 좋은 건지. 애셔는 수줍은 얼굴
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무슨 일 생긴 거야?”
루크가 자리를 비켜 주자마자 애셔가 엠버에게 물었다. 엠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뒤에 있던 톰스마저 물렸다.
“가 보면 알아.”
자꾸만 무도회장에서 멀어지는 엠버를 보며 애셔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어디론가 팔려 가는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알싸한 느낌에 애셔는 떨리는 목
소리로 엠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여긴 무도회장이 아니잖아.”
자꾸만 음습하고 좁은 골목길로 가는 엠버를 보며 애셔가 불안한 말투로 물었
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 걸음을 멈추자, 엠버 역시 걸
음을 멈추고는 애셔를 돌아봤다.
“왜? 무서워? 뭐가?”
“형.”
“나는 네 가족인데, 설마 나를 못 믿는 거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 여긴 무도회장하고 거리가 멀고, 형도 아무 말도 해 주
지 않으니까……,”
그래서였다고 하려 했지만, 엠버의 뒤로 나타난 한 인영에 애셔의 고운 미간
이 와락 구겨졌다.
“……바르한?”
어째서 바르한이 이곳에 있냐는 듯이 엠버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답은 엠버의
입이 아닌 바르한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애셔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부탁했어. 마침 형에게 부탁할 것도 있고 해서 말이야.”
바르한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애셔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마치, 이렇게
만난 게 우연인 것처럼 생글거리고 있었다. 애셔는 그런 바르한을 한번 노려
본 뒤에야 엠버를 응시하며 물었다.
“설마 급한 일이라는 게 이거였던 거야?”
“바르한한테 도움 받은 것도 있는데 부탁받은 걸 안 들어줄 수가 있어야지.
둘이 친한 사이잖아?”
“형.”
“싸웠다며. 원래 친한 사이일수록 더 많이 싸운다고 싸운다고 하더라. 그러다
보면 정도 더 들고 하는 법이고.”
바르한이 어떻게 말을 했는지 엠버는 단순한 다툼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
다. 애셔는 빨리 화해하길 바라는 엠버의 눈짓에 긴 숨을 토해 냈다.
솔직히 자신이 바르한을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는 게 맞았다. 더는 만나지 않
겠다고 엠버에게 확실하게 말을 하려 했지만, 눈치를 챈 바르한이 서둘러 그
를 불러 말했다.
“형 말대로 빨리 화해할게요. 그러니 잠깐만 자리 좀 비켜 주시면 안 돼요?
저희끼리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오래 걸리지는 마라.”
“딱 삼십 분이면 충분해요.”
바르한이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어 보이자 엠버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
다. 알파인 남자에게 오메가인 동생을 두고서……. 그 모습을 보며 애셔는 훗날
버림받으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샤키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애셔가 주먹을 꽉 움켜쥐자 바르한은 이런 상황을 비웃듯 입가에 작은
조소를 띠었다.
“어떡하냐? 형은 너보다 나를 더 믿는 것 같은데.”
“다시는 이런 식으로 형을 이용할 생각 하지 마.”
“아이고야. 우애가 너무 깊어서 눈물이 다 나는걸? 근데 형도 너를 그렇게 생
각한대?”
힐난에 가까운 말에 애셔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을 틀었다. 하지만
바르한은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듯이 팔목을 잡아 애셔를 구석진 골목 안으
로 밀어 넣었다.
“이대로 가면 안 되지. 내가 어떻게 너를 여기까지 끌어냈는데.”
“바르한.”
“형이 화해하라잖아. 그런데 이렇게 가면 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가 말했지? 너랑 친구 하지 않는다고. 애초에 우린 형질부터 다른 데다가,
나는 사심 있는 사람하고는 친구 안 해.”
단호하게 말을 하는 애셔를 보며 바르한이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듣는 이조차 불쾌할 만큼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애셔가 미간을
찌푸렸다.
“형질이 달라서 친구 할 수 없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그런데 어쩌지?
나도 너와 친구 할 생각은 없는데?”
“그럼 잘됐네. 비켜.”
애셔가 그의 가슴을 확 밀치며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르한은 너
무 가볍게 손목을 잡으며 두 팔 안에 애셔를 가뒀다.
“친구 하지 않는다고 했지, 가라는 말은 안 했는데?”
“오늘 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러시든가. 그런데 어쩌냐? 여기까지 널 데리고 온 사람은 형님인데?”
바르한은 무슨 일이 생기면 엠버를 거론하겠다는 듯이 굴었다.
“설마 내가 이런 방패 하나 없이 네게 이러겠어? 좀 더 영악해져 봐.”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뭘 원하길래 이러는 건데?”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사심 있는 사람과는 친구 하지 않겠다고.”
“…….”
“간단해. 나는 너와 하룻밤을 원해. 적어도 내가 너한테 공들인 시간을 생각
한다면, 그것도 꽤 저렴한 가격이라 생각하는데?”
바르한은 애셔의 허벅지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끼웠다. 그러고는 부풀어 오른
중심 부위를 애셔의 허벅지에 밀착시켰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애셔가 그를 밀쳐 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완강하
게 애셔의 팔목을 움켜잡고는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계속 도발하지 마. 나도 지금 꽤 인내하고 있으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반복하는 바르한을 보던 애셔가 그의 팔을 그대로 물
었다. 그에 바르한이 ‘악’ 소리가 날 만큼 강력한 힘으로 주먹을 내질렀고 애
셔의 얼굴이 그대로 돌아갔다.
퍽-,
“하? 이 귀걸이는 뭐야? 정말 둘이 눈이라도 맞은 거야, 뭐야?!”
애셔는 머리를 강타하는 강력한 힘에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것을 느꼈다. 확
실히 베타인 사람들보다 강한 힘이었다.
“이러면 곤란하지. 내가 말했잖냐? 내 손에 계약서가 있다고. 내가 이걸 대공
전하한테 줘도 괜찮겠어?”
애셔가 헝클어진 자세로 바르한을 노려봤다. 바르한은 그런 애셔의 모습에 우
습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이마를 툭툭 쳤다.
“네가 그렇게 자존심 세워 봤자 결국에는 내게 무릎 꿇게 돼 있어. 왜냐고?
너 역시 알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열성 오메가니까.”
마치, 자신이 저를 좋아하는 걸 감사하게 여기라는 듯이 그가 단숨에 페로몬
을 풀었다. 그러자 코끝에는 레몬 향이 맡아졌다.
“욱……!”
상큼해야 할 레몬 향이 토악질이 날 만큼 역겹게 느껴졌다. 애셔는 막무가내
로 뿜어지는 바르한의 페로몬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것 봐. 너도 페로몬 앞에서는 별수가 없잖아?”
바르한은 페로몬 샤워나 다름없는 많은 양의 페로몬을 뿜어내며 애셔의 욕정
을 억지로 끌어냈다. 어서 제게 굴복하라는 듯이 바르한의 페로몬이 애셔를
압박해 왔다. 결국 애셔는 입 안쪽 여린 살을 으득, 깨물었다. 하지만 의지와
다르게 몸은 바르한의 페로몬에 굴복하며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루크…….
아득히 멀어져 가는 이성 속에서 애셔가 그를 떠올렸다. 그러자 ‘퍽’ 하는 소
리와 함께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지?”
존칭은 어디에다가 버렸는지 루크의 입에서는 살벌한 반말이 새어 나왔다.
“하, 흑기사가 와 버렸네.”
바르한의 혼잣말에 루크는 광대한 페로몬을 뿜어냈다. 살기가 짙은, 위협적인
페로몬은 바르한의 몸을 감싸며 숨을 막히게 했다.
“그냥 오늘 죽는 게 좋겠군.”
루크는 싸늘할 만큼 오싹한 목소리로 말하며 바르한에게 다가갔다. 그간 느꼈
던 페로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페로몬이 쏟아졌다. 고통
스러운지 바르한의 눈이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혔다. 이러다 무슨 일이 날 것
같아서 애셔는 루크에게 힘겹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저, 전하!”
말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만큼 숨통이 조였다. 하지만 정말 살인이라도 날
것 같아서 애셔는 젖 먹는 힘까지 끄집어내며 말했다.
“그러다 정말…… 죽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전하가 살인자가 되는 거 원치 않아요, 라는 눈빛
으로 애처롭게 바라봤지만, 그는 왜 말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원망스럽
게 내려다봤다.
“제, 제발……,”
거의 애원에 가까운 말투였다. 루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페로몬을 갈무리
하며 바르한을 한 대 걷어찼다. 그러다 휘청이는 애셔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
고는 몸 위에 본인의 페로몬을 덮어씌웠다.
알파가 오메가한테 페로몬을 뒤집어씌운다는 건, 내 오메가니 건들지 말라는
뜻과 같았다.
애셔는 한결 편안해지는 호흡에 그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요.”
이곳에는 고위층 귀족들뿐만 아니라 황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괜히
이런 날 문제를 만들어서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루크의 이미지
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애셔는 그의 팔을 잡고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지금 너무 힘이 드는데…… 잠시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