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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공작이 엠버와 함께 다가왔다. 어쩐지 엠버의 어깨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엠버와 함께 폐하를 알현하고 올 터이니, 너희들은 먼저 무도회장에 가 있거라.”
“네, 알겠습니다.”
왜 흐뭇한가 했더니, 공작과 함께 폐하를 알현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듯
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공작가의 후계자가 자신이 될 거라는 것과 같았으니
까. 공작은 샤키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대로 돌아섰다. 자신의 대답은 필
요도 없었다는 듯이 구는 공작의 행동에 조금 서운함이 밀려오기는 했지만,
막상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가 볼까?”
다정함이 깃든 얼굴로 샤키가 자신에게 팔을 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잡으라
는 뜻인 걸 알기에 애셔는 팔을 살짝 움켜잡으며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샹들리에로 가득한 무도회장은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벽은 번쩍
한 황금으로 가득했고 황제를 상징하는 사자가 천장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입이 벌어지는 내부의 광경에 애셔는 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긴장했어?”
“……조금.”
사실상 처음이라 많이 떨렸지만, 애셔는 에둘러 표현하며 말을 아꼈다.
“어서 네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가끔 나 혼자만 추억을 회상하는 건 외
로워서 말이야.”
“응……. 나도 얼른 기억이 돌아오면 좋겠어.”
물론 그런 일은 전혀 없겠지만 애셔는 어설피 웃으며 근처에 있던 잔을 움켜
쥐었다. 무의식중에 잡은 잔이 술잔이었는지 샤키가 그 잔을 근처에 있는 주
스 잔으로 바꿔 주었다.
“술은 안 돼.”
“나도 성인인데…….”
먹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왠지 못 먹게 하니 더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샤키는 단호한 표정으로 술잔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웬만하면 이런 곳에서 술 같은 건 마시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따지면 주스도 위험한걸?”
“그건 괜찮아. 방금 서버가 가져온 걸 내가 직접 봤거든.”
샤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애셔는 졌다는 듯이 주스를 한 모금 비워 내며 잔
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는 사람들로 가득해져 갔다. 다들 하나같이 샤키와 자신
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애셔는 잠시 귀족들을 응대하는 샤키를
보다 잠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누군가 자신을 손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찾았다.”
“바르한?”
상대가 바르한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무도회장이라
서로 장갑을 끼고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바르한의 끈적한 감정까지 느
껴져 기분이 불쾌했을 것 같았다.
“멀리 있어도 네가 어딨는지 딱 알겠더라.”
“다음부터는 굳이 알아봐 주지 않아도 돼.”
딱딱한 애셔의 목소리에도 바르한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가에
는 고혹함을 가득 담은 채 그는 눈매를 샐룩 휘며 말했다.
“이렇게 입으니까 예쁘네.”
“너 보라고 입은 거 아니야.”
“말은 여전히 거친데, 그래도 예뻐 보이는 건 왜일까?”
“그건 내 동생이니까 그러겠지?”
어느새 다가온 샤키가 애셔와 바르한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바르한의 행
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그런데 누가 내 동생을 함부로 데려가도 된다고 했지?”
“서운합니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인데? 그 말은 차라리 엠버 형한테 가서 하는 게 어때?”
“그래도 아는 사이에 너무 벽을 세우십니다.”
“격식은 갖추지 그래?”
샤키의 말에 바르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주 자세히 보
지 않으면 모를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지나가
는 서버에게 술잔을 건네받았다.
“잠깐 애셔와 대화 좀 하고 싶은데, 데려가도 될까요?”
“그건 좀 곤란해. 넌 알파고 내 동생은 오메가잖아?”
“챙겨 주고 아껴 주시는 마음은 여전하시네요.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요, 형님.”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거든.”
“형님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엠버 형님이 오면 그때 다시 대화를
해 봐야겠네요.”
“글쎄? 그럴 시간이 있을까?”
샤키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오른쪽 뒷문을 응시했다. 애셔 역시 시선을 돌리
자 그곳에는 하얀색 슈트를 입은 루크가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조명에 의해 반짝이는 은발의 머리카락과 강렬한 붉은 눈동자. 걷기만 하는
건데도 느껴지는 기품은 한순간에 무도회장을 압도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응시한 채로 다가오더니 따뜻한 눈빛
을 보내며 이름을 불렀다.
“애셔.”
“전하…….”
애셔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눈을 깜박거리자 그가 장갑을 낀 검지 끝으
로 볼을 툭 하고 건드렸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니요. 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곳에서 루크와 따로 만나기로 약속된 건 아니었지만, 애셔는 눈치껏 답을
하며 눈꼬리를 해사하게 접어 보였다.
“오랜만이로군요.”
“그때 이후로 오랜만입니다.”
샤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루크에게 예를 갖추며 안부를 건넸다. 바르한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던 친근한 말투였다.
“크리스토 백작가의 장남 바르한입니다.”
샤키의 행동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르한이 대화에 끼어들며 예를 갖췄다. 하
지만 루크는 무감각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는 건조하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
“그럼 편안하게 즐기십시오.”
듣는 사람도 무안할 만큼 정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 루크의 행동에 바르
한은 충격을 받았는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그는 곧 백작위를
물려받을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루크의 행동에 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바르한이 괜찮은 척 밝은 미소를 띠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묘하게 말하
는 뉘앙스가 꼭 그럴 수 있다면, 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불안한 마음에 바르
한을 응시했지만 루크가 제게 집중하라는 듯이 자신의 손을 그러쥐었다.
“사람들도 많은데 잠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둘이 있고 싶다는 듯이 말을 하는 루크에게 애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
고 난 뒤, 샤키에게 양해를 구했다.
“당연히 괜찮지. 아버지께는 내가 잘 말할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샤키는 애셔에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샤키가 속삭이던 그때,
문득 보이는 바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애셔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가 끝나자마자 루크가 안내한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루크가 데려간 곳은 황실 관계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탑 꼭대기 층이었다. 성
밖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그런 공간에 애셔는 난간을 잡은 채로 밖을 내려
다봤다.
며칠간의 이어진 축제의 여파로 인해 마을은 화려한 전등으로 가득했다. 마을
곳곳에서 터지는 폭죽들과 화려한 춤사위를 보이는 행렬까지, 보는 것만으로
도 귓가에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애셔는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
카락을 살짝 귀 뒤에 넘기고는 루크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절경이 너무 예뻐요.”
탑에서 느껴지는 거친 바람에도 애셔는 기분 좋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단순
히 느껴지는 바람이 좋아서 한 행동이었다. 그때 루크가 본인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애셔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바람이 셉니다.”
“괜찮은데…….”
루크의 배려에 애셔의 볼가에 옅은 홍조가 깃들었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애셔
는 그가 둘러 준 옷자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운을 뗐다.
“축제 때 록시나 전하를 만났어요. 본의 아니게 전하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
데, 그간 밤낮없이 수도를 조사하셨다 들었어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요.”
“고마워요. 여러 가지로…….”
아이의 행방을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었지만, 애셔는 그가 잘 데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 그라면 수도뿐만 아니라 제국 구석구
석에 숨겨져 있을 사건까지도 모조리 파헤치라고 일러두었을 테니까.
고마움에 지그시 바라보자 그가 피식, 가볍게 웃어 보였다.
“축제 마지막 날인데, 계속 여기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장소 이동하려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어디로요?”
“가 보시면 압니다.”
루크는 반드시 애셔가 좋아할 거라는 듯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애셔는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바로 승낙하며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애셔가 루크와 함께 탑에서 내려오자 엠버가 다가왔다. 얼굴에 다급함이 서린
것을 보니 급하게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애셔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엠버를 응시했다.
“잠시 동생 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