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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
애셔는 그녀가 보이지 않게 테이블 아래로 바짓단을 꽉 움켜쥐었다. 잠시 잊
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틀 전의 악몽은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와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꼬리를 잘라 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라고요.”
“…….”
“덕분에 루크가 그들을 잡겠다고 이틀 밤낮을 어찌나 뛰어다녔는지. 나중에
보게 된다면 고생했다는 말은 직접 해 줬으면 좋겠네요. 분명 그 말을 본인
입으로 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의 행방이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애셔는 느릿한 시선으
로 록시나를 응시했다.
“되도록 루크를 많이 아껴 주면 좋겠어요. 많이 외롭게 자란 동생이거든요.”
“……그럴게요.”
진심으로 루크를 걱정하는 록시나의 말에 애셔가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하지
만 한번 발작한 심장은 여전히 가쁘게 뛰며 호흡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손끝
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 들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록시나에게 양해를 구한 샤키가 애셔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자신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그는 허리를 살짝 숙인 채로 작게 속삭였다.
“잠깐 형이랑 이야기 좀 하자.”
최대한 태연한 척한다 했는데 샤키의 눈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았
다. 애셔는 그녀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샤키가 간 방향으로 따라나섰다.
“애셔.”
식당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 생각한 샤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시
선도 마주하지 않은 채 그는 서운하다는 듯이 앞만 주시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사실 말이야. 네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것 같아 걱정돼.”
그는 어딘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눈가에
여전히 씁쓸함을 담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나는 네가, 나를 제일 의지하고 따르는 형이라 생각했거든. 근데 그
것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아니야 형, 내가 형을 얼마나 따르고 아끼는지 알잖아.”
“그러게. 그런데도 나는 왜 이렇게 속상한 기분이 드는 거지?”
샤키는 록시나도 알고 있는 부분을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이 서운한 듯해 보였
다. 애셔는 미안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요즘 들어 너를 보면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어. 누
군가 내 심장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기분이 들거든.”
“……형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샤키는 애셔를 많이 아끼는 인물 중 하나였
으니까.
“대공과 만나고 늦은 시간에 아버지랑 대화했다는 걸 들었어.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네가 기죽을 아이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형.”
“설마 전처럼 네게 손찌검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 말을 스스로 뱉고도 현실이 될까 두려운 사람처럼 샤키의 목소리 끝이 떨
리고 있었다. 애셔는 곧은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형한테 계속 말 안 할 거야? 과거처럼 창백하게 질린 채로 바들
바들 떠는 거 보면 여전히 나는 답답해. 속이 뒤집힐 만큼 아프고.”
샤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작이 자신에게 페로몬을 퍼
부으며 죽이려 했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애셔는 계속 말을 아낀 채로 입술만
꾹 물었다.
“애셔.”
샤키의 부름에도 애셔는 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
집을 피우는 애셔의 행동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틀어 애셔를 응시했다.
“……너.”
샤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키우며 말을 하다 말고 침묵했다. 무슨 일인가 싶
어서 애셔가 샤키를 올려다보자 그가 상처 받은 사람처럼 슬픈 눈으로 자신의
뺨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미안하다. 널 다그칠 생각은 없었어.”
“……형.”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
그만 울라는 샤키의 말에 애셔가 멍청한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눈물
은 기다렸다는 듯이 뺨 아래로 톡 하고 떨어졌다.
“나는 괜찮은데…….”
근데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한번 자각한 눈물은 소리 없이 눈가에서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샤키가 한쪽 팔로 자신을 끌어당기며 천천히 등을 다독이
기 시작했다.
“형이 약속할게. 다시는 너와 아버지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
샤키의 말에 애셔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냥 그의 말이 너무 따뜻해서,
그에게 흘러 들어오는 애정이 너무 다정해서 애셔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펑
펑 쏟아 낸 것 같았다.
“꼭 울어도 그렇게 우냐. 마음 아프게. 그러니까 내가 너 때문에 자꾸 욕심이
나잖냐. 형과 대결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는데.”
그는 마치 가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작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
“예상했던 대로 잠입이 있었습니다.”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공작에게 다가와 보고를 했다. 그간 있었던 행적을
조용히 보고받던 공작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아니길 바랐건만…….”
언제부턴가 제 아들이 변해 있었다. 정확히는 사고가 난 시점부터 성격과 행
동 세세한 부분에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애셔 아네스트. 사고 났던 당일 그 아이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
“쟌이라는 아이입니다.”
“쟌이라……. 그 아이에 대한 조사는 당연히 마쳤겠지?”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해. 그리고 그날 또 다
른 이들은 없었는지 명확히 조사하도록 하고.”
공작의 말에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빠르게 사라졌다. 공작은 남자가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다 습관처럼 턱을 매만졌다.
채소라면 질색할 만큼 싫어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 난 뒤로는 남
이라도 된 것처럼 곧잘 먹었고, 눈치만 보던 과거와 다르게 자신의 말에 토를
달았다. 어렸을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제 말에 거역한 적 없었는데,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애셔를 보며 공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한들, 몸은 기억하고 있겠지.”
생각이 나지 않으면 생각나게 하면 되고, 잊어버리면 다시 세뇌하면 그만이었
다. 그게 아네스트가에서 태어난 오메가의 숙명이었으니까. 공작은 조용히 아
네스트가로 시집온 다이올 세바르니를 떠올렸다.
다이올은 변방에 있는 다 기울어 가는 백작가의 여식이자 우성 오메가였다.
우성이라는 형질은 대대로 황실의 피가 섞인 자만 태어날 수 있는 유전자였기
에 백작은 그 사실을 비밀리에 숨기며 다이올을 키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 공작인 그, 폴티크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은 백작
을 데려다가 술을 먹인 채로 도박을 하게 했다. 결과는 파산. 결국 백작가는
거대한 빚을 지니게 되었고 백작은 도망자 신세가 되며 그녀를 보호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틈을 타 폴티크는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만 한다면 가문의 모든 빚을 탕감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처음
부터 그에게 그녀는 작위를 물려받기 위한 소품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이올이 공작 부부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작위 승
계에 위협을 느낀 폴티크는 불의의 사고로 위장해 부모를 죽였고 공작가의 작
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애셔 아네스트. 아이가 태어난 날,
다이올은 숨을 거두었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단 말이지…….”
공작은 여전히 그녀의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열성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아네스트 공작가에서 열성으로 태어난 아이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성을 원했는데 열성이라니. 다시 한번 느껴지는 분노에 공작이 혀를 찼다.
“쯧, 쓸모없는 것들.”
이제 와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고, 자신은 여
전히 새로운 욕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알파들을 양육해서 자신만의 세력
을 갖는 것.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꿈이었기에 음습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눈앞에 거슬리면 없애 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작은 의자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눈빛을 매섭게 빛냈다.
*
축제의 마지막 행사는 성에서 열렸다. 많은 고위층이 참석하는 만큼 애셔 역
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애셔는 꼼지락대며 최대한 느리게 준비를 마치고는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에게
다가갔다.
“지렁이도 너보다는 빠르겠구나.”
공작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놨다. 분명 루크가 수도를
들쑤시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 아래에서 요동치는 물살처럼…….
“그럼 가도록 하지.”
마차는 두 대로 나뉘어서 출발했다. 공작이 타고 있는 마차에는 엠버가 올라
탔고 나머지 한 대에는 자신과 샤키가 올라타며 성으로 출발했다. 마법으로
된 마차라 그런지 황성까지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