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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정 마음에 걸리시면 그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있을 수는 없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공작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테이블을 한 번 더 내리치며 애셔를 노려보았다.
“누가 내 말에 토를 달아도 된다 했지? 오늘 데려온 아이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낼 것이다. 물론, 너 역시 오늘 저지른 일에 대한 벌로 집 안에서 이틀 동
안 자숙하도록 해.”
“……아이들에게는 제가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뭐라?”
“그런데 이렇게 보육원에 보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적어도 제가 책임질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애셔가 애원하듯 말을 했다. 제발 자신이 한 말만큼은 지키게 해 달라며 간절
한 눈빛으로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건 공작의 싸늘한 대답이었다.
“요즘 내가 너를 너무 풀어 줬나 보군.”
“아버지……?”
“애셔 아네스트.”
소름이 끼칠 만큼 공작이 자신의 풀 네임을 불러왔다. 동시에 품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애셔는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위협, 살기. 이 모든 것
들은 황태자를 통해 느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페로몬은 그때와 수준이
달랐다.
누군가 자신의 숨구멍을 틀어막고 사지를 비트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정말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페로몬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공
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애셔를 내려다봤다.
“네가 기억을 잃어버려 생각이 나지 않는가 본데, 너도 어렸을 때는 참 많이
맞았단다.”
“……커컥,”
“내일부터 당장, 생각의 방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의 말은 온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조여 오는 감각에 애셔는 눈앞
이 점차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일정대로 보육원에 보낼 것이다. 너는 아이가 발설한 위치를 어떡해
서는 누구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야 할 것이야. 만약 일이 그릇돼 수면
위에 오르게 된다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지? 그게, 내가 아끼는 아들일지
라도 말이야.”
다정을 빙자한 협박이었다. 도대체 그곳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길래, 이렇
게까지 페로몬을 풀며 억압하는 건지. 만일 공작이 이 일에 개입되어 있고,
그들을 통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모를까. 공작은 거의 죽어 가는 애셔를
향한 살기 짙은 페로몬을 거두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기억을 잃어도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하군. 알아들었으면 예전처럼 나를 닮아
영특한 척이라도 해 보거라.”
“……크흡,”
“혹시 아느냐? 전처럼 내가 네게 뭐라도 내어 줄지.”
한순간에 트인 숨통에 애셔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매서운 연기를 마신 것
처럼 애셔의 입에서는 마른기침이 토해져 나왔고, 입가에는 삼켜지지 못한 침
이 주륵 흘렀다. 애셔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억지로
울음을 참아 냈다. 이렇게 울기에는 너무 억울했으니까.
“피곤했을 텐데 푹 쉬도록 하거라.”
공작이 보여 준 위협, 다시는 기어오르지 말라는 경고와 복종. 페로몬이 없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몸을 감싸 옥죄는 것 같았다. 애셔는 양팔을 문
지르며 불안한 듯 몸을 감쌌다.
“……죽이려고 했어, ……정말,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 분명 원작 속 공작은 애셔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었다. 물론 그 또한 진짜에만 해당하는 사항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가짜
인 애셔에게 차가운 사람인지 몰랐다. 이건 거의 미친놈이라는 말로밖에 표현
이 되지 않았다. 애셔는 자꾸만 치미는 구역감에 서둘러 방에 딸린 화장실로
가 모든 것을 게워 냈다. 루크와 행복하게 먹었을 저녁 식사까지 다 게워 내
며 세면대에서 입안을 씻어 냈다.
“……무서워, 이렇게 무서운데……, 나 어떡해?”
서러움이 폭발했다. 조금 전 느꼈던 낯선 감각들이 몸 위에 벌레가 기어 다니
듯 꿈틀거리는 것 같아, 모든 감각이 소름 끼치게 오싹했다. 애셔는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
이틀을 앓아누웠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오로지 침대에서 애셔는 직접 경험
한 악몽과 싸워야 했다. 아이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능력함은
애셔를 더 힘들게 했고 그럴수록 자꾸만 저를 자존감이 낮게 만들었다.
“……공작가의 자식이면 뭐 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페로몬 앞에서 무력해지는
자신의 몸이 싫었다. 그렇다고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기에 애셔는 어떡해
서든 공작이 꾸미고 있는 일을 알아내야 했다. 그게 다시 자신을 목숨을 다시
위협하는 일일지라도 많은 아이가 희생당하고 있다는 걸 방관할 수만은 없었
다. 애셔는 서둘러 책상으로 가 대공에게 서신을 적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이가 알려 주었던 위치를 대공에게 보냈다. 꼭 반
드시 그곳을 소탕해서 범인을 잡아 달라는 말과 함께 애셔는 그 서신을 쟌을
통해 은밀히 전달했다.
“진짜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야…….”
아직 자신이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걸 상기하며 애셔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끝을 마주 잡았다. 일에 실패하든 성공하든 자신은 공작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저세상으로 하직한다는, 그런 뜻이 아닌, 정말 목숨을 위협받는 그런
상황이 되풀이될 거라는 걸 알았다. 애셔는 마주 잡은 손에 이마에 대고 조용
히 심호흡했다.
왜인지 이 상황에서 그가 손을 잡아 줬던 장면이 떠올랐다. 근래 다정했던 루
크. 모든 운은 거기다가 가져다 썼다고 해도 될 만큼 지금 닥친 상황들이 좋
지 못했다. 하지만 애셔는 그를 떠올리며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그려 냈다.
그렇게 하면 행복해지는 것처럼.
“……애셔?”
화들짝 놀란 애셔가 고개를 들어 대상을 바라봤다. 언제 들어왔는지 눈앞에는
샤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응.”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자신의 이마 위로 손을 가져가 대었다. 살갗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애정
과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시원함에 기분이 좋았다. 애셔는 잠시 눈을 느릿하
게 감았다가 떠 올리고는 샤키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시원해서 좋다…….”
바보처럼 헤-, 하고 웃는 애셔의 모습에 샤키가 눈썹을 찌푸렸다.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 괜찮은데?”
“솔직하게 말해 봐. 너 축제 다녀오던 날 밤, 아버지와 무슨 대화 한 거야?”
다시 거론된 공작의 이름에 애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처럼 창백해진 모습에 샤키는 그가 공작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뭔데. 대공 전하 일로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야?”
“그냥 별거 아니었어.”
애셔가 대답을 회피하며 말하자 샤키는 한숨을 쉬며 방에 놓인 소파로 가 자
리에 앉았다.
“점심 먹고 수도에 나갈 건데, 같이 갈래?”
가끔은 말을 하기 싫을 때도 있다는 걸 알기에 샤키는 더 깊이 물어 오지 않
았다. 그의 배려에 애셔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키가 있는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형 혼자서 가는 거야?”
“혼자서 가기에는 심심하고 살짝 고민 중이야. 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나는 진짜 괜찮아. 오히려 이틀 동안 누워만 있었더니 몸이 뻐근한 지경인걸?”
솔직한 심정으로는 집에만 있고 싶었다. 축제를 즐기기에는 아직 지친 몸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결같이 자신을 배려해 주는 샤키를 보며
애셔는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차라리 점심 나가서 먹는 건 어때?”
“정말 괜찮겠어……?”
“응. 오히려 형이랑 같이 축제에 갈 생각 하니, 기분이 좋은걸?”
샤키는 바쁜 스케줄로 인해 이번 축제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일터와 집
만 오가며 시간을 죽였을 샤키에게 애셔는 밝은 미소를 띠며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는 조금 곤란해. 내가 가려는 곳은 검술 대회거든.”
“검술 대회……?”
“어. 실은 그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야.”
“…….”
“물론 아버지와 형에게도 비밀이고.”
샤키는 검을 좋아했다. 일이 없을 때면 늘 검술장에서 시간을 죽일 만큼 그가
가진 검에 대한 애정은 늘 진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애셔는 샤키의 말에 고개
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럼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입어야겠다.”
“일단 내가 옷을 준비해 놨는데, 함께 갈래?”
“응. 형이 참가한다니 그런 귀한 경험을 놓칠 수는 없잖아.”
애셔의 말에 샤키가 소리를 내 웃었다. 마치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며 샤키는
밖에 있는 시종을 불러 옷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네게 말할 게 있는데…….”
평소 샤키답지 않게 뜸 들였다. 그게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자신을 응시했다.
“애들은 보육원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했대.”
“…….”
“근데 문제는 그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우
리 가문의 경비는 강철 부대라고 불리잖아?”
샤키의 말처럼 공작가의 기사들은 대체로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아이를
보육원으로 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인원을 대동했겠느냐마는 공작의 반응을
봐서는 아이에게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됐다 하셨지만, 네가 마음 쓸 것 같아서 내가 사람을 붙여 알아보
라 일렀어.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는 마.”
“…….”
“내가 꼭 아이를 찾아 줄 테니까.”
걱정하는 샤키를 보면서 애셔는 왠지 모르게 루크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가
이미 알고서 미리 선수 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