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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글쎄요…….”
얼버무리듯 답하는 애셔를 루크가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부담스
러운 눈빛에 애셔는 눈동자를 피하며 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책 속에 나오지 않았지만. 애셔는 오메가로 태어난 자신을 싫어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알파들과 어울리며 오메가를 배척했고, 자신이 알파인 것처럼 욕망
을 펼치며 활보하고 다녔던 것 같았다. 어쩌면 열성이라는 타이틀 아래, 애셔
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에 가담할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아이의 일이 신경 쓰이는 거라면 제 선에서 처리하겠다 말씀하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아이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조
금 전까지만 해도 직접 그곳에 가 소탕할까 생각했지만, 무능한 상태로는 주
위에 피해만 입힐 것 같았다. 가끔 이럴 때 힘이 있는 자에게 부탁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알았기에 애셔는 부스스하게 웃어 보였다.
신전에서 개막식을 알리는 기도가 시작됐다. 황제부터 황태자까지 많은 이들
이 모였지만, 루크는 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걱정되는 마음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리 보십니까?”
“……그냥요.”
애셔의 대답에 루크는 싱겁다는 듯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숨기지 않
고 미소 지어 주고 있었지만, 애셔는 내심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루크 네이슨 블레이크. 사실 그에게는 네르퍼와 록시나 외에도 배다른 형제가
있었다. 그 배다른 형제는 괴롭힘에도 유독 기가 죽지 않는 루크를 보며 악행
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그가 키웠던 새 한 마리를 데려가 모진 짓을 해 댔다.
그걸 알면서도 방치했던 네르퍼와 록시나……. 그 속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자랐
을 루크를 떠올리자니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셔.”
“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말끝을 살짝 늘리자 그가 집요하게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아이에 대한 일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애셔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안정적인 눈빛을 지어 보였다.
“잠시 폐하 좀 뵙고 와야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대신 다녀오시면 저와 재미있게 놀아 주시기예요?”
전혀 갈 의사가 없어 보이는 애셔의 모습에 루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신을 따르던 호위를 애셔에게 붙이며 루크는 다정하게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네. 저도 어디 가지 않고 이곳에 있을게요.”
애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크는 서둘러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걸
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애셔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방긋하고 긴 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애셔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애셔가 맞네!”
브라이슨의 쌍둥이 중 베네딕트가 환한 웃음을 짓고서 애셔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길거리에서 그렇게 요란법석 구는 베네딕트가 부끄러웠는지 곁에
있던 샤인이 서둘러 손을 잡아 내렸다.
“그동안 잘 지냈어?”
먼저 다가와 묻는 남매를 보며 애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후로
두 번째로 만남이었지만, 그날 애셔는 루크에게 다른 알파와는 만나지 않겠다
말을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친근하게 다가서서는 애셔에게 서운한 기
색을 비쳤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 줄 줄 알았는데 너무해.”
샤인이 그에게 눈치를 주며 팔을 톡 쳤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는 자신을 향해 물었다.
“우리는 잘 지냈어. 물론 너도 잘 지냈겠지?”
벚꽃이 흩날리듯 곱고 고운 연분홍 드레스를 입고서 샤인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셔가 무슨 표정을 짓든 거리낌 없이 대하는 그들을 보며 애셔
는 예의상 웃으며 말했다.
“응.”
“사실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걱정 많이 했어. 어쩔 수 없이 바르한의 말
을 따랐지만, 네가 그렇게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
“바르한과 도모해서 전서구를 보낸 건 미안하게 생각해. 네게 상처를 준 건
명확한 거니까.”
샤인의 말에 베네딕트 역시 곁에서 “정말 미안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애셔
는 이제라도 사과를 건네는 두 사람의 마음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
“……그럼 우리 이제 친구 할 수 있는 거 맞지?”
애셔의 눈치를 살피던 베네딕트가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이라면
당연하다고 답했을 애셔였지만, 루크가 떠올라서 섣불리 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밀어낼 수만은 없었기에 애셔는 입술을 한 번 말아 물었다
가 놓으며 답했다.
“응.”
애셔의 답에 샤인과 베네딕트의 얼굴 위로 환한 웃음이 피었다. 어쩌면 알파
와 오메가가 있는 이런 세계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그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앉아 있어? 누구라도 기다리는 거야?”
“응. 대공 전하.”
“아…….”
“너희들은 어디 가던 길이었어?”
“우리? 우리는 유령의 집!”
유령의 집이라는 말에 웃고 있는 애셔의 입꼬리가 경련 난 것처럼 흔들렸다.
빙의 전에도, 후에도 애셔가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귀신이나 유령, 보이지 않
는 것들에 대한 공포였다. 하지만 이 몸의 주인이었던 애셔는 달랐는지 그들
은 손뼉을 마주하며 해맑게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너도 무서운 걸 좋아했지? 이참에 너도 대공 전하와 다녀오
는 건 어때?”
그의 말에 애셔가 어색하게 웃었다.
“거기 한 바퀴 돌고 오면 손등에 도장을 찍어 주는데, 그 도장을 받은 사람만
장미 덩굴에 갈 수 있대.”
“장미 덩굴?”
“응. 피솔트를 대표하는 장미 덩굴.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
야. 그곳에 보물 상자가 숨겨져 있는데, 그 상자를 열어 본 이들이 하나같이
입 모아 말하더래. 행복하고 싶은 이와 함께 가면 좋은 곳이라고.”
“…….”
“그래서 우리도 가려고. 우리는 서로가 행복해졌으면 좋겠거든.”
샤인은 베네딕트를 보며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따뜻하게 느
껴져서 애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럼 우리는 그만 가 볼게.”
“응. 좋은 시간 보내길 바라.”
“너도.”
애셔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애셔는 루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도 루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유령의 집은 무서웠지만, 그가 행복해지길 바라며 애셔는 루크가 오기만을 기
다렸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었을까. 멀리서 루크가 네르퍼와 함께 오는 것이
보였다. 애셔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는 인사를 건넸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얼음장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였다. 애셔는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 것 같아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저는 일행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애셔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챈 루크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애셔가 눈을 크게 뜨며 루크를 바라봤지만, 그는 조
용히 황태자만 응시할 뿐이었다.
“여전히 사람 볼 줄 모르는군.”
“제가 알아서 합니다.”
루크의 낯빛이 어두워지며 딱딱하게 굳어 갔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울 정도였
지만, 네르퍼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루크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아무래도
루크는 자신이 모르는 과거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 같
았다.
“사람은 말이다. 내 사람이라 생각되더라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설령 그 대상이 나와 약혼할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그 대상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제가 정합니다. 물론 선택에 따른 결
과도 제가 책임지고요.”
“루크.”
“모처럼 충고해 주셨는데 감사합니다, 형님.”
루크가 형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거의 예를 갖추기 위
해 짜인 미소라고 해도 될 만큼 영혼 없는 미소였다.
“참으로 한결같아. 충고는 듣지도 않는 버릇. 내가 고치라고 한 것 같은데?”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 부분은 추후에 따로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루크의 말에 못마땅한지 네르퍼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더니
애셔를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다음에도 볼 수 있으면 보도록 하지.”
거의 공포와도 같은 말에 애셔의 긴 눈꺼풀이 잘게 흔들렸다. 안쓰러울 만큼
애처로운 떨림에 그는 헛바람을 들이켜고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묻는 루크의 말에 애셔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장미꽃만큼이나 붉고 아름다운 눈빛이 자신을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셔는 뒤늦게 그의 손이 제 손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전
과 다르게 천천히 손길을 떼어 내며 그가 닿았던 부위를 매만졌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런데 저……, 부탁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