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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조곤조곤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애셔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까 배려해서 한 행동인 것 같았다. 애셔는 루크에게 보이지 않
게 입술 끝을 살짝 내리 물고는 손을 살짝 그러쥐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소문이 좋지 않은 자신과 있다 그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
지만 그는 입가에 긴 호를 그리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지금 순간에 누구와 함께 있냐가 더 중요하니까요.”
다정하게 들리는 그의 말에 애셔의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부정할 수도 없게
도 그 말이 싫지 않아서 애셔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구, 구경하고 싶은데요…….”
“어디가 가고 싶습니까?”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애셔가 어딘가로 손을 가리켰다.
“저기요……!”
“구슬치기가 하고 싶습니까?”
그제야 자신이 가리킨 곳이 아이들이 모여 구슬치기하는 장소라는 것을 깨달
았다. 민망함에 애셔는 볼을 살짝 붉히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이들이 너무 귀엽네요…….”
“……아이들이 귀엽습니까?”
“네. 올망졸망하니 귀여워요.”
어쩐지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애셔는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뒷
목을 문질렀다.
“……왜요?”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애셔가 눈을 깜박였다. 루크는 애셔를 지그시
내려다보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아닙니다.”
“…….”
“그럼 장소를 이동하도록 하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호했다. 애
셔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 아이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서 불시에 튀
어나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애셔가 대처하지 못하자, 루크가 그대
로 허리를 감싸며 자신을 끌어당겼다.
“저, 전하?”
애셔의 코끝이 루크의 가슴에 닿았다. 의도치 않게 맞닿은 상황에 귓가에는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자칫 부딪힐 뻔했습니다.”
마차 이후로 맡아지는 그의 체취가 정상 사고를 할 수 없게 했다. 미약이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어지러운 듯한 기분이 들었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애셔
는 여전히 허리에 닿아 있는 손길을 밀어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수줍은 꽃처럼 작게 속삭이는 애셔의 곁으로 톰스가 다가왔다. 애셔는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소매치기인 것 같습니다. 솜씨로 봐서는 한두 번 한 게 아닌 것 같
고요.”
그가 자신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제야 저 멀리로
아이가 다른 호위 기사에게 붙잡혀 있는 게 보였다.
“일행도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톰스의 말에 애셔가 골목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또 다른 아이가 눈
물을 글썽인 채로 빼꼼하고 이쪽을 바라보다 다시 숨어 버렸다. 애셔는 자신
의 처벌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톰스를 뒤로하고 다른 기사에게 붙잡
힌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 아파요……. 왜 그러시는데요.”
겁에 잔뜩 질린 아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기사에게 말했다. 그러다 자신과 눈
을 마주하고는 서둘러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머, 아이가 도둑질했나 봐요.”
“그러게요. 하필이면 공작가 망나니한테 걸려서…….”
“아이고 안타까워라.”
어느새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아이를 보며 수군거려 댔다.
딴에는 들리지 않게 말을 한다고 한 것 같지만, 그들의 말은 여기까지 들려왔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루크가 참다 본인의 오른팔이자 호위 기사를 불렀다.
“세인트.”
루크의 말에 세인트가 주위에 있는 이들을 물렸다. 짐작하건대 축제 기간이라
구경꾼들을 그냥 돌려보낸 것 같았다. 만약 이 기간이 아니었다면 구경꾼들이
지금처럼 편하게 돌아가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셔.”
루크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애셔는 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아이에
게 다가갔다.
“정말 훔치려고 했었던 거니?”
애셔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하며 울먹였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아이는 거짓말이
들통나 처벌받을까 두려운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거짓말까
지 하니 그건 좀 힘들겠다.”
애셔의 말에 아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이는 애셔가 내린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결국 안 훔쳤잖아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증거도 없는데……!”
“증거가 없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그 마음을 품
고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지.”
“돈 많잖아요! 그깟 몇 푼 좀 없어진다고 뭐가 달라져요? 불쌍한 우리에게 조
금 나눠 주고 살면 안 되는 거예요?!”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귀족들은 다 나빠요! 밥도 제대로 주지도 않으면서 가둬 놓고 괴롭히고!”
“뭐? 가둬 놓고 괴롭혀……?”
“차라리 벌을 줘요! 지금이랑 감옥이랑 뭐가 다른데……, 흑…….”
이게 정말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 건지. 결국 아이의 눈에서 눈물
이 터져 나왔다. 아까는 홧김에 한 말이라는 듯이 아이는 무릎을 꿇으며 자신
을 향해 손을 싹싹 빌었다.
“……잘못했어요! 그냥 배가 고파서……, 아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저
희 죽어요……, 흐흑…….”
두서없이 말을 하는 아이의 나이는 적어도 열 살은 먹은 듯 보였다. 목깃이
잔뜩 늘어난 허름한 셔츠에 무릎 단이 닳은 바지. 아이의 행색은 안쓰러울 만
큼 처연해 보였다.
“저 이대로 돌아가면 죽어요……,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제가 뭐
든 할게요. 밥이든 빨래든, 거둬만 주신다면……, 제발…….”
더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애셔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눈물
을 닦아 주었다. 하필이면 아이를 괴롭혔던 대상이 자신과 같은 어른이라서
애셔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저 좀 데려가 주세요……, 흑.”
데려가 달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아이를 보며 애셔는 울컥함이 밀려왔
다. 하지만 억지로 밀어내며 아이에게 말했다.
“……훔치지 않았어도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건 나쁜 행동이야. 물론 누군
가가 네게 시켰다고 해도 그건 나쁜 행동이야.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 거고.”
“끄윽……, 죄,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저씨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면……. 밥도 주지 않아서…….”
보통 책에서 보면 어린아이를 착취하는 질 나쁜 어른들이 존재했다. 그건 이
세상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는 이들의 시선도 많습니다. 나머지는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던 루크가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혹여라도 아이에게
보복이라도 가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만의 배려인 것 같았다. 애셔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톰스에게 말했다.
“아이에게 입힐 옷과 거처를 마련해 줘. 아이가 원한다면 일자리도 내어 주고.”
“네.”
“저기 골목에 있는 아이도 함께 말이야.”
애셔의 말에 아이의 울음이 뚝 멈췄다. 정말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이냐는 듯
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셔를 바라봤다.
“앞으로는 정당하게 일을 하는 거야.”
아이의 커다란 눈가에 보석 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러다 결국 눈물이 펑펑 쏟
아지자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아 냈다.
“……흐흑,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창 예쁘게 자라나야 할 나이
의 아이를 보니 속이 상했다. 많이 먹고 성장해야 할 아이를 이렇게 착취하다
니. 애셔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아직도 제국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니. 축제가 끝나면 제대로 수사해 뿌
리째 뽑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아이가 용기를 냈는지 애셔를 불렀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을 달고서 아이는
두 손을 모아 애셔의 귓가에 속삭였다.
“포스튼이라는 술집이 있어요. 화장실 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보면 정말 작
은 구멍이 있는데, 그곳이 저와 친구들이 사는 곳이에요…….”
“친구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많은 아이가 노동에 착취당했고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며 매일같이 굶주림에 시달린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이없는 건 아이들이 하나같이 다 알파라 했다. 제국에서 오메가를 불법
으로 매수하면 사형이었지만, 알파는 다들 신고해도 쉬쉬하며 눈을 감아 주는
추세였다. 애셔는 톰스가 아이를 데려가는 걸 조용히 바라보다 루크가 곁에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이 기억을 잃으면 성격도 바뀌나 보군요.”
“……네?”
“기억을 잃기 전, 제게 아이가 싫다고 했습니다. 임신이라는 건 오메가로 태
어난 것보다 더 끔찍하다고 했고요.”
애셔는 그제야 ‘아…….’ 하고 짧은 침음을 했다. 어딘가 모르게 그의 시선이
묘하게 날카로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