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19화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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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빙의하고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해 준 사람. 하지만 훗날을 위해서라도 깊게

정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애셔는 자꾸만 잘해 주는 샤키로 인해 목

아래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형이랑 술 한잔 할래?”

“아니. 그냥 여기서 바람만 쐬다 들어갈게.”

“애셔.”

“수련 끝나고 바로 여기로 온 거지? 어서 가서 밥 먹어. 자고로 사람은 밥심

이랬어.”

물론 그 이야기는 빙의 전 세계의 이야기였지만, 애셔는 샤키의 등을 떠밀듯

밀어내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방긋 웃자 그가 어이

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는 있지 마. 잡념이 길어질수록 나를 잃어버리는 거니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샤키를 보며 애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난히도 밝은 밤.

앞으로도 모든 것들이 무탈하길 바라며 애셔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

제국의 건국일을 기념하는 파티가 마을 곳곳에 열렸다. 화려한 깃발과 들리는

경쾌한 음악 소리는 이른 아침부터 활력을 돋워 주었다.

제국에서 제일 큰 행사인 만큼 공작저에도 시종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애셔는

재단사를 통해 미리 맞춘 옷을 입고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우리 막내. 오늘따라 멋진데?”

준비가 일찍 끝났는지 샤키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얀색 복장을 깔끔하게

입은 그는 책을 펼친 채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애셔는 샤키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상하지는 않아?”

“전혀? 오히려 예전의 너 같아서 좋은데?”

좋은 뜻에서 한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말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괜

히 옷에 힘을 줬나 싶어 매무새를 정돈하자 공작이 이 층에서 내려오는 게 보

였다.

육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공작은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슬슬 힘에 부치는 건지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힘겨워하는 게 느껴졌다.

“대공 전하께서 자택을 방문한다고?”

전달받은 말에 잠시 화색을 띠었던 공작은 이내 애셔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이제야 말하다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애셔의 대답에 공작이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

작 앞으로 차를 한 잔 내려놨다.

“귀한 손님이 오는 만큼 성대하게 준비해야겠군. 그나저나 샤키. 황녀 전하께

서 너에게 따로 서신을 보냈던데?”

“황녀 전하와 체스를 둔 적이 있는데 본의 아니게 제가 이겼거든요. 그래서

다시 한번 저와 겨루고 싶다고, 성으로 초대한다는 초대장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알파는 알파다. 네게 목적 없이 접근은 하지 않을 터. 무슨

낌새 같은 게 보인다면 내게 바로 보고 하도록.”

“걱정 마세요. 아버지. 이래 봬도 아버지를 닮아 머리 하나는 똑똑하거든요.”

그를 추켜세워 주는 말에 공작의 입가에 긴 호가 그려졌다. 확실히 엠버보다

샤키를 더 편애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제일 마지막으로 내려온 엠버가 고개를 까닥이며 자리에 앉았다. 근래 사춘기

가 뒤늦게 온 건지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하플 왕국으로 가는 물건에 크리스토가의 지분이 높던데.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 보아라.”

공작은 엠버를 보는 순간 불신감에 찬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엠버를 못 믿는

듯 보였다.

“제게 맡기신다고 하셨으면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설마

아직도 제가 불안하신 겁니까?”

“엠버.”

“물류업을 하는 가문으로서 전략적으로나 절대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가문입

니다. 우리 가문에게는 큰 도움을 줄 것이고요. 그 예시로 이번에 하플 왕국

에서 들어오는 물건의 유통권을 저희 쪽으로 가져올까 합니다.”

“지금이야 이익 볼 게 있으니 맞춰 주겠지만, 크리스토가가 우리와 어떠한 결

속이 있지 않으니 언제 우리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른다. 거래를 할 때는 상대

를 믿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황실과 엮일 생각을

하거라. 어찌 네 동생보다 못할꼬.”

공작은 황실의 힘만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제 발아래로 들어올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엠버는 분을 억누르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원작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분열이 없었던 걸로 기억했다. 물론 브래든의 이

야기가 중점을 이루다 보니 이런 사건은 특별하게 나오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아버지. 저는 형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앞으로는 형이

가문을 이어 갈 텐데, 가끔은 뒤에서 지켜봐 주시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샤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떡해서든 분위기를 풀어 보

고자 하는 게 보였지만, 그럴수록 엠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래

도 그는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 보였다.

“형에게 가문을 이어 준다? 그건 누가 그랬지?”

“아버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가문을 이어받는다 해서 상단을 물려준

다고 한 적도 없고.”

“…….”

“맡긴다고 한 말은 너희들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니 부디 내

가 실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분발하거라.”

엄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답하는 공작의 말에 식탁 위에는 무거운 침묵만 내려

앉았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대화한 적이 없었기에 애셔는 곤란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

“저하.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였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대공의 소식에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보니 루크의

방문이 꽤 기쁜 듯 보였다. 공작은 서둘러 루크가 있는 곳으로 가 그를 반겼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똑같습니다. 하나,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공작가를 방문해 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런 날 루크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은 아네스트가의 가문에 힘을 실어 주겠

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공작이 저리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이해되

는 일이었다. 또한 애셔가 대공에게 목을 맨다는 소문마저 잠재울 절호의 기

회였기에 공작은 음흉한 눈빛으로 루크에게 말했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그건 다음에 하겠습니다. 오늘은 애셔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니까요.”

그가 이름에 강조하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애셔의 등을 떠밀었다.

“나이가 드니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럼 편히 데이트 하시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국의 축제는 밤부터 시작입니다. 오늘 저녁

만큼은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즐기는 날인데, 굳이 공작가 사람들에게 일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니 각자의 시간을 보내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식사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루크의 말에 공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연장자답게 표정을 갈무

리하고는 의연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꼭 정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

달그락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창밖의 시야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무 곳곳에

는 축제를 알리는 깃발들이 가득했고 거리에는 밝은 대낮부터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가득했다. 애셔는 빙의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축제에 심장이 두

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불편하면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까?”

“……아니요?”

루크의 물음에 애셔가 의아함을 띠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자신이 의

자 끝에 걸터앉아 창가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괜찮아요. 축제에 들떠서 그만…….”

애셔가 자세를 바로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둘이 있는 게 서

먹해서 거리를 물렸었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건 나룻배 이후로 처음이

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밖의 세상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만 이쪽으로 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네?"

"아니면 제가 갈까요?"

“아, 아니요! 제가 갈게요.”

토끼처럼 놀란 애셔가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옮겨 앉았다. 가운데에 사람이

앉아도 될 만큼 넉넉한 거리였다.

“설마 그게 끝입니까?”

“……?”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먼저 다가가는 수밖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거리를 단숨에 좁혀 왔다. 서로의 옷깃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애셔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삼켰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냥, 채, 책 읽고……. 똑같았어요.”

마차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딘가 묘하면서도 한껏 올라간 긴장감에

애셔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게 전부입니까?”

“……왜, 왜요?”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제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 달라질 관계인 만큼 서로에 대해 좀 더 고민했을 거라 생각했

습니다.”

그제야 애셔는 입에서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전하께서 잘해 주시니까 너무 급작스럽기도 하

고……. 또 한편으로는 괜히 불안하고 그래요.”

“……그래서 싫습니까?”

“아니요, 싫지는 않아요. 다만 이런 느낌이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저 그가 웃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떠나는 순간까지 곁에

서 그를 조용히 지켜만 보자 했었다. 하지만 뜻하게 않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애셔는 기분이 찜찜해졌다.

“괜한 기우겠지만 만약 저를 이용하시는 거라면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

어요.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용도를 다했을 때 제자리에 놔주시면 좋겠어요.”

“…….”

“저는 진심으로 전하께서 행복하시길 바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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