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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애셔는 복도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수련장을 찾았다. 오늘 상단에 나가지 않은
샤키가 그곳에서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련
에 집중했는지 자신이 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곁에서 시종이 ‘고할까
요?’라고 물었지만, 애셔는 됐다는 손짓과 함께 그의 수련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 자리를 앉았다.
타고난 체형과 날렵한 몸짓. 샤키는 검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또한 두뇌 또한
명석해서 상단을 이어 가기에는 충분히 재질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브래든이 돌아와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면, 애셔는 제일 먼저 그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물론 그것도 후에 바뀌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샤키만큼 자
신에게 다정한 이는 없었으니까.
애셔는 조용히 그가 수련하는 모습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애셔?”
뒤늦게 애셔의 존재를 알아챈 샤키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으며 이름을 불렀
다. 시종이 내민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애셔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환하게
웃어 주었다.
“이곳까지 어쩐 일이야?”
아직 닦이지 않은 땀방울이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리더니 턱 끝에 맺혔다. 애
셔는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 주며 작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냥 형이 보고 싶어서.”
보고 싶다는 말이 애셔의 입에서 거리낌 없이 흘러나왔다. 샤키는 그 말에 기
분이 좋다는 듯이 피식, 소리 내어 웃고는 물병을 집어 반쯤 비워 냈다.
“그래서 고민이 뭔데?”
여전히 웃음기가 서린 말을 건네며 그가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아 냈다. 하
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그는 물병을 시종에게 넘기고는 자신이 앉
은 자리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엔 정말 심심해서 온 거야.”
“내가 너를 모를까. 그냥 털어놔 봐. 형이 들어 줄게.”
샤키의 말에 애셔가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는
애셔의 모습에 샤키는 대화의 운을 트듯 말을 꺼냈다.
“왜, 무슨 사고라도 쳤어?”
“그게 아니라 아까 오는 길에 바르한을 만났거든. 그런데 이번에 백작위를 이
어받는다고 하더라고……. 크리스토 백작께서 이번에 물러나시는 거야?”
“어, 그런다더라. 너도 알다시피 두 분 사이가 좀 좋잖아. 그래서 이번에 작
위를 바르한한테 물려주고 휴식 겸 여행을 다녀오실 계획인가 봐.”
생각보다 빠른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에서 그랬다
니. 애셔는 영혼 없는 사람처럼 “아…….” 하는 소리만 내었다.
“그래서 요즘 엠버 형이 바르한을 많이 찾아. 또 바르한이 형한테 잘하기도
하고.”
“하지만 형……. 아무리 그래도 바르한은 황태자를 많이 따르잖아. 만약 백작위
를 이어받는다면…….”
“애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애셔의 표정에 샤키가 손을 마주 잡았다. 동시에 불안
을 잠재우는 따뜻한 기운이 살갗을 타고 전해 들어왔다.
“걱정돼? 혹시라도 우리 집안이 대공 전하를 배신할까 봐?”
“배신이라는 것보다는 그냥 불안해서.”
한바탕 폭풍이라도 불 것처럼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이것 또한 자신이 원
작을 틀어서 이렇게 된 것만 같았다. 원작대로라면 바르한은 루크와 자신을
힘들게 하려고 존재한 인물이었으니까. 저주도 걸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어
떻게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네가 대공 전하와 함께 있는 이상, 우리 집안은 여전히 너를 지지할 거야.
그 말은 곧 블레이크 가문을 지지한다는 소리고.”
“…….”
“그건 아마 엠버 형도 그렇다는 소리겠지. 아무리 바르한과 친분이 두텁다 해
도 결국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거든.”
상냥함이 물씬 풍기는 어조로 그가 자신을 달랬다. 덕분에 불안했던 감정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형.”
“겨우 그것 때문에 그렇게 불안했던 거야? 그런데 애셔.”
“응?”
“너는 전하를 좀 믿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애셔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그는 겹친 손등 위를 가
볍게 도닥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네가 걱정할 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야. 대공이라는 호칭이 괜히
있는 거겠어? 수많은 이들을 책임져야 할 자리인데?”
“…….”
“아마 네가 걱정하기도 전에 다 정리가 되겠지. 특별한 예외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쩌면 샤키의 말대로 괜한 기우일지도 몰랐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
바보 같은 애셔의 모습에 그는 피식 웃고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우리가 대공가를 찾았을 때 무사히 돌아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건 우리
가 네 가족이기 때문이겠지. 비록 네게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에게 너는 앞으
로 인생을 함께해야 할 상대이니까.”
“…….”
“그러니까 잘해 봐.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더라. 일 퍼센트의 가능성
이라도 있다면 부딪쳐 보는 쪽이 좋지 않겠어?”
애셔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샤키는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동시
에 붉어진 애셔의 모습에 샤키의 얼굴이 짓궂게 물들었다.
“근데 보니까 조금 힘들긴 하겠더라. 확실히 우성은 우성이더라고.”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그가 힘내라는 말을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날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닌지 애셔는 루크에게 만나자는 서신을 받았다. 그
것도 호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서힌 마을에서였다. 야외에서 따로 만나
는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애셔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쟌! 이 옷이 어울릴까? 아니면 이게 어울릴까?”
최대한 멋진 모습만을 보여 주고 싶었기에 애셔는 여러 벌 옷 중 하나를 골라
거울 앞에 섰다. 유난히도 튀는 핑크빛 머리에 애셔는 화려한 옷들을 다 물리
며 단정하고 깔끔한 베이지 톤의 옷을 집어 들었다.
“도련님, 시계는 어떤 종류로 할까요?”
애셔가 옷을 갖춰 입자 쟌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계가 놓인 쿠션을 내밀었다.
대체로 화려한 색이 많았지만, 애셔는 짙은 브라운이 감도는 시계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할게.”
애셔의 말에 쟌이 손목 위로 시계를 둘러 주었다. 그런 쟌의 모습을 애셔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을 시중든다는 게 낯설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매일같이 따라다니며 잠드는 순간까지 수발드는 게 애셔의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애셔는 시종을 한 명으로 줄였고 그 사람
이 쟌이었다.
쟌은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졌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애셔와 달리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결혼 적령기가 훌쩍 넘은 나이였다.
“쟌은 만나는 사람 없어?”
“네.”
“왜? 너무 바빠서?”
“아니에요, 도련님. 저는 앞으로도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애셔는 결혼 생각이 없다는 뜻밖의 말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처음에는 자
신과 붙어 있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그랬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
쩐지 사연이 있는 듯한 표정에 애셔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돼?”
“그냥 별거 없어요. 좋아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쟌의 말에 애셔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단순히 비혼 주의나 아
니면 특별한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은 가슴 아픈 이야기에 애
셔가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 그런지 몰랐어.”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저는 괜찮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쟌의 입술이 살짝 경직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자신의 목에 리
본을 예쁘게 매듭 지으며 그는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오늘도 멋있으십니다.”
“……고마워.”
어쩐지 애셔는 쟌의 말에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입가에 미소를
만들며 조용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여름이 다가오는 6월의 끝자락답게 하늘은 맑았다. 한바탕 비라도 퍼부을 것
처럼 너무도 깨끗해서 애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끔 이렇게 하늘을 보고 있자면 빙의 전 세상이 떠올랐다. 그때도 어김없이
글을 쓰다 지칠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고, 어느새 이 몸에 적응해 가는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평생
남자의 몸으로 살아왔는데 임신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다니. 누
가 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히트 사이클이라는 것도 터진 적 없었고, 귀족 집안의 몸이라
그런지 누군가 자신에게 해코지한 적도 없었다. 황태자와 마주했던 그때를 제
외하고는…….
그랬기에 애셔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평범하게 생활했다. 오메가라고 했지만
특별하게 달라진 게 없는 일상에서 애셔가 조심해야 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
었다.
“그러다 뚫어지겠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애셔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그 대
상이 루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