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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청량하다 할 만큼 날이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고 바람은 선
선하다 싶을 만큼 포근했다. 애셔는 미리 준비한 승마복을 입고는 바르한 일
행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등장한 애셔로 인해 주위의 시선들이 하나둘 꽂혔다. 누군가에게 이
목이 끌린다는 건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지만, 애셔는 최대한 태연한 척 어
깨를 펴며 그들 사이로 다가갔다.
“애셔?”
자신이 정말 올 줄 몰랐다는 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 거
리낌 없이 다가와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아 하니 평소에도 애셔와 이런 식으
로 인사를 주고받고 한 것 같았다. 굳이 그런 관계까지 정리할 필요가 있나
싶어 애셔도 말을 낮추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잘들 지냈어?”
애셔의 말에 잠자코 있던 바르한이 불쑥 튀어나왔다. 얼굴에는 불만을 가득
담은 채, 그는 애셔를 이리저리 훑으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한테는 존댓말로 선을 긋더니 왜 다른 이들에게는 반말인 건데?”
그가 심통 난 얼굴로 눈을 살짝 찡그렸다.
“미안. 그때는 경황이 없었어. 알다시피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됐어. 이제라도 그래 주니 내가 다 황송할 지경이다.”
살짝 비꼬듯이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은 화가 금세 풀린 아이처럼 미
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그런 변화였다. 애셔는 시
선을 피하듯 승마 모임의 다른 회원을 바라봤다.
연보랏빛이 감도는 머릿결과 함께 귀여운 이미지를 가진 남매는 변방 쪽에 있
는 브라이슨 백작가의 쌍둥이인 베네딕트 영식과 샤인 영애였다. 실제 원작에
서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애셔는 그들이 바르한에 의해 협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알파인 바르한과 다르게 열성 알파였다.
“오랜만에 모든 회원이 다 모였네? 통 크게 오늘 저녁 내기 어때?”
“바르한이 좋다면 나도 좋아.”
“나도.”
바르한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은 옹호하듯 답했다. 바르한의 말이
곧 법인 것처럼 답을 하던 두 사람은 애셔를 향해 바라봤다. 이 모임에 주도
권은 모두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길에 애셔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
이며 원작 속 애셔를 떠올렸다.
원작에서 애셔는 오메가는 오메가와 어울려야 한다는 개념을 싫어했다. 강한
성격답게 오메가도 알파와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이 모임을 만
들었다. 그래 봤자 오메가라고는 애셔가 전부였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내기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루크를 제외한 다른 알파와의 만남은 최대한 피하고 싶
었으니까.
애셔는 이번 모임을 마지막으로 이들과의 관계에 끝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그
들의 제안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애셔의 대답에 신이 난 바르한이 어깨를 풀며 뒤에 있던 마부에게 고개를 까
닥였다. 마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에게 말을 데려다주며 조용히 퇴장했다.
“제가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톰스가 곁으로 다가와 공작저에서 미리 데려온 마부와 함께 말을 살폈다. 평
소 애셔가 탔던 말답게 말은 매끈한 피부 결을 자랑하며 우렁찬 소리를 내었다.
“상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고마워. 톰스.”
비록 말을 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애셔는 자신이 타게 될 말을 향해 다가
갔다. 다행히도 말은 애셔를 기억하는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내밀며 애셔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잘 부탁할게.”
애셔는 말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톰스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
탔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바르한과 쌍둥이가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줄을 맞췄다.
“그럼 달려 볼까?”
“그래.”
바르한의 말에 애셔가 답하자 그들은 하나같이 말의 고삐를 내리쳤다. 남자에
게 내기란 목숨과 같다는 말처럼, 그들은 초원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
다. 애셔는 그런 그들을 보다 점차 속도를 줄여 느릿하게 걸었다. 애초에 원
작을 살짝 비틀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바르한은 왔던 길을 되돌아와 곁으로 붙
었다.
“뭐야,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너무 오랜만에 필드 나와서 그래?”
“……그냥, 바람 좀 천천히 쐬고 싶어서?”
“웬일이래? 승부욕 하면 미친 듯이 발동하는 사람이?”
바르한의 말꼬리가 한 톤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여서 애셔는 시선을 피하며 어깨만 으쓱였다.
“어디 아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응. 그렇다 해도 뒤에 톰스가 있어서 괜찮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
“내가 왜?”
“……어?”
“내가 너를 두고 왜 먼저 가냐고.”
당황한 애셔의 물음에도 바르한의 목소리는 무감각했다. 소유욕이 강하게 담
긴,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일렁이는 눈빛이 애셔를 바라봤다. 그제야
애셔는 광장에서 맞닿았던 그 감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섬뜩하면서도 불필요한 감정. 발정기를 앞에 둔 짐승처럼 보이는 그의 눈빛은
알파가 오메가를 원할 때 보인다는 그런 눈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에 애셔는 톰스가 뒤에 따르고 있음에도 말의 고삐를 잡아 속도를 높였다.
“왜 갑자기 속도를 높여? 갑자기 승리욕이라도 든 거야?”
사냥하는 짐승처럼 그는 어림없다는 듯이 애셔의 곁을 따라붙었다. 그 길이
지옥의 끝이라도 따라붙을 것처럼 그는 집착이 가득한 눈길로 정체 모를 압박
을 보냈다.
“그만 속도 좀 줄여. 그러다 절벽까지 가겠다!”
절벽이라는 말에 애셔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원작을 피해 보겠다고 다짐
한 게 조금 전이었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애셔가 말을 멈춰 세우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면 저 나무에서 쉬었다 갈래?”
힘들어하는 자신과 다르게 그는 말을 느릿하게 끌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니. 돌아갈래.”
“그런데 말이야, 애셔. 아까부터 왜 자꾸만 나를 피하는 것 같이 느껴지지?
사람 기분 열 받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하는 바르한을 보며 애셔의 고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소문에 의하면 네가 대공 전하께 목을 맨다고 하던데. 설마 그 소문이 거짓
이 아니라 진짜였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이 없어? 나한테는 사생아라 싫다고 재수 없다고 온갖 욕은 다 늘어
놓고서, 이제 와 혼자 재미 보시겠다?”
“말조심해. 바르한.”
루크에 대한 험담에 애셔의 눈매가 매섭게 떠졌다. 아무리 자신이 과거에 욕
을 했을지라도 지금은 자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더는 선을 넘지 말라
는 듯이 불쾌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거
칠게 넘기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지금 되게 적응 안 되려고 하는데?”
“뭐가.”
“아무리 네가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과거
에 네가 했던 발언들도 그렇고 너한테 나는 꽤 필요한 존재였던 걸로 기억하
는데?”
이렇게 나오면 나올수록 불리한 쪽은 자신이라는 듯이 그가 피식거리는 웃음
을 흘렸다. 비죽함이 담긴 웃음소리에 애셔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눈을 천
천히 감았다 떠 올렸다.
“과거에 내가 뭐라 했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애셔.”
“하지만 네가 전하한테만큼은 말을 함부로 하는 걸 앞으로 못 볼 것 같다. 그
러니까 앞으로는 내 앞에서 전하에 대한 험담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알다
시피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거든.”
애셔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며 바르한을 응시했다. 더는 선을 넘
지 말라는 듯이 무언가의 압박을 보냈지만, 그는 독초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
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좋아.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은 지나쳤어. 그러니까 나를 왕실 모독죄로 처넣
을 게 아니면,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이래 봬도 우리 서로 도모하는 게
있잖아?”
“……도모라니?”
“기억을 잃었다더니 거짓은 아니었나 보네. 이런 중요한 일까지 잊어버리고.”
왠지 모를 검은 기운이 애셔의 몸을 감쌌다. 분명 아무런 페로몬도 흘리지 않
았는데,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애셔는 쥐고 있던 말의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그럴 것 같아서 내가 황태자 전하께 네 마음을 전해 드렸는데. 좋은 시간 보
내지 않았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네가 대공 전하의 등을 치고 황태자 전하의 편에 선다는 약조. 나는 황태자
전하께 진실만을 말해 드렸어.”
바르한의 말에 애셔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루
크의 뒤통수를 치고 황태자 전하의 편에 선다니……. 이제야 애셔는 그날 네르
퍼가 왜 그렇게 자신을 향해 적대시했는지 알 것 같았다.
훗날 루크가 이걸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무척이나 실망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싫어도 미래에 함께할 거라는 전제하에 만나고 있는 사이였으니까. 애셔는 밀
려오는 슬픔과 함께 억울함에 목이 버젓하게 말라 왔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이 감정을 보여 주기 싫었기에 그의 눈을 바로 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 이건 내가 네게 주는 경고야.”
“경고라……. 그러기에는 우리 서명한 계약서가 있지 않나?”
“…….”
“이걸 대공 전하께 가져다 보여 줘도 되는 건가? 그게 아니면 빠르게 사과해.
애셔 아네스트.”
바르한은 다시 주도권을 가져왔다는 듯이 입매를 빙그레 끌어 올렸다. 덕분에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지만, 애셔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주 보며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