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10화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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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분명 그랬는데, 언제 잠이 든 건지. 애셔는 몸이 무거운 것을 느꼈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한 기분에 애셔가 어떻게서든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몸 위로

가해진 체중은 더 무거워져만 갔다.

“……흐.”

앓는 소리와 함께 애셔가 입 밖으로 신음을 흘렸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서 온 힘을 다해 눈을 뜨자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놀란 마음에 애셔는 소리치듯 경기했지만, 곧 남자에게 살기가 없다는 것

을 느꼈다.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하늘빛 머리카락, 신비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낸 보랏빛

눈동자의 남자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크 다음으로 눈길이 가는 남

자라고 할까?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에 애셔는 놀란 듯 눈 크기를 키우며 말했다.

“……누구세요?”

“안녕?”

애셔의 물음에 인사로 답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귓가에 흘러 들어

왔다. 노래한다면 꼭 들어 보고 싶을 만큼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네가 내게 처음 한 말이야.”

그제야 애셔는 눈앞에 있는 이가 함께 밤을 보낸 토끼라는 것을 깨달았다.

“토, 토끼?”

“캘럽.”

“…….”

“그게 내 이름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이름은 녹아내릴 만큼 고왔다. 남자에

게 이런 말이 안 어울릴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이것만큼 어울리는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캘럽은 애셔의 손을 잡아 본인의 가슴 쪽으로 잡아당겼다. 본인의 심장 소리

를 들어 보라는 듯이 그는 심장 부근 위에 손을 놓으며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극적인지 애셔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고맙다. 나를 살려 줘서.”

캘럽의 말에도 애셔는 바보처럼 입만 달싹였다. 어서 비켜 달라고, 내려오란

말을 해야 하는데 캘럽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요지부동이었다. 차라리 감정

이라도 읽힌다면 좋겠지만 수인이라 그런지 캘럽에게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

히지 않았다.

“나는 은혜를 입은 건 평생 잊지 않는다.”

“아니, 잠깐만……! 처음 너를 발견한 건 내가 아니야. 우리 형이지. 약을 먹인

것도 우리 형이고.”

“그런데?”

“만약 우리 형이 너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너를 몰랐을 거야. 그러니까

감사의 인사는 우리 형에게……!”

“애셔.”

어떻게서든 그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으려 했다. 그를 책임지는 건 자신이

아니라 브래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일축했다.

“나는 네 형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누가 나를 발견했든 끝까지 나를 놓

지 않고 치유한 건 너였다. 나는 그런 네게 감사한 거고.”

“…….”

“네게 언젠가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나는 너를 도울 것이다. 말했다시피 우

리 수인족은 한번 은혜를 입은 건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게 목숨을 내놓는 일

일지라도.”

그는 여전히 손을 마주 잡으며 애셔와 시선을 마주했다. 부담스러울 만큼 곧

은 시선으로 캘럽은 손등 위로 입을 맞추며 눈매를 생긋 휘었다. 당황한 애셔

는 손을 빠르게 빼내며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맹세의 서약.”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보이는 캘럽의 몸에 애셔

는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인간으로 변했다는 사실 하나로 인지하지 못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알몸 상태였다. 애셔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고는 담

요를 끌어 캘럽에게 건넸다.

“토끼였을 때는 잘만 보더니 이제 와 부끄럽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애셔의 귀 끝이 붉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애셔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쳐진 가운을 내밀었다. 눈은 여전히 질끈

감은 채로.

“입도록 해.”

“설마 나한테 이게 맞는다 생각하고 건네는 건가?”

“맞든 안 맞든 일단 급한 대로 걸치면 안 될까? 옷은 그다음에 가져다 달라고

할 테니까……,”

“곧 토끼의 모습으로 돌아갈 텐데 그럴 필요 없다.”

캘럽은 굳이 옷을 맞춰 줄 필요 없다는 듯이 애셔가 내민 가운을 걸쳤다. 그

제야 애셔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캘럽을 바라봤다.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던 토끼와 달리 캘럽의 몸은 근육질이 가득했다. 생

각했던 것과 달리 풍기는 짙은 남성미에 애셔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밀려왔다.

“옷이 생각보다 짧군.”

“아무래도 그쪽이 크니까…….”

“그래도 뭐 나쁘지 않다. 이 옷에서 네 체취가 풍겨서 기분이 좋거든.”

수위가 높은 캘럽의 말에 애셔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손사래를 쳤다. 누

가 들으면 오해할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

며 애셔가 말했지만, 캘럽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기……. 원래 말투가 그래?”

“이상한가?”

“……조, 조금?”

자칫하면 예의 없어 보이는 말투였다. 일단 어색하게 ‘다.’로 끝나는 말만 고

치면 좀 괜찮을 것 같았다. 애셔는 그가 기분 나쁘지 않게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와 있을 때는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이랑 있을 때는 ‘다’로만 끝내는 말투

를 살짝 고치면 좋지 않을까?”

“그럼 고칠 필요가 없군.”

“네?”

“내가 다른 사람과 있을 일이 뭐가 있지?”

“아니, 그러니까…….”

앞으로 원작 메인수인 브래든도 만나야 하고 또 메인공인 루크도 만나야 했

다. 그는 메인공과 대립하게 되는 비중 높은 서브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셔

는 설명할 길이 없었기에 입 밖으로 ‘음…….’ 하는 소리만 내었다.

“그나저나 옷이 너무 조이는 것 같다. 내 몸보다는 확실히 작군”

몸이라는 단어에 애셔가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서둘러 시선을 피하고는 땅에

떨어진 담요를 들어 그의 허리에 둘러 주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 사이즈의

옷을 몇 벌 준비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분위기를 전환하듯 애셔가 캘럽을 자리에 앉혔다. 일단 이곳에서 당분간 지내

려면 캘럽이 알아 둬야 할 것들이 있었다. 첫째는 그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절

대적으로 들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지금처럼 말을 하대하듯 하

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만날 일이 없다고 했지만

한 치 앞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애셔는 캘럽에게 두 가지 규칙을 말하고

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래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처가 아물 때까지

는 괜찮겠지만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지도 몰라.”

“무슨 일?”

“그냥,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른 안전한 곳에 있다가 내년 따

뜻한 봄날에 이곳에 다시 오는 게 어때?”

아네스트 공작은 유명한 장사치로 욕심도 많고 야망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곳에 머무르려면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자신보다는 브래든의 곁에 있는 쪽

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

르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다.”

“이건 싫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야. 나 역시 이런 모습을 한 너와 함께

있는 건 곤란하기도 하고…….”

“그래서 버리겠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야. 여기서는 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 그래.”

“끝까지 지켜 준다고 내게 손을 뻗은 건 너였다.”

그건 토끼였을 때의 일이었다. 잔뜩 겁에 먹어 경계하는 모습에 안심하라 손

을 뻗은 것뿐이었는데. 애셔는 끝까지 지지 않겠다는 듯이 구는 캘럽의 모습

에 마른 한숨이 나왔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캘럽. 여기는 안전하지 않아. 혹여라도 아버

지가 네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네게 나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내가 싫어서 버리는 게 아니다?”

“내가 왜 너를 싫어하겠어.”

그제야 캘럽은 눈가에 주었던 힘을 풀고는 피식, 맥없는 웃음을 지었다.

“딱 1년 뒤에 돌아오면 되는 건가?”

“응.”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나를 쫓아내지 않을 거고?”

그때가 되면 브래든은 분명 캘럽을 반겨 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원작의

흐름대로 인연을 만들어 갈 것이고. 그 운명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애셔는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웃어 주었다.

“……아마도?”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다. 네가 곤란해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

캘럽은 흔쾌하게 답을 하며 수긍했다.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겠다는 듯이 구

는 캘럽을 보며 애셔는 고맙다는 듯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내가 돌아오는 그날에는 지금처럼 두 번 다시 떠나라는

말은 하지 말아.”

“…….”

“배신이라는 건 한 번이면 족하거든.”

배신을 당해 본 사람처럼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어떤 이유로 그렇

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래든이 돌아오면 그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겼다. 애셔는 안심하라는 듯이 포근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

이날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캘럽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사라진 그의 빈자리를 보며 애셔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며칠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애셔는 그가 사라진 창가 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토끼의 모습으로

뛰었다고 하기에는 꽤 고층의 높이였다. 그렇다고 사람의 모습으로 뛰기에는

공작가의 경비는 삼엄했다. 어떤 모습이든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었을 것 같은

높이에 애셔는 옆에 딸린 종을 흔들었다.

“부르셨어요?”

“혹시 간밤에 누가 잡혔다거나 다쳤다는 말 없었어?”

“네.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애셔는 얼버무리듯 이야기하며 나가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잠깐 있었다고

금세 정이라도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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