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009
정신을 차리려는지 눈을 깜박이는 토끼를 보며 애셔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토끼는 경계하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둘러 구석으로 가 숨어 버렸다.
“안녕?”
그가 말을 알아듣는다는 걸 알고서 건넨 인사말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경계 가
득한 눈초리였다.
“나는 너를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네 상처가 아물 때까지 돌봐 주려
고 한 것뿐이야.”
애셔는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리며 토끼를 향해 손을 천
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다 그가 막 깨어났다는 걸 깨닫고는 물병을 들어 잔에
물을 따랐다.
“막 일어나서 목이 마를 텐데 물 한 잔 마실래?”
애셔는 들고 있던 물잔을 토끼 앞쪽으로 슥 내밀었다. 하지만 토끼는 튀어나
와 물잔을 뒷발로 걷어차고는 그대로 구석에 숨어 버렸다. 덕분에 물잔은 러
그 위로 넘어지며 물이 쏟아져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
“미안. 놀랐지? 먼저 네 의사부터 물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토끼는 자신이 물잔에 독이라도 탔을 거라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애셔는 기분 나쁘다는 기색 하나 없이 새로운 물잔을 집어 물을 따랐다. 그러
고는 천천히 물을 마시고는 토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것 봐 봐. 나도 마셨어. 그러니까 이제 안심해도 괜찮아.”
애셔는 서둘러 다른 컵에 물을 따라 다시 한번 토끼의 앞에 내밀었다. 역시나
경계 많은 토끼답게 그는 한참이 지나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저 벽장 뒤에
숨어 귀만 내민 채로 그러고 숨어 있었다.
그렇게 새벽이 되도록 경계를 하던 토끼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빼
꼼 내밀었다. 열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이 엄청나게 마른 모양이었
다. 결국 참지 못하고 토끼는 슬쩍 뛰어나와 앞발로 물컵을 잡고 물을 벌컥벌
컥 마셨다. 그 모습만 봐도 토끼가 다른 평범한 동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을 다 비워 낸 토끼가 컵을 후다닥 내려놓고는 창가 위에 놓인 화분 뒤로
숨어 버렸다. 귀는 여전히 쫑긋 세운 채로 얼굴만 감추고 있는 토끼를 보며
애셔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애셔라고 해. 너는 우리 집 앞에서 그대로 쓰러져 있었고……. 그걸 우리
형이 발견해서 데리고 왔어.”
“…….”
“어쩌다 상처를 입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큰일
났을 거라 생각해.”
애셔의 말을 할 때마다 토끼는 반응하듯 귀를 쫑긋하며 움직였다. 그 사이로
감춰지지 않는 꼬리는 몽글하니 귀여워서 애셔는 순간 웃음이 나려는 것을 억
지로 참아 내며 말을 이었다.
“너만 괜찮다면 당분간 여기에 있어도 괜찮아. 이곳에서만큼은 너를 해친다거
나 괴롭히는 사람이 없을 거거든.”
“…….”
“그러니까 약속할게. 네가 있는 동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고.
그러니까 안심하고 네가 이곳에서 편히 쉬었으면 좋겠어.”
얼굴마저 가려져 있어서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몸도 성치 않은 토끼
가 이 날씨에 나가 고생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애셔의 마
음이 통했는지 토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눈을 깜박였다.
아까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는데 토끼의 눈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
었다. 일반 토끼와 다르게 보랏빛을 띠고 있는 토끼의 눈동자에 애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예쁘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들었는지 토끼가 몸을 움찔했다. 그
모습에 애셔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두었던 쿠키를 가져와 내밀었다.
“배고프지 않아? 먹을래?”
애셔의 말에 토끼는 고민하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
여운지 수인화하면 다 큰 성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애셔는 토끼에 대한 귀여움
을 감추지 못했다. 애셔는 살짝 경계를 늦춘 토끼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쿠키
를 내밀었다.
“자, 먹어.”
우물쭈물 망설이던 토끼는 쿠키와 자신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창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조심스럽게 쿠키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코를 킁킁거
리며 앞발로 가져갔다. 배가 많이 고팠던 것인지 토끼는 앞니로 쿠키를 단숨
에 해치웠다.
“이것도 먹어.”
흐뭇함에 애셔는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집어 들고는 토끼에게 내밀었다. 하지
만 아직 경계를 풀지 않는 토끼는 앞발에 묻은 쿠키를 혀로 할짝거리며 바구
니만 바라봤다.
“괜찮아. 너 주려고 가져온 거니까.”
긍정적인 애셔의 대답에 토끼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구니에서 쿠키를 꺼내 먹
기 시작했다. 부모가 된다면 이런 마음일까. 보기만 해도 배부른 기분에 애셔
는 물잔에 물을 채워 토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쿠키를 다 비워 내고 물까지 비워 낸 토끼를 보며 애셔가 담요를 하나
가져왔다. 망설임 없이 소파로 향하며 토끼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잘 거야. 그러니까 너는 침대에서 자.”
혹시라도 자는 동안 쟌의 방문에 토끼가 놀랄까 봐서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끼는 고개를 저으며 의사를 표현했다.
“어? 지금 대답한 거야?”
애셔가 놀랐다는 듯이 큰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토끼는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시치미 떼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치료가 끝나면 꼭 보내 주겠다고 다짐했는
데, 그런 토끼의 모습에 애셔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애셔는 주방장을 통해 당근과 채소를 가져왔다. 다행히
도 토끼는 자신이 내민 채소를 곧잘 먹었다. 그렇게 깊었던 상처들도 어느 정
도 아물었다고 생각할 무렵 애셔는 방 안에서 토끼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
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은 토끼였기에 애셔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넓은 공작가
의 성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다니던 애셔는 마구간 근처에 기사들이 몰려 있는 것을 느
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어째서인지 좋지 않은 예감에 애셔는 그
들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멍청아. 똑바로 못 해? 내가 너한테 얼마를 건 줄 알아?”
“그럼 네가 해 보든가. 명중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줄 아냐?”
“아오. 답답해.”
무리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말소리에 애셔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마구간에 토끼를 가둬 놓은 채 돌을 던지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그
러고 있었는지 토끼 이마 아래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애셔는 어떻게서
든 살겠다고 도망치고 있는 토끼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오셨어요? 도련님?”
애셔의 살기 짙은 말투에도 기사는 해맑게 답했다. 마치 이 놀이에 애셔가 가
담할 거라는 듯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손에 들린 돌멩이를 내밀었다.
“놀이하고 있었어요. 누가 더 많이 명중하나.”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다는 듯이 구는 기사의 모습에 애셔는 순간적으로 분노
가 치솟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다가가 그의 뺨을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가 허공을 타고 흩어졌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뺨을 내리치는
건 처음이었지만, 지금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는 지금 상황
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얼떨떨한 얼굴로 “……도련님?”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파? 겨우 이 정도로?”
“도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너희들이 한 짓을? 아무리 말 못 하는 동물일지라도 아픈
건 똑같아. 그런데 너희는 그 동물의 공포를 즐기면서 학대했어. 나도 한번
너희들한테 그래 볼까? 그때도 웃음이 나는지?”
“……하지만 도련님. 배가 고프면 잡아먹는 게 동물입니다. 예전에도 도련님께
서는 저희가 하는 놀이가 재미있다고 같이 봐 주셨잖아요.”
억울하다는 듯이 기사는 애셔를 향해 변명을 늘어트렸다.
애셔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과거의 제 행동에 입술을 꾹 다물고는 마구간 안
으로 들어가 토끼에게 다가갔다.
애셔의 등장에도 토끼는 여전히 예민한 기색으로 구석으로 가 털을 세웠다.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보이는 토끼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은 것처럼 공허해 보
였다. 이제야 겨우 토끼에게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애셔는 울컥 치솟는
눈물을 억누르며 토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안해.”
“…….”
“지켜 준다고 해 놓고 못 지켜 줘서, 정말……, 미안해.”
결국 애셔의 눈가 아래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에 토끼가 잠시 움찔하더
니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놀란 애셔가 서둘러 토끼를 품 안에 안아 들었다.
혹시라도 생명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귀를 가져가 대자, 새근거리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제야 애셔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토끼와 함께 마구간에서
나와 기사들을 바라봤다.
“돌아가서 처벌을 기다리도록 해.”
얼음장처럼 시리도록 차가운 말과 함께 애셔는 기사들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
낮에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엠버와 샤키가 애셔의 방에 다녀갔다. 애셔는 기
사들의 처분을 꼭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토끼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새
벽쯤 되었을까. 조금씩 정신이 드는지 토끼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떠 올렸다.
초점이 없는 듯한 옅은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나더니 애셔를 향해 고개
를 돌렸다.
“……정신이 들어? 괜찮아?”
애셔의 물음에도 토끼는 예전처럼 도망가지 않았다. 그저 애셔의 얼굴을 멀뚱
히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떠 올렸다.
“미안해. 내가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지켜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애셔는 그때의 일이 다시 생각났는지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토끼의
앞에서 울 수는 없어서 눈물을 억지로 삼켜 냈다. 하지만 토끼는 마치 자신을
위로해 주기라도 하듯 애셔의 팔을 톡 두드렸다.
“……토끼야?”
애셔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토끼를 품 안에 안아 들었다. 그냥 지금은 그러
고 싶어서,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장시간 토끼를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