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8화 (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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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전하.”

생각해 보니 루크는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타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했다. 그랬기에 애셔는 자신

이 그 시간을 빼앗아서 루크의 기분이 저조해졌다고 생각했다.

“막 사냥에 돌아와 힘드셨을 텐데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 말을 하면서도 애셔는 그가 다친 곳이 없나 눈으로 스캔했다. 다행히도 그

는 다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애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나직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애셔의 걸음도 우뚝 멈춰 섰다.

“황태자 전하와 있었습니까?”

“네?”

“분명 자리를 안내해 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입니다.”

“아, 그러려고 했는데 답답해서 그만…….”

애셔의 말에 루크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유조차

모른 채 애셔는 두 눈만 깜박였다.

“그래서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그런 짙

은 페로몬을 묻히고 다니는지 궁금하네요.”

딱딱함이 묻어나는 루크의 말에 애셔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왜 그렇게 말을 해요……. 좀 더 부드럽게 물어봐 주면 안 되는 거예요?”

“…….”

“그냥 바람 쐬러 나갔어요. 갔는데 그때 전하가 따라오셨어요…….”

그의 앞에만 서면 왜인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애셔에게 다가왔다.

“제게 그러셨잖습니까. 제가 아닌 황태자 전하를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제, 제가요?”

도대체 빙의 전 애셔는 무슨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마도 빙의 전 애

셔는 그가 본인을 좋아하지 않는단 사실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조차 없어서 애셔는 억

울하다는 얼굴로 빈 주먹만 움켜쥐었다.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이 이렇게도

바뀔 수도 있는 건지.”

“…….”

“그게 아니면 저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건지.”

루크는 생각이 많아진 눈으로 애셔를 바라봤다. 미안함에 애셔가 시선을 피하

듯 눈을 내리깔자 그가 차고 있는 검 손잡이에 손수건이 묶인 것이 보였다.

“……어? 제가 준 손수건이네요?”

“…….”

“엉성해서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

“기뻐요. 아주 많이…….”

그가 손수건을 착용해 줬다는 사실만으로 애셔의 얼굴 위로 작은 화색이 감돌

았다. 마치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해맑게 웃는 애셔의 미소에 루크의 눈동자

가 거칠게 흔들렸다.

“전하. 아까는 말씀 못 드렸지만……. 기억을 잃기 전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시

면 안 될까요? 물론 한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

니지만, 저는 황태자 전하께 마음이 없어요. 그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예요.”

“…….”

“그러니까…….”

“잠깐 이리 와요.”

“네?”

뭐라 말을 하려는 애셔의 손목을 루크가 잡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뜻하지 않

는 접촉에 흘러 들어온 그의 감정은 혼란스러움과 함께 짜증이라는 감정이었

다. 애셔는 실망감에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잡았던 손을 슬쩍 밀어냈다.

“왜 밀어내십니까?”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다는 건 애셔에게 그리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

도 지금처럼 원치 않게 감정을 읽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냥……. 누군가와 접촉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편인 것 같네요. 얼굴 위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것

보면.”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얼굴 위에 드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애셔는 부끄러움

이 밀려왔다. 서둘러 두 뺨 위로 손을 올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제 사람이 다른 이의 향을 묻히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하.”

“앞으로는 저와 함께 있으실 거라면 주의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알파에게

다른 이의 페로몬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마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의 페로몬은 맡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애셔의 귓가

에 그리 들려왔다.

이렇게 제멋대로 오해하면 안 되는데. 애셔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

다. 그러다 느껴지는 시원하고 기분 좋은 향에 애셔가 고개를 들어 루크를 응

시했다.

“밖에는 보는 이들의 눈이 많습니다. 이대로 계속 묻히고 다닐 수도 없고.”

“…….”

“그래서 살짝만 덮었습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애셔는 그간 페로몬이라는 게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

음 접한 페로몬조차도 황태자가 위협적으로 뿜어낸 페로몬이었으니까. 하지만

루크의 페로몬은 달랐다. 상대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 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박하 향이네요…….”

“…….”

“전하는 무슨 향인지 궁금했는데……. 정말 좋네요.”

전하의 페로몬…….

애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아쉬운 마음에 애셔

는 눈매를 누그러트리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

봄이 끝나 가려는 무렵, 하늘에서는 보슬보슬한 비가 내렸다. 식물들이 기분

좋게 물놀이하는 그런 날. 샤키는 무언가를 품 안에 안고서 애셔의 방을 방문

했다.

의아함에 애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샤키는 품에 있던 동물을 애셔의 품 안으

로 옮겨 주었다.

“……토끼?”

“집 앞에서 쓰러져 있더라고. 다 죽어 가는 것 같아 버리고 올까 하다 네 생

각이 나서 데려왔어.”

샤키의 말에 애셔는 품 안에 있는 토끼를 내려다봤다. 누군가와 싸웠는지 토

끼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열이 들끓는지 입에서 색색 소리를 냈다. 누가

봐도 위급해 보이는 상황에 애셔가 서둘러 시종을 부르려 했다.

“쟌!”

“그럴 필요 없어. 이미 해열제를 먹였으니까.”

“……하지만 뜨겁잖아. 이대로 두면 정말 위험할지도 몰라!”

애셔는 서둘러 쟌에게 물수건과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러고는 침대

에 있는 이불을 접어 그 위에 토끼를 내려놨다.

“어떻게…….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하겠어.”

열이 더 오르려는지 떨고 있는 토끼의 모습에 애셔는 울컥함이 밀려왔다. 서

둘러 이불을 덮어 주고는 쟌이 가져온 수건으로 토끼를 닦아 주었다.

하지만 토끼는 생각보다 상처가 매우 깊은 것 같았다. 양동이에 채워진 물 색

깔이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애셔는 토

끼의 얼굴을 닦아 주다 귀 옆에 새겨진 표식을 발견했다.

‘……엑스?’

설마 하는 생각에 애셔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그 문양은

엑스로 새겨진 문양이었다.

어째서 이 토끼가 왜……?

애셔는 의구심과 함께 기억을 더듬어 봤다.

사실 이 토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국에 얼마 남지 않은 수인이었다. 그만큼

희귀해서 자칫하면 노예로 끌려가거나 경매장으로 많이들 팔려 갔고 그 과정

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제는 보기 드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타이밍에 토끼가 집 앞에 쓰러져 있는 걸까? 원래대로라면

토끼는 정확히 브래든이 이 집에 발을 들인 후에 나타나야 했다. 그것도 브래

든이 직접 발견해서 가진 능력으로 치유하고는 살뜰히 보살펴야 했다.

덕분에 이 토끼는 브래든을 따르며 나중에는 루크와 대립하는 서브공이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캘럽. 신을 숭배하는 자를 뜻하

는 이름을 가진 만큼 그는 신력을 가진 이였다. 반대로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증오로 인해 어둠을 품고 있는 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블레이드라는 제국의 이름처럼 빛과 어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

는 유일한 이였다. 덕분에 그는 몸 안에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스

물다섯 살 때 어떤 식으로 각인을 하냐에 따라서 선과 악이 결정될 터였다.

하지만 애셔는 의문이 들었다.

왜 캘럽은 원작과 달리 지금 이 시점에서 등장하게 된 걸까? 그것도 샤키의

품에 안겨 나타난 캘럽을 보며 애셔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토끼 하나 가지고.”

“응?”

“솔직히 좀 놀랍긴 하다. 네가 심심할까 봐 데려왔긴 했는데. 이렇게 지극정

성으로 돌볼 줄 몰랐거든.”

“…….”

“그래서 다 컸네 싶어. 예전의 넌 괴롭히기 바빴잖아?”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이렇게 작고 어린 동물을 괴롭힐 수가 있는 건지. 처

음으로 자신이 이 몸에 빙의했다는 걸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과거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이제는 안 그럴 거야. 그러니까 형도

잊어 주라.”

아마도 평생 자신이 하지 않은 일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그렇

다 해서 계속 그런 이미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진짜가 돌아와서 쫓

겨나는 거라면 있는 동안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지내고 싶었다. 훗날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애셔는 숨소리가 점차 잦아든 토끼를 내려다봤다.

“다행이다. 약 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하나 봐.”

“그러게. 네 정성이 토끼한테도 닿았나 보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애셔의 머리를 샤키가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 보인 제 행

동에 대해 잘했다는 듯이 그는 뿌듯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나도 네가 아팠을 때 이런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아프지 마라. 다치

지도 말고.”

샤키의 걱정스러운 말에 애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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