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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나팔 소리와 함께 대회에 출전하는 이들이 말을 타고 하나둘 중앙에 모였다.
그 속에 보이는 루크의 모습에 애셔는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대회를 시작하겠다.”
황태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기를 알리는 총소리가 났다. 그들은 기다렸
다는 듯이 서쪽 숲 쪽으로 빠르게 달리며 모습을 감췄다. 부디 그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길 애셔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깍지 끼며 기도했다.
“자, 그럼 기다리는 동안 체스나 한판 둘까요?”
“전하. 체스는 저와 한판 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록시나의 말에 샤키는 부담스러워하는 애셔를 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물 흐
르는 듯이 자연스럽게 끼어든 샤키의 모습에 록시나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다
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대신 게임은 게임이니까, 작은 내기라도 하는 건 어떤가요?”
“내기라면 무엇을 말이십니까?”
“제가 이기면 아네스트 상단을 견학시켜 주세요. 반대로 제가 지면 영식이 원
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습니다. 물론, 곤란하지 않은 선에서요.”
록시나는 자신감이 가득 찬 얼굴로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괜찮겠습니까? 체스라면 저도 잘하는 편에 속해서 말입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지 않겠어요?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샤키의 도발에 록시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맞받아치며 시녀에게 눈짓을 보
냈다. 시녀는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체스판을 펼치고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암묵적인 경기가 시작되고 애셔는 조용히 지켜보다 자리에
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지?”
그러자 애셔가 일어나길 기다린 사람처럼 네르퍼가 뒤따라 붙으며 말을 걸었
다. 생각지도 못한 네르퍼의 등장에 애셔가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사냥이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닙니다.”
“그럼?”
“그냥……, 잠시 답답하여 바람이나 쐬고자 하여 나왔습니다.”
자신이 어딜 가는지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애셔는 그와 함께 있는 게
불편했다. 자꾸만 자리를 피하고 싶은데 그는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나도 같이 따라가지. 마침 나도 답답하던 찰나였거든.”
“…….”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말과 다르게 애셔의 얼굴 위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에 네르퍼
가 헛웃음을 지으며 앞장서듯 주변을 거닐었다.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었다 들었다.”
“……네.”
“확실히 그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 성격이 확연하게 바뀐 걸 보면 말이야.”
네르퍼의 말에 애셔는 멋쩍게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멈추는 그의
걸음에 애셔의 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나는 건방진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말이 많은 놈들도 싫어하지.”
“…….”
“그러니 지금처럼 조용하게 나대지 말고 묵묵히 사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내가 루크를 싫어한다 한들, 그래도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동생이니까 말이야.”
한순간에 그가 페로몬을 방출했다. 경고의 의미로 방출된 페로몬에 공포를 마
주하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달달 떨려 왔다.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지금 이 감각은 잊지 말아야 할 거야. 지금 나는 제대
로 된 페로몬도 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처음 받는 알파의 페로몬에 애셔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
군가가 폐부를 짓누르듯이 숨이 턱턱 막혀 왔고 그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
을 만큼 현기증이 일었다. 애셔는 그가 주는 경고에 안색을 파리하게 물들이
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열성이라더니 고작 이 정도로 벌벌 떠는 꼴이라고는……. 쯧. 그러면서 지금까
지 어떻게 망나니짓을 했는지 모르겠군.”
“흐…….”
“나라면 공작가의 아들이고 뭐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야.”
계속해서 가해진 고통에 애셔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하필
이런 역에 빙의해서 이런 꼴을 당하나 싶었지만, 덕분에 이어진 루크와의 인
연을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그럴게요……. 흐,”
애셔는 신음을 억지로 눌러 가며 답했다. 그제야 네르퍼는 원하는 답을 들었
다는 듯이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나는 너희 가문을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나는 너희 가문이 언제고 등을 돌릴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너희
가문이 루크와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지.”
“…….”
“그러니 그때까지 조용히 살도록 해. 애셔 아네스트.”
네르퍼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애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동시에 흘러 들어온 네르퍼의 감정에 애셔는 그대로 몸을 휘청였다.
많은 감정 속에서 유난히도 강하게 느껴지는 살기. 그는 미워하는 것 이상으
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다. 그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애셔는 조금씩 멀어
져 가는 네르퍼를 보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허……, 헉.”
거친 숨을 토해 내기 무섭게 멀리서 대기하던 톰스가 뛰어왔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도련님?”
톰스는 베타였다. 당연히 네르퍼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고 애셔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애셔는 괜찮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어 주고
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도련님.”
“긴장했더니 다리가 풀렸나 봐.”
물론 그게 아니었지만, 애셔는 잠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깊게 들
이마셨다.
왜인지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잘 버티고 있었
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애셔는 잠시 바람에 위로받듯 그
대로 있었다.
“애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다듬고 있던 애셔는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를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은은하게 맡아지는 로즈 향에 그 사람이 샤
키라는 것을 깨달았다.
“……형.”
표정을 가다듬으며 애셔가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가에는 무해함을 담
으며 헤-, 하고 웃자 샤키의 눈빛이 짙게 일렁였다.
“……왜 그러고 있어.”
“그냥. 날씨가 좋은데 다른 곳은 사람들이 많고……. 조용한 곳에 있고 싶고…….
그랬는데, 형은? 체스 두고 있었잖아.”
“어. 그랬지.”
“그런데?”
“네가 없어진 거 알고 잠시 양해 구했어. 말했잖아. 여긴 알파들이 가득해서
위험하다고.”
누군가가 저를 찾아와 걱정해 준다는 것. 그게 너무 위로되어서 애셔는 바보
처럼 웃어 버렸다.
“웃긴 뭘 웃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
“형이 이렇게 든든하게 있어 주는데, 누가 나를 건들겠어.”
“말은 잘하지, 아주.”
샤키는 밝아진 애셔의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다리 풀린 것 같은데. 업어 줄까?”
“아냐, 괜찮아.”
“그럼 손이라도 잡아.”
샤키가 내민 손을 버팀목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샤키가 애셔의 손
을 꽉 잡으며 물었다.
“누구야. 이 불쾌한 페로몬은.”
“……응?”
“누구냐고. 너한테 이런 감정을 쏟아부은 게.”
애셔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대상이 황태자 전하라고 말을 했다가는 그
가 당장이라도 쫓아갈 것 같았다.
“모, 모르겠는데?”
“말 더듬지 말고.”
“진짜야……. 내가 열성이라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자꾸만 시치미를 떼는 애셔를 보며 샤키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자신의 머
리를 쓸어 넘기고는 애셔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네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더는 묻지 않겠다만, 대신 잊지는 마라. 너는 아
네스트가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
“그러니까 앞으로는 당하지 말고 반격하도록 해. 널 지켜 주지 못할 만큼 약
한 가문이 아니니까.”
“응. 그럴게, 형.”
애셔는 화답하듯 환하게 웃어 주었다.
*
자리로 돌아온 애셔는 샤키와 록시나가 두는 체스를 지켜봤다. 그러다 제일
먼저 사냥을 끝낸 루크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하…….”
그의 손에는 거대한 몬스터의 목이 들려 있었다. 진득한 녹색 피를 뒤집어쓴
채로 서 있는 루크를 보며 록시나가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런 아쉽게도 이번 승리는 내가 되었네? 안 그래, 네르퍼?”
도발하는 록시나의 말에도 네르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루크를 한번 바라보고는 덤덤하게 답했다.
“……제국의 대공이 이 정도도 못 하면 관둬야지.”
“그래? 그런 거치곤, 표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어쨌든 내기는 내기니까
잘 부탁할게.”
록시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네르퍼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뒤에서 들려오는 샤키의 음성에 주위의 분위기가 눅진하게 가라앉았다.
“체크메이트.”
“…….”
“아쉽게도 이번 내기는 제가 이긴 것 같네요. 황녀 전하.”
방심한 틈을 타 외친 샤키의 말에 록시나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소리 내 웃으며 들고 있던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방심했네요. 게임은 단 한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되는 건데.”
아쉽다는 듯이 록시나가 눈매를 갸름하게 뜨며 시선을 흘렸다. 하지만 곧 부
채를 거두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내기는 내기니까요. 소원이 생기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와도 좋습
니다. 단, 그때는 다시 한번 체스를 뒀으면 좋겠네요. 주위가 어수선하지 않
은 조용한 곳에서 말이죠.”
“좋습니다.”
“그때는 각오 단단히 하고 와야 할 거예요. 지금처럼 방심하는 일 없을 테니까.”
록시나는 반드시 아네스트의 견학권을 따고야 말겠다는 듯이 매섭게 눈빛을
빛냈다. 애셔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다 루크가 사라진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는 루크가 보였다. 막 사냥에 갔다 와서
그런지 루크의 표정이 아까와 달리 딱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