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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셔. 아버지 말씀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네가 걱정돼서 그러시는 걸 거야.”
“미안해, 형들. 괜히 나 때문에 식사를 망치게 해서.”
“이게 왜 네 탓이야. 다 그놈 탓이지. 감히 우리 내 동생에게 이따위로 대접해?”
다시 생각해 봐도 열 받는다는 듯이 샤키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강하
게 쥐었는지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튀어나왔다.
“안 되겠다. 내가 그놈을 당장 만나러 가야지!”
“시끄러우니까 앉아.”
성난 황소처럼 흥분하는 샤키를 보며 엠버가 포크를 강하게 내려놨다. 덕분에
엠버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도 이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라 생각한다. 적어도 네게 이렇게 대
접한다는 건 우리 가문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거든.”
“아니 그건 내가 설명했다시피……,”
“샤키. 너는 대공가에 서신을 넣어. 내일 당장 만나러 가겠다고.”
엠버는 뭐라 변명하려는 애셔의 말을 고스란히 자르며 샤키에게 말했다. 샤키
는 이제야 마음이 통했다는 듯이 웃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너 때문이 아니니까 쓸데없이 의미 부여하지 마. 나는 아네스트가의 장남으
로서 할 도리를 하려는 것뿐이니까.”
애셔가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엠버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단순히 루크를 배려해서 연락을 기다린 것뿐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커진 상황
에 애셔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
엠버와 샤키는 동이 뜨기 무섭게 블레이크 대공가로 출발했다. 애셔가 뒤늦게
깨닫고는 서둘러 출발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전하.”
“형들을 보냈더군요. 어찌나 우애가 깊던지 눈물 없이는 못 보겠더군요.”
“죄송해요. 형들이 뭐라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오해가 있었어요.
제가 다 해명할 테니까…….”
들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건조한 루크의 시선
에 애셔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하죠. 그렇게 계속 서서 이목 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
입니다.”
애셔는 그제야 자신이 현관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밀려오는 부
끄러움에 애셔는 귓불을 붉히고는 그가 걷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
다 우뚝 멈추는 발길에 애셔는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셔.”
“네, 네?”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얼굴로 다정하게 부르는 루크의 행동에 애셔의 눈
이 동그랗게 커졌다.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 대며 정신없이 요동치기 시
작했다.
“그렇게 땅만 보고 걸으면 시종들이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안 그
래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루크가 그에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렇게 가까워도 되나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살짝 이해가 안 되려고 하는데. 지금 이 표정은 내가 어떻게 오해를 해야 하
는 겁니까?”
루크의 말에도 애셔는 바보처럼 순수하게 눈만 깜박였다. 볼에는 여전히 옅은
열기를 담고서 멍하니 있는 모습에 루크의 입술이 비스듬히 휘어졌다.
“차라리 전처럼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어때요? 이런 식으로 사람 곤란하게 하
는 거 기분이 별로거든요.”
애셔는 루크의 말에 심장이 발밑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뭘 해도 그에
게는 예쁨을 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접견실로
향했다.
대공가의 접견실 내부는 눈이 아플 만큼 화려했다. 아무리 루크가 황제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고는 해도 대공가는 대공가였다.
“일단 서로 다시 규칙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 돌아가면서 하나
씩 말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둘이 있을 때는 칭호를 사용하되, 남들이 있을 때
는 그 단어를 생략했으면 좋겠습니다. 뒤에서 말이 나오는 건 질색이라서 말
입니다.”
“네……, 그럴게요.”
루크의 말에 애셔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왜
이렇게 서운한지 애셔는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놓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저는 전하와 주기적으로 만나 뵐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집에서
만 말고 야외에서 바람도 쐬고 차를 한잔 마시며……. 그렇게 헤어졌으면 좋겠
어요.”
딱 한 가지만 말을 하라고 했지만, 애셔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이것 말고는 더 바랄 게 없다는 듯이 루크의 눈을 슬쩍 올려다보고는
헤살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신이라는 사람.”
그저 민망해서 웃어 보인 미소에 루크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 상황이 답
답한 사람처럼 한숨도 같이 내쉬었지만, 그게 무척이나 싫은 사람처럼 보이지
는 않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애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전하 차례예요…….”
애셔의 말에도 루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셔의 속을 가늠하
려는 듯이 지그시 바라봤다가 어딘가 지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서로 주기에 대해서 말을 해 볼
까요?”
“가, 갑자기 그건 왜요?”
“미연에 방지하고자 입니다. 적어도 원치 않는 임신이라든지 관계는 서로 피
해야지 않겠습니까?”
루크의 말에 애셔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원치 않는
임신과 연인 간의 관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두 개의 연결고리가 애셔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대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열을 올리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
애셔의 모습에 루크의 입에서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억이 아
무리 사라졌다지만 이건 뭐,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바뀌어 버린
모습에 루크는 혼란스러웠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대범하다 못해 자신을 유혹하려 들더니, 이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수한 얼굴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보시다시피 우성은 두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열성은 다
르다 들었습니다.”
“그, 그러니까 저는……. 일정하지 않게 불규칙으로 터져서…….”
무엇보다도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기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걸 다른 이에게 물을 수도 없었기에 애셔는 뭐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성 알파나 우성 오메가의 경우 두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러트와 히트가 찾
아오지만, 열성 같은 경우에는 주기가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몇 달이 될 수도
있었다. 보통 이곳에서는 서로 연인 간의 주기를 파악해 성의 자유를 즐겼지
만, 루크의 같은 경우에는 서로 피하자는 의도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까 즉, 서로 선을 넘지 말자는 소리였다.
어차피 진짜가 돌아오게 되면 쫓겨날 몸, 애셔는 그저 그가 정말 행복해서 웃
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정말 더도 말고 원작처럼 자신을 통해 상처
만 받지를 말기를 바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하가
생각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안심하라는 듯이 애셔가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뒤에 비치는 햇살보다
더 포근한 눈빛으로 미소 짓자 루크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형들 일은 정말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다음 주에 사냥 대회가 있습니다. 그곳에 당신을 초대하려 하는데 시간이 괜
찮다면…….”
“저는 좋아요! 남는 게 시간이거든요.”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애셔는 서둘러 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아
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너무 기뻐서 그만.”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간 본심에 애셔는 다시 한번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단
순히 그의 제안이 좋아서 그랬을 뿐인데 먼저 설레발을 친 것 같아서 부끄러
움이 밀려왔다.
“괜찮습니다. 시간과 날짜는 서신을 통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그쪽한
테도 더 좋을 것 같으니까요.”
“네…….”
“그럼 이제 할 얘기는 끝난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루크의 말에 애셔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시무
룩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 기다릴게요.”
여전히 루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애셔의 눈빛에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
다. 단지 동요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루크와 다음 약속을 잡은 애셔는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남들에게는 별것이
아닌 것으로 보여도 그가 처음으로 초대해 준 뜻깊은 날이었다,
‘뭔가 해 주고 싶은데…….’
어떤 걸 해 주면 기분이 좋을지 고민하던 애셔는 사냥 대회 때 손수건을 선물
하면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내용을 읽은 걸 떠올렸다. 비록 바느질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루크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도전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쟌. 광장에 나갈 건데 준비 좀 해 줘.”
“네, 도련님.”
의욕에 가득 찬 애셔의 말에 쟌은 서둘러 밖에 나가 마차를 대기하고는 겉옷
과 함께 톰스를 데려왔다.
톰스 에어올스. 애셔가 기억을 잃고 나서 붙여진 호위 기사였다.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광장에 있는 셀레나 의상실에 갈 거야. 거기서 손수건과 실을 사 올 예정이
거든.”
“모시겠습니다.”
애셔의 안전을 위해 미리 행선지를 물어본 톰스의 입가에 사선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그의 말로는 어릴 적 동생을 지키려다가 도적에 의해 생긴 상처라고
했었다. 덕분에 검사의 길로 들어서며 그는 이렇게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며
신변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