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2화 (2/95)

2

*#.002*

애셔가 빙의했을 때는 파릇한 새싹이 돋는 따뜻한 봄이었다. 겨울잠을 자던

모든 생명체가 잠에서 깨어나듯 애셔는 평소처럼 잠을 자고 일어났다. 하지만

다른 이의 몸에 빙의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대로 기절해야 했다.

원작 속 애셔는 아네스트 공작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사랑을

받고 자랐다. 원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가져야 성에 찼고, 사용인들을 괴롭히

며 갑질을 일삼고는 했었다. 덕분에 세간에서는 그런 애셔를 공작가의 망나니

라 불러 대며 암암리에 손가락질해 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창가에 기대 책을 읽던 애셔가 누군가에 의해 아래로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워낙 악행을 일삼던 애셔였기에 그 범인을 잡지

못했지만, 그로 인해 그는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러다 마침 자신이 애셔의 몸에 빙의했고 공작은 한순간에 바뀐 자신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그는 신전에서 용하다는 신관을 불러들여 애셔의

몸을 진찰하게 했다.

“정말 괜찮은 것이 맞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이 이리도 변할 수 있단 말이오.”

침실에 누워 있는 애셔를 보며 아네스트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아무래도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기억 상실 같습니다.”

“일시적인 기억 상실이라니? 그렇다고 해도 어찌 사람의 성격이 이리 바뀔 수

있단 말이오?!”

참지 못한 공작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냈다. 미약하지만 조금씩 압박해 오

는 공기에 신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죄, 죄송합니다.”

특정하게 어디가 아프다거나 다친 게 아니었기에 현재로서는 신관이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공작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실망감이 서린 얼굴로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약은 따로 처방해 두었으니, 당분간은 잘 챙겨 드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애셔의 말에 신관은 지친 낯빛으로 씁쓸히 웃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첫째 엠버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야.”

엠버의 부름에 애셔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평소라면 ‘왜.’라고 불퉁댈 애셔

였지만 전과 다른 반응에 엠버의 미간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 맞냐? 아니면 연기하는 거냐?”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요?”

엠버의 물음에 애셔가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무해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샤키가 침대에 앉아 있는 애셔 곁으로 다가갔다.

“일주일간 깨어나지 못했던 거 잊었어? 연기하라 해도 못 하겠다.”

샤키 아네스트. 애셔의 둘째 형이자 애셔를 누구보다 아껴 주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애셔가 아네스트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는 그를 매몰

차게 밀어내며 엠버와 손잡고 애셔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인물이었다.

“말이 되지 않잖아?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의 성격이 한순간에 바껴?”

“형.”

“보나 마나 연기겠지. 또 이번에는 무슨 장난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 연기든 뭐든 귀여운 막내가 하는 건데, 그냥 예쁘

게 봐 줄 수는 없는 거야?”

날카롭게 반응하는 엠버의 말에 샤키가 말을 받아쳤다. 샤키의 행동을 보니

평소에도 엠버와 갈등이 생기면 언제든지 애셔의 편에 서서 보호해 주려 한

것 같았다.

“너. 언제까지 막내, 막내. 이럴 거냐?”

“글쎄? 늙어 죽을 때까지?”

“…….”

샤키의 농담 서린 말투에 엠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샤키는 아

랑곳하지 않으며 애셔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예쁘게도 웃었다.

“어쩜 우리 막내는 이렇게 예쁠까? 아팠어도 귀여운 볼살은 그대로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애셔는 당황스러웠다. 민망함에 볼을 살짝 붉히

자 그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미약하게 굳어졌다.

“뭐야? 정말 기억을 잃은 거야? 예전에는 ‘더 해 줘, 형!’ 이랬잖아?”

“…….”

‘더 해 줘, 형’이라니. 듣고만 있어도 오그라드는 말투에 애셔가 어설피 웃었다.

“죄송해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애셔의 존칭에 샤키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지며 작은 균열이 지어졌다.

“……들었어? 존댓말 하는 거?”

“…….”

“세상에. 나한테 죄송하대. 우리 애셔가…….”

샤키는 뒤바뀌어 버린 애셔의 성격에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딘가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만 달싹거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괜찮아. 형은 다 이해할 수 있어. 우리 애셔가 그런 거라면 말이야.”

“…….”

“말이라는 건 지금부터 놓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애셔, 말을 놓

도록 해. 나는 네가 다시 눈을 떠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거든.”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다 포용하겠다는 듯이 애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

다. 엠버는 그런 샤키의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는 눈썹을 까

닥였다.

“네가 정말 기억에 잃은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처럼 계속 얌전히 지내

주길 바라. 이참에 딴 새끼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지내는 것도 좋고.”

제발 전처럼 사고만 치지 말라는 듯이 엠버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형. 그냥 철이 들었다고 생각해. 물론 활발했던 막내가 더 좋긴 했지만.”

원작에서 애셔는 일찍 여윈 어머니로 인해 유독 샤키에게 스킨십을 자주 했었

다. 샤키 역시 그런 애셔를 싫어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종종 우애 깊은 형제

처럼 지내고는 했었다.

“피곤할 텐데 좀 더 쉬도록 해.”

샤키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며 엠버에게 눈치를 보냈다. 엠버는 짙은 한숨

과 함께 미간을 누르며 싸늘한 경고를 남겼다.

“나는 네가 변하든 상관없는데. 예전처럼 집안 망신만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

“스무 살이 되었으면 적어도 얌전히 지내라는 소리야. 여러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그럴게요.”

“그리고 존댓말도 사용하지 마. 쓸데없이 존칭하는 거 생각보다 거북하거든.”

그는 자신의 말이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애셔를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애셔는 조용히 빠져

나가는 엠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에 느껴지는 작은 손길에 시선을 돌렸다.

“형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네가 걱정돼서 괜히 저러는 거니까.”

“응. 그럴게…….”

“그러니까 막내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앞으로도 지금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나머지는 형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가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그는 애셔에게 다정한 형이었

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브래든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당하는 말이었기에 애

셔는 절대로 깊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에 깨어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부터 애셔는 점차 이곳 생활

에 적응해 갔다. 그렇게 틈틈이 책을 읽으며 이곳 문화와 생활을 배워 갈 무

렵, 블레이크 대공이 공작가를 방문한다는 서신을 받았다.

루크 네이슨 블레이크.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메인공이었다.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사정이 있는

것처럼 그 역시 황실의 사생아였다. 자라는 동안 위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괴

롭힘을 당했고 황제는 자신과 많이도 닮은 그를 싫어하며 눈엣가시처럼 여겼

다. 덕분에 그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철이 들어 버린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네스트가가 운영하는 상단이 점차 커지게 되었고 황제는 밖으

로까지 유통이 되는 공작가의 상단을 욕심내기 시작했다. 그 힘을 가질 방법

은 오로지 딱 하나. 루크를 북쪽 변방의 대공 자리에 앉히며 아네스트 공작가

와 사돈을 맺게 하는 방법이었다.

루크는 황제의 명을 받아 대공의 직위를 갖게 되고 애셔와의 만남을 2주에 한

번씩 가졌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만났을 때쯤 애셔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

는 루크에게 신체적인 접촉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상대와 신체 접촉을 하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교감

능력이 있었다. 대신 그걸 상대가 인지한 순간 그 능력은 발현되지 않아 상대

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읽어 낸 루크의 감정에 애셔는 애증으로 마음이 변하며 그를 증

오하기 시작했다. 애셔가 루크에게서 읽어 낸 감정은 불쾌감이었으니까. 결국

애셔는 아네스트 가문의 기세를 등에 업고서 선을 넘고 말았다.

‘사생아 주제에 감히……!’

아무리 힘 있고 잘나가는 공작가라 한들, 루크는 황제의 피가 흐르는 대공이

었다. 하지만 루크는 그런 말들이 익숙하다는 듯이 애셔의 말을 가볍게 무시

하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걸 알게 된 건 자신이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애셔는 서랍 속에

서 빙의 전 애셔가 쓴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는 루크에게 말실수를 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편지를 남겼지만, 그 편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해지지 못

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말을 하고 난 다음인 건데.”

차라리 그 말을 하기 전에 빙의했다면 좀 좋았을까. 애셔는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