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는 이만 퇴장합니다-1화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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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프롤로그.

햇살이 유난히도 반짝이던 4월. 애셔는 약속 장소에 앉아 창 아래를 내려다봤

다. 이곳에 빙의한 지도 어느덧 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속에서 애

셔는 원작 속 진짜 주인공인 브래든 아네스트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하아…….”

소소하게 덕질을 하고 장르 상관없이 글을 쓰던 어느 날. 한 작가로부터 연락

을 받게 된다. 연재하고 있는 글이 잘 풀리지 않으니 상담 좀 해 달라는 내용

이었다. 직업상 잠깐 읽고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다른 세상이 자신을

반겼다.

아네스트가의 장미꽃. 잠들기 전 읽었던 소설 이름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인 메인공과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비록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버지를 기억할 수 없을지라도…….

애셔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이야, 미안해……. 너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자신은 물론이고 배 속의 아이까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와 연결된 딱 하나. 애셔는 이것만큼은 절대 지키겠다며 눈빛을

매섭게 빛냈다.

딸랑이는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문 사이로 남자가 들어왔다. 황실의 고유 혈

통임을 증명하는 은발과 붉은 눈동자. 우성 알파의 피가 흐르고 있는 남자는

루크 네이슨 블레이크 대공이었다.

“업무가 길어져서 늦어졌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애셔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될 모습이 그

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길 바라며 애셔는 말없이 찻잔을 움켜쥐었다.

“사실은 전하께 할 말이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눈을 마주하고 있기에는 갈무리 못 한 제 감정을 들킬 것 같아서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을 떠올리며 찻잔을 내려다봤다.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말하기 힘든 거라면 좀 더

있다가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크 블레이크. 대공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제게 존댓말을 사

용했다. 상대를 위해 배려해 주겠다는 루크만의 법칙이었다.

“사실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전하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많이 웃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거든요.”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전하와의 관계를 끝내려고요. 애초에 저는 전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이었으니까요.”

자신은 열성 오메가였다. 진짜로 나타날 브래든은 우성 오메가였고 공작은 어

떻게서든 브래든과 대공의 만남을 추진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했던 시

간을 생각하면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말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애셔 아네스트.”

풀 네임과 함께 주위의 공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지금 계절이 겨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얼어붙은 공기에 애셔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와 어울리고 말고는 내가 정

해. 다른 이가 아니고.”

무거운 압박이 쏟아지기 무섭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채 그는 자신의 뒤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그러니까 어쭙잖게 헤어지자는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도록 해.”

“…….”

“내가 미쳐 돌아 버리는 게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서늘할 만큼 오싹한 목소리로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한 번도 말을 놓은 적

없을 만큼, 매일 신사적인 모습으로 대했던 모습과 달리 지금 그의 모습은 침

대 위에서 보았던 한 마리의 짐승과 닮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애셔는

눈앞이 점멸되는 것을 느꼈다.

“……전하.”

“그러게, 기회를 줄 때 진작에 도망갔어야지.”

“…….”

“이제 와 나를 떠나겠다 하면 내가 그래요, 라고 할 줄 알았어?”

그가 하얗게 뻗은 애셔의 목덜미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아주 천천히,

느린 템포로 애셔의 어깨를 슬며시 감싸 쥐었다.

“애셔…….”

“흐……. ”

어깨를 타고 그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가 지금 얼마나 자신을 원하고 있

는지, 또 얼마나 갈망하는지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지만, 애셔는 매몰차게

감정을 억누르며 입술을 뗐다.

“전하가 아무리 이러셔도……, 저는 헤어질 거예요.”

운명이라는 건 자고로 언제나 그래 왔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 강하게 얽혀 왔

고 자신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런 가혹한 운명에서 애셔는 자신의 아이만큼

은 지키겠다고 눈빛을 빛냈지만 그는 어깨를 쥔 손에 살짝 악력을 가하며 의

연하게 답했다.

“괜찮겠어? 나도 내가 어떻게 미칠지 모르는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는 그의 말에 애셔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어차피 진짜

가 나타나면 모든 게 변해 버릴 터, 애셔는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떠올리고는

불온한 숨을 집어삼켰다.

아이와 자신을 위해 가짜는 이만 퇴장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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