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114)화 (114/114)

외전 #6

놀고먹고 섹스하고, 놀고먹고 섹스하고. 스페인으로 온 후 승오와 의진의 루틴이었다. 나체로 뒤엉켜 자던 두 사람 중 청명한 햇살에 먼저 눈을 뜬 건 의진이었다.

“…아, 허리.”

제 몸을 감싸고 있는 무거운 팔을 치운 의진이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센터에 있을 땐 그래도 훈련이라는 휴식 시간이 있으니까 몸이 회복될 수 있었는데, 이건 쉴 틈이 없었다. 눈만 마주치면 불이 붙으니 원.

폭 한숨을 쉰 의진은 텁텁한 입안을 헹구기 위해 협탁 위 물병을 더듬더듬 찾아 쥐었다.

“날씨 좋다.”

허리가 뻐근하고 쉴 새 없이 들락거린 아랫구멍은 쓰라렸으나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언제 이런 호사와 여유를 누려보겠어. 바닥에 떨어진 승오의 티셔츠를 주워 입은 의진은 거실로 나가 발코니 문을 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코끝을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반병 정도가 남아있던 물을 전부 마신 그는 입술을 닦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늘은 바르셀로나 외곽을 돌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일이면 꽃축제가 열리는 세비야로 넘어간다. 그리고서 그라나다, 마드리드를 돌 것이었다. 여유가 안 된다면 한 지역쯤은 포기해도 좋을 것 같다.

“승오야, 안 일어나?”

의진이 있는 쪽으로 모로 누워 자던 승오의 위로 의진이 올라탔다. 쪽, 쪽. 눈에 보이는 뺨에 진한 입맞춤을 하자 감겼던 눈꺼풀이 들렸다.

“아침부터 왜 그래.”

“그냥, 좋아서.”

승오는 의진을 안아다가 제 옆으로 눕혔다. 그리너리한 샴푸 향이 흩어지는 갈색 머릿결을 타고 풍겨왔다.

“우리 몇 시에 나가기로 했더라.”

“11시. 배고파.”

다시 지그시 눈을 감고 의진의 머릿결을 만지던 승오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나 금방 준비할게. 나가자.”

“응!”

마른 세수로 잠을 떨친 그는 몸을 일으켜 곧장 욕실로 향했다. 승오의 구릿빛 상판에도 요 며칠 의진의 집요한 잇자국과 울혈이 가득했다. 의진은 넓은 등에 죽죽 그어진 손톱자국을 보고 히죽 웃다가 침대에서 벗어났다.

서울에서 여행 준비를 하는 내내 가고 싶었던 추로스 집에 들러 갓 튀긴 추로스를 맛보고, 외곽에 있는 몬세라트를 보기 위해 지상에서 운행 중인 케이블카를 탔다. 의진은 정말 의외로 그것을 무서워했다. 시선을 장악하는 높다란 돌산 사이 동동 떠있는 느낌이 소름 끼치는 모양이었다.

“승오야, 내 손 꽉 잡아.”

“안 떨어져. 그리고 떨어져도 안 죽어.”

“누가 그걸, 몰라악!”

순간 바람에 휘청거리자 의진이 폭삭 승오에게 안겨 왔다. 승오는 앞뒤로 따라오는 케이블카의 간격을 살폈다. 무슨 짓을 해도 모를만한 간극이었다. 허리를 감아오는 의진을 껴안은 승오가 턱을 들게 하고 키스했다.

오목한 윗입술을 먼저 덮어 잇새를 가르자 혀가 뒤섞였다. 긴장이 살짝 풀린 틈을 타 능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무섭지 않아. 내가 있어. 의진의 머릿속을 채웠던 두려움이 슬슬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제 안 무섭지?”

“…응.”

아, 존나 멋있어. 수줍어하는 얼굴과 달리 의진은 늘 감탄이 조금 격한 편이었다. 승오는 생각이 읽힌 걸 티내지 않으려 허벅지 뒤, 햄스트링을 살며시 꼬집었다.

세비야로 넘어가기 전 여행은 역시나 순조로웠다. 올라가 절벽에 둘러싸인 수도원에서 미친 듯이 사진을 찍은 후 내려올 땐 산악 열차를 이용했다.

“진작 이거 탈걸.”

“두 개 다 타보자고 한 건 너였잖아, 의진아.”

“…그랬나?”

스페인은 두 사람과 잘 맞았다. 날을 잘 잡은 탓인지 밝은 햇볕은 늘 기분 좋게 살을 간지럽혔고 바람은 시원했다. 샤프란의 향신료는 조금 맞지 않았지만, 그 외의 것은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이처럼 완벽한 여행이 또 있을까. 작살했던 해가 조금 느슨해질 무렵 펍에 들어가 맥주 오백 시시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주전부리를 사 들고서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즐거웠다.

“승오야, 우리 다음에 또 오자.”

“응. 그러자.”

“유하랑 유찬이 선물은 어디서 사지?”

“내일 세비야에서 사는 게 나으려나?”

“어어. 그게 낫겠다.”

승오의 허벅지에 다리를 걸치고 일정표를 정리하던 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오는 온종일 걸어 피곤을 호소하는 의진의 발을 주물러주고 있었다.

“축제 시즌에 맞춰 와서 좋다.”

“나는 그냥 너랑 와서 좋아.”

“……너 솔직히 말해. 멘트 어디서 배워오는 거지.”

굳은살 없는 매끈한 발을 꾹꾹 주무르던 승오가 고개를 들었다. 의진은 또 볼을 발그레 붉힌 채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내가 어디서 배워, 이런걸.”

“이상해. 수상해.”

“수상할 것도 많다.”

승오는 피식 웃으며 의진의 마른 종아리를 쭉 잡아당겼다.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의진이 속절없이 승오 곁으로 끌려왔다.

“좋으면 좋다고 해. 어차피 나는 다 아는데, 뭘.”

“…이, 이것 봐. 왜 이렇게….”

“솔직해지라고 할 땐 언제고?”

또다. 의진은 자연스럽게 제 위로 올라오는 승오를 거부하지 못했다. 애초에 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아무튼. 속옷 안으로 쑤욱 들어오는 커다란 손이 아직 발기하지 않은 물렁한 성기를 매만졌다.

“…그러게. 이렇게 좋아질지는 몰랐지.”

주황 조명 아래 야릇한 섹스가 시작됐다. 내일은 세비야에 갈 예정이었으므로 기절 직전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야 했다.

*

“나 얼굴 많이 붓지 않았어?”

“아니. 예뻐.”

작은 얼굴을 조몰락대던 의진이 승오의 말에 냉큼 손을 내렸다.

비몽사몽 하는 의진을 승오가 직접 씻기고, 입히고, 엉덩이를 통통 두들겨 세비야로 넘어왔다. 다짐과 달리 극심한 자극에 시달린 의진은 밤새도록 울어댄 탓에 얼굴이 다 부었다. 말 한마디에 금방 입을 다물 거였으면, 진작 말해줄 걸 그랬다. 승오는 웃음을 삼켜내고 가방을 고쳐 맸다.

“큼, 너한테 예뻐 보이면 됐지.”

승오 옆으로 조금 붙으며 의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 같은데.”

세비야 꽃축제, 페리아 데 아브릴. 축제 입구부터 화려한 의상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의진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 구경에 홀린 의진의 어깨를 승오가 굳게 감싸 안았다.

“조심해. 다치지 않게.”

“와, 이제야 스페인 같아.”

그럼 여태 간 데는 다 뭐였고? 의진의 머리꼭지에 턱을 살짝 찧었다가 뗀 그는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의진을 더 안쪽으로 밀었다.

“……?”

마차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아주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승오가 눈을 찌푸리고 마차 행렬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승오야, 뭐 봐?”

“어? 아니.”

줄지어 가던 마차 행렬이 끝나고, 건너편엔 플라멩고를 추는 사람들뿐이었다. 의진은 굳은 얼굴로 앞을 응시하는 승오를 보고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분명히 김도훈처럼 보였는데. 조금 길긴 했지만 여전한 은발에 큰 키, 그리고 동양인의 얼굴을 착각할 리 없었다. 그 앞에 있던 남자는 그럼 천음인가. 승오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데.”

착각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것이리라. 그들이 이곳에 있을 리가. 승오는 덩달아 굳어가는 의진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저기 유하랑 유찬이 선물 살 게 있을까 해서.”

“…정말?”

“어. 정말.”

불안한 시선으로 승오를 올려다보던 의진이 입을 일자로 늘렸다. 모처럼 들뜬 의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승오는 부러 의진의 어깨를 감싸고 손가락으로 카세타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들어갔다 갈까? 기념품 파는 거 같아.”

“…응.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 맞지?”

“그렇다니까.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제야 의진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승오는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더 주고 길을 가로질렀다.

“마그넷은 여울쌤 주자.”

“그런 거로 좋아하시려나.”

“그냥 덤이지, 덤.”

고심해서 선물을 고르는 의진을 뒤로하고 승오는 한 번 더 주위를 돌아봤다. 설마, 하는 마음에서였다.

최근 제2 ‘도시’ 은거지로 사용되던 실험실들을 철거하던 중 유서로 발견되는 편지 하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모든 죄를 끌어안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김도훈의 글씨체였고, 수사 종료와 더불어 그들은 한국에서 사망 처리가 됐다. 죽은 자들이었다. 죽지 않은 걸 알았으나 죽어야 했다.

“그럼 일단 이거 사자. 은후랑 태준이, 지환님 것도 사야지.”

“…그래, 좋아하겠다.”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길에 의진이 고개를 들고 빙긋 웃었다. 승오는 그 웃음에 따라 웃으며 순간적인 잔상을 지워내기로 했다. 살아있든, 실제로 죽었든 이젠 저와 의진에겐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두 시간 남짓 돌아다닌 끝에 갈증이 물밀 듯 밀려왔다. 바로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바로 보이는 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민 의진이 혀를 쭉 내밀었다.

“와, 정신없어.”

“커피 뭐?”

“여기는 캐러멜 마끼아또, 같은 거 없으려나?”

붉어진 얼굴로 혀를 빼낸 의진이 손부채질을 하며 승오를 올려다봤다. 승오가 메뉴판을 쭉 살펴보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갔다 와 볼게. 단 거면 되지?”

“응. 제일 단 거. 근데 시원해야 해.”

“알았어.”

승오가 의진의 더운 뺨을 꾹 찌르고선 주문대로 향했다. 너른 등판을 흡족하게 보던 의진은 발에 걸리는 무언가를 바닥에서 집어 들었다.

“어라, 이게 뭐야.”

필름. 돌돌 말려진 필름 하나였다.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 자리에 놔두자. 의진은 대수롭지 않게 필름을 테이블에 올려두고선 멀찍이 서 있는 승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스티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승오는 테이블 위에 있는 필름에게 시선을 뒀다.

“이거 뭐야?”

“몰라. 밑에 떨어져 있길래. 하, 이제야 살 것 같다.”

한 번에 삼 분의 일을 마신 의진이 후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승오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음료로 목을 축였다.

“우리 짐, 잘 도착했겠지?”

“응. 숙소로 잘 보내놨다고 문자 왔어.”

“다행이다.”

어느새 여행의 중간 지점에 도달했다.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센터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지만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한 달간의 추억을 곱씹다 보면, 또 떠날 날이 찾아오겠지.

“근데 이거 주인이 찾으러 올까? 여행객일 수도 있잖아.”

“잃어버린 거 알면 다시 오지 않을까? 여기에다가 두고 가자.”

롤이 말아진 필름을 테이블 구석에 세워둔 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몰라도 꼭 필름을 다시 찾아가기를. 추억을 날리는 것만큼 아까운 것은 없으니까.

“이제 밥 먹으러 갈래? 배고프다.”

“그래! 나 빠에야 먹고 싶어.”

잠시 숨을 돌린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도훈과 천음이 흐릿하게 기록된 필름은, 여전히 세비야 꽃축제 속 어느 카페에 그대로 남겨진 채였다.

“승오야, 너랑 함께여서 진짜 너무 좋아.”

“나도. 앞으로 더 좋은 데 많이 데려가 줄게.”

시끄러운 축제장을 나가면서 두 사람은 영원히 함께할 미래를 그렸다. 의진은 할 수 있다면 스페인의 공기를 한국까지 담아가고 싶었다. 승오와 제가 타국에서 쉰 첫 번째 숨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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