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109)화 (109/114)

외전 #1

치유 에스퍼, 라는 타이틀은 늘 도훈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에스퍼와 상생하는 가이드도 아니었으며 전투에 나가 직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포지션도 아니었다. 모호 그 자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앙선에 꼿꼿하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천음님.”

쿰쿰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천음을 끌어안은 도훈이 능력을 발산했다. 천음의 가이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제 것이 될 수 있는 행동.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마다 도훈은 천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

느리게 오르내리던 가슴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반쯤 감고 있던 천음의 우주 같은 눈이 떠지는 건 금방이었다. 도훈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모든 게 끝났습니다.”

“…….”

천음의 얇은 입술이 무어라 달싹였다. 주승오에겐 정신적 구타를 당하고, 지의진에겐 옆구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건물에서 추락하고 만 비운의 남자. 그렇지만 도훈의 눈엔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존재.

고개를 숙이자 목소리가 확연히 들려왔다.

“나를, 택한 건가요?”

천음이 처음 정신을 차리고서 던지는 질문은 당연히 ‘도시’일 줄 알았다. 도훈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천음의 눈동자는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지의진에게 가버릴 줄 알았는데.”

“…어느 쪽을 택하든 끝이 죽음이라면, 저는 몇 번이고 천음님 곁에 있을 겁니다.”

“……그자를 사랑하잖아요.”

도훈이 줄곧 방출했던 치유 에너지가 멎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풀 향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대로 죽으려 했습니다. 모든 걸 잃게 됐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훈이 빼내온 자동차는 예전 의사 생활할 때 사용하던 구식 소형 자동차였다. 즉, 내부는 너무나 협소했고 주변 공기가 족족 스며들어와 겨울인 지금 오한이 떨려댔다. 천음이 말을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사르르 퍼져 나왔다.

“왜 나를 택했는지 말해주세요.”

“그를 구한 것만으로 제 할 일을 다 했어요. 이제 미련 따위 없습니다. 한 번도 분출하지 못한 감정이라, 속에서 탈이 났던 모양이에요.”

“…….”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가장 커다란 세상을 누리던 사람이 도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새 달빛이 파고들어 고백의 순간을 더욱 덧칠해주었다.

“그에 대한 감정을 말한 뒤로 이어졌던 외면이 더욱 힘들었다면, 파멸해가는 당신을 구원하고 싶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천음은 믿어야 했다. 이제 제 곁에 남은 건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는 도훈. 단 하나였다.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며 살았던 그는 지독한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약해빠진 인간에 불과했다.

죽음과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탐욕과 배신이 팽배하지 않는 세상. 도훈과 함께라면, 그런 순백의 삶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흔들림 하나 없는 올곧은 호박색 눈동자를 빤히 보던 천음이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믿어야죠. 내겐 당신뿐이니까요.”

말을 마친 천음의 입술에 도훈이 내려앉았다. 가슴 깊숙이 숨겨진 애정을 독차지하기 위한 욕정이 아닌, 서약과도 같은 입맞춤이었다. 혹은 서로가 서로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의식이거나.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어요. 우리의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아주 머나먼 곳으로요.”

“어디든 좋아요. 오지여도 상관없어요.”

낡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빛을 밝혔다. ‘도시’ 속 천음과 도훈은 정말로 죽어버렸다. 그들의 죄 많은 육신은 이곳에 남아 억울한 영혼들에 물어뜯길 것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서로가 곁에 있었으므로.

*

그들이 새로 태어난 곳은 코르도바였다. 스페인의 아기자기한 소도시 중 하나로 관광객의 발길도 다른 도시보다 많지 않은 마을이었다.

빨간색 벽돌집 3층 베란다에서 천음이 습기 하나 없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피에스타가 지난 후로 도훈은 약간 분주했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빗장뼈까지 오던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잘라버렸다. 목덜미를 감싸지도 못하는 짧은 길이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바람을 타고 살랑였다.

“천음님.”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훈이었던 모양이다. 천음은 뒤를 돌아 핑크빛 계열의 꽃이 가득한 화병을 든 도훈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날 천음님이라 부를 생각이죠? 전 이제 당신이 섬겨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눈썹 아래를 겨우 넘기는 앞머리가 흔들거릴 때마다 도훈은 천음이 꼭 다른 차원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로, 아름다웠다.

도훈의 꽃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끔 입을 꾹 다물고 작업대에서 줄기를 툭툭 자르는 천음을 보고 감탄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자기 눈에 보기 좋으면, 남들 눈에도 그래 보이는 법이었으니까 도훈은 이해했다.

“그럼 천음님은 언제까지 제게 말을 높이실 생각입니까?”

동그란 원목 테이블에 화병을 놓으며 도훈이 대답했다. 천연의 분홍빛을 띠는 금작화 사이로 오렌지꽃이 가운데 천음을 향해 다섯 잎을 활짝 폈다. 꽃잎 개수가 확연하여 천음이 좋아하는 꽃이었다.

천음도 수분기를 머금은 잎을 만지작거리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피차일반인데 여기까지 할까요? 오늘 꽤 날이 좋아요.”

“안 그래도 천음님이 좋아하는 하늘이길래, 일찍 클로즈 팻말로 돌려놓고 왔어요.”

평화. 천음은 이곳에서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꼈다. 왜 그토록 권력에 목숨을 걸었는지 이유조차 생각이 안 날 만큼 코르도바의 낮과 밤은 따뜻하고 황홀했다.

“당신을 찾는 사람이 많잖아요. 이곳에선 당신이 그렇게 일찍 문을 닫아버릴 때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여요.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에스퍼가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는 건 무슨 기분일까. 치유 에스퍼인 도훈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코르도바에 온 이후 우는 아이에게 새소리를 들려주거나, 섹스할 때 흥분에 못 이겨 소음을 지워내는 것 빼곤 천음은 완벽한 일반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감이 지나치게 발달한 터라 능력을 쓰지 않아도 저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귀에 꽂히나 보다. 도훈은 바람을 맞아 살짝 갈라진 까만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웃었다.

“그런 손님들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주셔서, 괜찮아요. 서비스로 데일리 꽃 하나 넣어드리면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해주시거든요.”

“이렇게 꽃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꽃집을 차려줄 걸 그랬어요.”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이뤄지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저, 그 말은 기저에 깔린 후회를 조금씩 깎아 만든 문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신을 좀 더 들여다볼걸. 뭐 이런 부류의 돌이킬 수 없는 후회 같은 거.

도훈은 머리카락이 덮인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선 대화 주제를 바꿨다.

“날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러 갈까요? 돌아오는 길에 외식도 해요.”

“그래요. 좋아요.”

베란다 문 사이에서 천음이 먼저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준 도훈이 미소를 보였다. 화려한 삶을 살아왔던 그에겐 퍽 재미없는 나날일 텐데도 저와 함께라는 이유로 모든 걸 같이 해주는 게 고마웠다.

닫혀있는 꽃집을 지나쳐 걷던 도훈이 천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햇볕을 받는데도 타지 않는 흰 손이 큼지막한 손 위로 사뿐히 내려왔다. 그들은 깍지보다 손을 교차하여 잡는 것을 좋아했다.

“드시고 싶은 게 있나요?”

“아니요, 딱히. 당신이랑 함께 먹는 거라면 뭐든 먹을 수 있어요.”

“그럼 저번에 맛있다고 한 버거집에 가요. 오늘 오전에 그곳 사장님이 시클라멘을 많이 사가셨어요.”

천음은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 있었던 것과 달리 이곳에선 시간과 날짜, 요일의 필요성을 모두 잊고 살았다. 꽃집을 오픈했을 때, 피에스타로 쉬어갈 때, 꽃집 문을 닫을 때. 도훈이 제 곁에서 사라지고 돌아오는 텀만 확인하면 됐으니까.

“며칠 뒤에 꽃 축제가 열린다고 했죠?”

“네, 세비야로 가는 기차 시간은 미리 알아봐 뒀어요.”

골목골목을 지나 유독 사람이 북적이는 메스키타 사원을 지나자 시원한 강바람이 그들을 반겨왔다. 훅 불어오는 바람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은, 조금의 휘청거림도 불안했으므로.

“흐음, 그렇다면 필름 카메라를 사둬야 할 거 같은데.”

“카메라요?”

강 사이를 잇는 긴 다리를 걸으며 천음이 중얼거렸다. 도훈은 천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려는 욕망이 충실한 인간이었기에, 작게 뱉은 말에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어디 골동품 매장을 가볼까요?”

“내일 마켓이 열리니 한 번 둘러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그런데, 카메라는 무슨 이유로요?”

다리 너머 서 있는 칼라오라 탑에게 시선을 뺏긴 천음이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건….”

파란 하늘과 살살 부는 강바람, 그리고 파란 하늘을 쏙 빼닮은 강.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도훈은 무척이나 근사했다. 그러나 천음이 도훈에게 매번 반하는 순간은 따로 있었다.

“꽃을 대하는 당신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거예요. 이곳에 익숙해지면 혼자 다녀올까도 했는데… 아무래도 당신만큼 스페인어를 잘 다루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저를, 담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요. 이제 내가 보는 세상은 당신밖에 더 있겠어요?”

부끄럼 없이 얘기하는 말 같겠지만, 천음은 잡았던 손을 놓고 조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 끝이 넘어가는 태양보다 붉어서 도훈은 몰래 웃고 말았다.

“그럼 꽃 시장에 함께 갈 때도 쭉 저를 보고 계셨겠네요.”

천음의 걸음에 맞춰 걸은 도훈이 잔잔한 말투로 물었다. 천음은 금방 따라온 도훈을 올려다보다가 탑 꼭대기로 고개를 돌렸다.

“전 늘 당신만 봤어요.”

도훈의 가슴 속에 푸른 강 냄새가 떠밀려 들어왔다. 당장 기대했던 꽃 축제에선, 도훈도 오색찬란한 꽃 대신 천음을 마주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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