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전쟁이나 전투가 끝난 후 돌아갈 땐 딱 세 가지의 방법이 있었다. 한 가지는 나갔던 방식 그대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 또 하나는 정신을 잃고 신체 어딘가가 불구 된 채로 들것 따위에 실려 이송되는 것, 마지막은… 숨이 붙어있지 않은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
승오와 의진은 당연히 첫 번째였다.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손가락도, 입을 맞출 수 있는 입술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눈도. 모든 게 멀쩡했다. 그간의 고통이 환영이라고 느껴질 만큼.
센터로 돌아가자 돌아온 요원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의진이 승오의 손을 더욱 꽉 잡고선 그를 바라봤다.
“…우리 돌아온 거 맞지?”
“응, 맞아. 서울이야.”
다 너절해진 전투화 바닥에 느껴지는 흙마저 낯설었다. 부상 회복 중이던 요원들까지 나와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런 환영을 받아도 되는 걸까. ‘도시’가 사라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승오는 총사령관에게 ‘도시’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국가의 평화를 수호했다는, 거국적인 보고 임무를 맡았다. 의진의 손을 한 번 꾹 잡았다가 놓은 승오가 중앙에 서 있는 사령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N189-2. A팀 주승오 요원, 작전 종료 후 보고 드립니다. 물질화 에너지 실험으로 수많은 정부 가이드를 납치, 살해를 일삼은 반역 조직 ‘도시’의 수장 천음을 사살했습니다. 대치 시 능력 폭주로 인해 건물에서 추락하여 자체 소멸하였고 ‘도시’의 주축이었던 김도훈은 도피한 것으로 추정. 후에 있을 세부 수사에 적극 참여할 것이며, ‘도시’ 본거지가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본분을 다해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이상!”
우렁차고 강단 있는 승오의 목소리가 고요한 센터를 울렸다. 사령관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가슴까지 올려 천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수고 많았네.”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의진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끝이 났구나. 이 평화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으나, 더는 표적이 되지 않음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승오도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의진을 바라봤다.
뒤이어 수송차 몇 대가 줄을 지어 들어왔다. 붙잡혀 있던 가이드들이 구조된 것이었다. 그 안엔 유찬의 누나 유하도 있었다.
“신변 확인 먼저 해야 하니 보호 시설로 옮겨!”
“네, 알겠습니다!”
수송차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나온 건 유하였다. 유하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승오를 쳐다봤다. 히끗 웃는 폼이 동생과 똑같아 승오도, 의진도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곳이라 낯설 법한데도 씩씩하게 안내 직원을 따라 걷는 유하를 줄곧 지켜보던 그들도 몸을 돌렸다. 이제 자신들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N189-2팀의 해체를 명령한다.”
승리를 만끽하는 환호성이 들렸고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안으며 격려했다. 의진도 승오를 보며 팔을 뻗었다. 활짝 웃는 얼굴을 마주 보던 승오는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품에 꼭 맞는 의진을 안으며 불안해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슬퍼하지 않아도 됐다. 오롯이 행복과 그가 주는 사랑만 느낄 것이다.
“수고 많았어.”
“너도, 수고 많았어.”
서울 센터엔 그날의 기쁨이 아주 오랫동안 새벽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승오와 의진은 다시 한번 손깍지를 끼고서 흩어지는 인원 속에 섞여들었다.
*
‘도시’는 사라졌다. 아주 완벽하게. 제1, 제2 본거지 모두 정부에서 직접 철거가 이뤄졌으며 물질화 에너지에 대한 실험 자료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감사팀과 분석팀은 모두 입을 모아 김도훈이 인멸한 것으로 추정했다.
곧바로 김도훈에 대한 추적이 시작되었지만, 그는 애초에 ID 등록조차 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신원 확인이 불가했으므로 국내 동선이나 출입국 조사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수사의 난항이 생기긴 했으나 파고들려 노력만 한다면 그를 찾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김도훈에 대한 수사는 금방 폐기됐다. 그 이유는.
“어차피 천음이 없으면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에스퍼이긴 하나 능력 자체가 치유이기도 하고요. 그는 천음을 따르는 충성한 부하였을 뿐, 반역에 대한 목적이 있어 가담한 것이 아닙니다.”
“주승오 요원. 지금 반역 조직의 일원을 두둔하는 건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현재 보호 중인 유하와 유찬을 케어한 것도 김도훈 그자였습니다.”
내부에선 김도훈에 대한 수사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핵심 인물은 천음이었고, 그는 죽었다. 그리고 그들의 비인륜적인 행위가 이뤄지던 ‘도시’는 무너졌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견이었다. 수사 착수에 들어간 후 약 몇 주에 걸친 시간 동안 아무런 단서 하나 잡지 못한 것이 큰 이유기도 했다.
승오와 의진 모두 수사 종료에 찬성했다. 조금 격렬한 토론과 회의 끝에 수사는 종료되었고, ‘도시’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종결 식이 진행됐다. 그리고 그날은 의진이 그토록 기다리던 바다 여행의 시작이었다.
“승오야, 선크림 챙겼어?”
“네가 아까 가방에 넣었잖아.”
제복을 차려입은 것과 다르게 두 사람은 꽤 분주했다. 거실을 가득 채운 캐리어 두 개가 입을 쩍 벌리고 마구잡이로 짐을 받아내고 있었다. 의진은 옷가지를 휘적거리다가 불편했는지 넥타이를 쭉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우리 늦으면 안 되는데!”
“안 늦어. 늦을 거 같으면 중간에 나오면 되지.”
“그래도, 우리 상도 받는데 나가면 되겠냐?”
의진의 수영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오가 의진의 눈치를 보고 슬쩍 제가 산 것과 바꿔치기를 했다. 앙증맞은 노란색 삼각 수영복. 의진의 흰 피부엔 평범한 4부 수영복보다 이게 더 잘 어울렸다.
“철이 들긴 했나 보네. 원래 같으면 아예 참석하지 말자고 꼬셨을 거면서.”
“……누굴 철부지로 알아!”
한국은 아직 추운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 달가량의 포상 휴가를 받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곳은 뜨거운 나라, 스페인이었다. 의진이 그 나라를 콕 찍었을 때 승오는 군말 않고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얼른 짐 싸. 그러다가 행사 먼저 늦겠다.”
“아아. 맞다. 혹시 모르니까 컵라면은 잔뜩 쟁여놔. 그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지 않댔어, 은후가.”
“걔 거기 가봤대?”
“어… 5살 때?”
공기 중을 동동 떠다니는 목소리에 승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전투에서 돌아온 직후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어지러운 상황을 천천히 원래대로 돌리면서, 그제야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의진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울음으로 시큰했던 눈가는 젖을 일이 없어 뽀송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로 보이는 따뜻한 품에 감격했다. 육체를 짓누르던 트라우마는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가 이제 누구를 만나도 무섭지 않았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일상. 그 일상에 평범한 사랑을 첨가한 하루하루를 시작할 차례였다.
“다 쌌지?”
“응, 이 정도면 대충.”
승오는 덜 다물린 의진의 캐리어를 잠가주고선 손잡이를 빼 현관문 앞에 나란히 두었다. 이제 오전에 있을 종결식이 끝나면 곧바로 공항으로 튀어가기만 하면 됐다.
“나 비행기 처음 타 봐. 진짜 설렌다.”
구두를 고쳐 신은 의진이 앞코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승오는 의진이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그래.”
승오의 짧은 대답에도 의진은 고백이라도 받은 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커다란 눈을 가늘게 감으며 입이 가로로 벌어졌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처음 반한 그 날이 되풀이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 주승오 또 귀 빨개졌다.”
“…아닌데?”
푸흐흐. 의진이 승오의 팔에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저었다.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유달리 가벼웠다.
“야, 주승오. 지의진.”
행사장에 들어서자 같은 의상을 입은 태준과 지환이 그들을 반겼다. 천음이 몸 안에 있을 적 어려워했던 것과 달리 지환과 의진은 곧잘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지금도 지환을 발견하자마자 의진은 팔짱을 꼈던 손을 빼내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와,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멋있는데?”
“너도.”
“두 사람은 만나면 매번 칭찬.”
태준이 졌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의진의 뒤에 바싹 붙은 승오가 표시된 자리를 찾아 손목을 붙잡았다.
“지의진, 우리 여기야.”
승오의 힘에 의진은 지환과 얘기를 하다 몸을 틀 수밖에 없었다.
‘너 다른 사람이랑 오래 얘기하는 거, 질투 나.’
트라우마로 좀처럼 주변인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했던 의진이 훈련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자 승오가 최후로 건넨 말이었다. 질투…. 그 이후로 의진은 승오의 ‘질투’를 배려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를 자극했다간 저만 힘들어지기도 했고.
“주승오, 넌 내가 그렇게 좋아?”
서서히 주변을 배회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제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식 진행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오는 고개를 돌려 의진을 바라봤다. 살이 폭삭 내렸던 얼굴이 반질반질해져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행사 준비가 한창인 무대를 응시한 채 꼬물거리며 손까지를 껴오는 의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승오도 똑같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어, 사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매번 신기할 정도로.”
“…….”
이번엔 의진이 고개를 돌려 승오를 봤다. 주승오는 이제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 심장을 쥐었다 펴는 게 가능한 인물이 됐다. 저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의진은 남은 손으로 괜히 볼을 문지르곤 큼큼, 헛기침했다.
“잠시 후 임무 종결식 연설이 시작되겠습니다. 참가한 귀빈 여러분들 모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떠들썩했던 장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작전을 지휘했던 전략기획본부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오와 의진도 그의 등장에 맞춰 존경의 박수를 보내며 행사에 참여했다.
이 시간이 끝나면 둘은 스페인으로 날아가 더운 바람과 작렬하는 햇볕을 맞으며 사랑을 속삭일 터였다. 길고 긴 연설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의진은 시간을 확인하고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