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천음은 기어코 연고를 올려보낸 도훈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볼에 스친 생채기 하나. 승오가 피 터지게 얻어맞는 동안 고작 이거 하나 남긴 거였다. 연고를 바닥에 던진 천음이 재킷을 벗어 침대에 내려두고선 욕실로 향했다.
욕조 물에 몸을 담그니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저 자신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이게 다 지의진과 주승오 때문이었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고, 파괴한 날파리 같은 족속들. 부드러운 거품이 모아진 물을 몸에 묻혀 숨을 고른 천음이 지그시 눈을 떴다.
“얼른 죽여버려야겠어. 내가 더 망가지지 않도록.”
수면 위 떠 있는 거품을 쥐자 덩어리에서 분리된 것이 천음의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천음이 영원한 지배를 꿈꾸게 된 건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강압적인 복종과 굴복, 나를 다스리려는 기고만장한 정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통제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통치자가 존재했을 때 비로소 세상은 평화를 맞았다.
그걸 내가 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처음 도훈을 수족으로 들였을 때 어땠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텅 빈 눈동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모보다 훨씬 추악한 자기혐오가 도훈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토록 영특하면서, 이토록 유능하면서, 이토록 아름다우면서. 도훈은 제가 시키는 일이라면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모든 걸 해냈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 뻣뻣했던 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저와 욕정을 같이 했고, 몸을 탐하는 눈빛엔 점점 애욕이 들끓었다.
‘천음님을 사랑합니다.’
‘사랑?’
‘네, 저의 세상이자 숨결인 당신을 저는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나긋한 목소리의 도훈이 그렇게 말한다면 틀린 오답도 정답처럼 들렸다. 천음은 그 목소리에 속은 것이었다. 지의진을 마주하며 뒤틀린 세상을, 그 말과 혀와 손길에 홀려 미처 눈치채지 못하였다. 아니, 알았지만 마주하기 싫은 거였을지도.
포근한 침대에 누워 천음은 다리 사이에 빳빳하게 서 있는 성기를 틀어쥐었다. 빌어먹게도 애정의 변절자를 생각하니 몸이 달아오르고 만 것이다. 도드라진 선단 핏줄을 쓸어 올리고, 선액을 뱉어내는 귀두를 뭉근하게 문지르며 밭은 신음을 내질렀다.
“으읏… 응!”
흥분으로 점철된 딱딱한 좆이 닿은 것처럼 구멍은 애액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천음은 다리를 더 활짝 벌려 정액 묻은 손가락으로 달아오른 입구를 들쑤셔보았으나, 쾌락은커녕 패배감만 물씬 들었다.
이젠 김도훈 없인 절정에 다다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건가. 나를 이렇게 길들여놓고, 지의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가. 천음의 함빡 젖은 손가락이 허무하게 벌어진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김도훈….”
시트를 꽉 쥔 천음이 몸을 일으켰다. 나의 탐욕이 더 추악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도시’의 세상은 아주 어두운 밤이 깔리기 시작할 때였다.
모든 부작용을 보완한 결과물이 마침내 도훈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천 번의 실험과 몇십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 몰랐다. 견과류 크기만 한 캡슐 한 알. 천음의 욕망이 투영된 에너지. 도훈은 쓰고 있던 실험용 고글을 벗고서 수백 알 제조에 들어갔다.
“이제 드디어….”
천음의 말이 맞았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연구실에 틀어박혀 예전처럼 ‘도시’를 위해 일하는 것뿐이었다. 천음에게 입을 맞추고, 살을 맞대고, 그의 흥분의 집결지를 탐하는 짓은 제가 할 게 아니었다. 다른 이를 품어버린 변절자를 내치지 않는 것만으로 천음에게 또 한 번 시혜를 입은 셈이다.
실험 대기 중인 에스퍼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캡슐을 복용시켰다. 에너지 회복 속도 일치, 회복량 일치. 완벽했다. 천음이 그토록 말하던 완벽. 그걸 해내고야 만 것이다.
도훈의 침울한 얼굴이 아주 잠시나마 화사해졌다.
*
“천음님, 연구에 성공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확실합니까?”
다소 들뜬 목소리를 잠재우는 날카로운 말투.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천음이 도훈을 바라보고 빙긋 웃음을 지었다.
“각기 다른 등급의 에스퍼에게 실험해본 결과, 회복 속도와 회복량이 동일했습니다.”
“잘됐네요.”
간단한 소감을 표한 천음이 도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불철주야 노력한 당신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내가 특별한 상을 내릴까 해요.”
“천음님의 행복이 곧 제 행복입니다.”
“아니요. 그건 틀린 말이에요. 당신과 나는 분리된 존재니까요.”
귓바퀴를 살살 문지르던 천음은 갸륵한 얼굴로 도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뒤에 서 있는 방역원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지의진과 주승오를 당장 메인 실험실로 데려오세요.”
“……천음님.”
농염한 손끝이 이번엔 얇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턱선을, 굳게 다물린 입술을 감상하듯 쓰다듬었다.
“당신이 원했던 만큼 지의진을 안게 해줄게요.”
“천음님!”
“기대되지 않나요? 벌써 아랫도리를 세운 건 아니겠죠?”
온화했던 얼굴이 단숨에 확 굳혀졌다. 천음은 너른 어깨를 마지막으로 쓸어내리고서 도훈을 지나쳐 실험실로 향했다.
“뭐해요. 오지 않고.”
천음의 단정한 뒷모습을 보던 도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시각, 방역원 열댓 명이 승오와 의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철창문을 열고 두 사람을 포박한 그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실험실로 빠르게 걸었다.
“놔! 의진아!”
의진을 결박한 자들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승오는 무력화를 사용해 그들을 떨어뜨려 놓았지만, 곧바로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하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위아래 할 것 없이 걷고 있는 복도를 채워갔다.
“허억!”
곧바로 실험관에 갇힌 의진은 억지로 턱을 벌리는 힘에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은, 보통 지시를 수행하던 일반인이 아니라 에스퍼들이었다. 의진의 마른 입속으로 여러 개의 알약이 들어갔다.
“삼켜.”
“싫, 윽!”
입을 틀어막은 그중 하나가 의진의 머리카락을 잡아 쥐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본 후에야 떨어졌다.
“하아, 하아….”
오래전, 가이딩을 위해 맞았던 각성제와 유사한 반응이었다. 몸이 뜨거워졌고 다리 사이가 저릿했다. 의진은 점차 뿌예지는 시야가 무서웠다. 승오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을 땐 누군가가 제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만….”
승오는 실험실 입구에 멈춘 채 누군가를 기다려야 했다. 양팔을 포박한 이들이 에스퍼라는 건 승오도 능력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또각, 또각. 정갈한 구두 소리. 파도가 갈라지듯 사람들 사이로 천음이 나타났다.
“……당장 의진이를 풀어줘.”
“그건 곤란해.”
그리고 그 뒤론 형편없는 얼굴의 도훈이 보였다.
“나는 내 실험을 완성 시킨 이에게 상을 줘야 하거든.”
“하, 뭐라고?”
“전에도 말했지 않나.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로 아는데.”
“씨발. 말 다 했어?!”
이성을 잃은 승오의 외침에 천음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옆에 있던 바인드 에스퍼가 입을 막았다.
“무력화를 사용해도 외부 능력은 실험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설령, 네 능력이 그걸 뚫어도 김도훈과 지의진은 전혀 반응하지 않을 거야.”
승오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 많은 에스퍼를 저 혼자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천음은 그것을 알고 능욕하려 드는 것이었다.
“뭐해. 들어가지 않고.”
천음은 뒤를 돌아 우뚝 서 있는 도훈에게 말했다.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승오와 천음을 번갈아 보고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으으윽!”
입을 열 수가 없는 승오가 핏대를 세우며 목을 울렸다. 천음은 픽, 조소를 짓고선 그를 지나쳐 실험실 문을 열었다.
“하아, 핫… 아읏….”
아래를 발딱 세운 의진이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많은 양의 각성제가 한꺼번에 들어온 탓에 내성이 사라진 몸은 의도에 맞춰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뒷구멍엔 삽입을 바라는 애액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를 안아요. 원하는 만큼, 마음껏.”
“천음님, 저는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나는 그저 육욕을 풀 대상이었고, 지의진은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이고. 그런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천음님. 저는!”
“그게 아니면!”
차분했던 천음의 목소리가 실험실을 꽉 채울 만큼 크게 울렸다. 천음은 도훈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가운을 벗기고 셔츠 중앙을 벌리자 단추가 힘을 못 이기고 터져 나갔다.
“당장 지의진을 안아요.”
“…….”
“그리고 죽도록 후회하세요. 나를 등지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천음님….”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이 어떻게 고통받는지… 똑똑히 피부로 느끼란 말입니다.”
두 번 말하지 않아요. 당장, 저 발정난 새끼를 다스리세요. 천음의 말에 도훈은 홀린 듯 실험관으로 걸어갔다. 헉헉거리는 의진이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에 빨갛게 물든 입술, 더 마른 팔다리.
“승, 승오야… 으흥, 나, 나 좀….”
“……하아.”
엉금엉금 기어온 의진이 도훈의 다리를 붙잡았다.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를 바닥에 문지르며 부탁하는 목소리는, 의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훈은 밖에서 지켜보는 천음을 응시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흣, 으….”
의진의 둥근 어깨를 잡는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이렇게 속삭여도 천음에겐 들릴 게 분명했다. 도훈은 뜨거운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고 뗄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 아아….”
천음은 입술을 까득 깨물고는 문을 대고 말했다.
“주승오 들여보내.”
의진의 푹 젖은 허벅다리를 벌린 도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른 허벅지를 쥔 손은 여전히 진동하듯 벌벌 떨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