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꼼짝없이 주승오에게 당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경기장을 나서자 찬 바람이 천음의 온몸을 휘감았다. 공기끼리 부딪히며 떠오르는 소리마저 듣기 싫어, 천음은 신경질적으로 모든 소음을 지워냈다.
“천음님.”
분명 모든 소음을 지워냈는데 왜 김도훈의 목소리는 들리는가.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을 죽여도 모자를 만큼 치욕스러웠다. 오늘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다 없애버리고 싶은 천음이었다.
“천음님!”
“닥쳐!”
천음은 제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도훈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투명하고 고와서 높은 소리를 질러도 성대 하나 긁히는 일이 없었다. 분노로 너울거리는 얼굴을 보던 도훈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멸시했던 자에게 당한 내 모습이, 우습나?”
몸을 돌려 도훈을 정면으로 바라본 천음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그토록 애정하는 지의진의 연인을 이기지 못한 내 모습이 우습냔 말이야!”
“천음님, 진정하세요.”
마른 손목을 부드럽게 쥐는 손이 퍽 따뜻했다. 따뜻이라. 웃기지도 않았다. 천음은 확 손목을 빼내곤 그대로 뺨을 내려쳤다. 도훈의 콧대에 걸쳐져 있던 안경이 충격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얼굴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제가 치료해드릴 테니, 방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해요.”
“…….”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도훈은 천음의 아주 작은 생채기를 걱정했다. 천음은 저것이 의진에게 가기 위한 위선인지, 아니면 여태껏 지내며 숙련된 행위의 연속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위해 행해야 할 것은 물질화 에너지 연구. 그뿐입니다.”
“…천음님.”
지나치게 격분한 모습은 지배자의 모습에 어긋났다. 천음은 고개를 반쯤 돌려 용솟음치는 분개를 밖으로 내보냈다.
“나를 걱정하는 건, ‘도시’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들어야 할 감정이겠죠. 허나.”
바람에 흩날리는 도훈의 은빛 머리카락이 꽤 자라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길 때면 다듬어주는 건 천음 몫이었다. 목덜미를 가리던 것을 숭덩 잘라내고, 그 위에 입술을 묻어 표식을 남기던 어느 날의 초상.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당신도 그 일원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게, 되어 버렸군요…. 제가….”
“주제넘은 짓은 오늘부로 삼가세요. 내 명령에 복종하는 졸개들과 당신은 하나 다를 게 없습니다.”
말을 마친 천음이 뒤를 돌아 걸었다. 흙바닥을 걷는 걸음걸음이 차분했다. 도훈은 의진을 애정한 죄로 천음에게 버려진 셈이었다. 세상이었던 천음에게. 또 다른 세상을 사랑한 이유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천음이 사라지자 거센 바람 소리가 버려진 도훈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무척이나 시리고 차가워서 뼛속마저 으스러지는 기분이었다.
“…….”
우주에 부유하는 먼지만도 못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도훈은 아주 천천히, 천음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의진을 향한 감정을 고한 뒤로 괴로웠던 마음이 나아졌다고. 그러나 이젠 부질없어진, 그러니까 파쇄되어야 하는 쓰레기 같은 생각에 불과했다.
실험실로 돌아온 그는 실험관에 있어야 할 승오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쥐새끼 같군.”
보나마나 의진에게로 갔을 것이 뻔했다. 도훈은 승오를 잡아들이는 대신 방역원을 불러 연고와 작은 크기의 습윤 밴드를 건네주었다.
“천음님에게 전해드려.”
“알겠습니다.”
도훈의 지시를 받은 이가 실험실을 나가자 그는 문이 열려있는 실험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엔 파란 캡슐이 굴러떨어져 있었다. 직접 개발한 물질화 에너지의 완성판. 아주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천음이 원하는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질 거였다.
주승오가 천음의 명을 거부하고 능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망친 그는 현재 의진에게 가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도출해냈음에도 도훈은 자신을 등진 천음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도훈이 천음을 쫓아간 까닭에 승오는 다시 방역원들 손에 이끌려 실험실에 처박혔다. 피떡이 진 얼굴과 귀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들은 승오의 손목을 일단 제어했다. 아무리 정신계 에스퍼라고 한들 S급 에스퍼와 일반인은 체격, 힘에서 상당한 차이가 났다. 물리적 방어라도 막아볼 심산이었다.
“큿….”
턱을 억지로 벌리게 한 후 그들 중 하나가 파란색 캡슐을 집어 들었다. 승오는 의도적으로 조작한 물질을 삼키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붙잡고 있는 장정 다섯 명의 정신을 조종하기로 했다.
승오가 눈을 살짝 찌푸리자 다섯 모두 손을 바로 했다. 손목을 묶은 수갑을 풀게 하고, 의진이 있는 방 위치 정보까지 알아내는 데는 고작해야 5분 남짓이었다.
“김도훈이 돌아오기 전까지 알아서들 흩어져.”
가장 문 가까이 있던 방역원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철창 열쇠를 찾아낸 그는 곧바로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한 층만 오르면 금방이었다. 승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낮은 포복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의진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기운이 느껴졌다. 의진을 데리고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정부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방에 다다랐을 때 관자놀이에 맺힌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승…!”
“쉿.”
문을 열고 천천히 방에 들어오자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의진의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확연했다. 철창문을 개방한 뒤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췄다.
의진은 무사한 것 같으면서도 가슴 아픈 몰골에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얼굴이 왜….”
미처 다 닫히지 못한 문을 조심스레 틈과 맞물리게 한 승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서울 센터와 달리 이곳은 어둡고 칙칙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복도를 거닐면서 들었던 긴장감이 이제야 조금 잦아졌다. 다급하게 저를 끌어안고 가이딩 에너지를 쏟아내는 작은 뒤통수에 손을 올려보았다.
두피에서 머리카락으로, 그 얇은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금 사이사이로 의진의 에너지가 승오에게 전달됐다. 승오의 푸르딩딩했던 뺨과 죄다 쥐어 터진 입술이 조금씩 제 색을 되찾아갔다. 가이딩이란 이런 것이었다. 서로 교감하고 그 교감으로 파생된 안락이 에너지화되어 피부와 혈관, 세포 하나하나에 올라타 신체 모든 곳을 돌아다니는 것.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응, 맞아. 죽지만 않으면 돼. 그럼 내가 너… 무조건 살려줄 수 있으니까.”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살도 좋았다. 의진은 귓가에 쿵쿵 울리는 승오 특유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조그맣게 숨을 내뱉었다. 승오가 제 곁에 온 순간부터 ‘도시’도 지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잘한 입맞춤을 나누니 어느 정도 체력 회복이 정상 수준을 웃돌았다. 승오의 외관도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승오는 의진의 어깨를 붙잡고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의진아, 어떻게 할까.”
“……뭐를?”
“지금 여기서 도망칠래, 아니면….”
그 순간 화면이 조금 깨진 리시버에서 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승오와 의진은 동시에 눈을 맞추곤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한 뒤 몸을 숙였다.
─주승오, 내 말 들려?
여울이었다. 웬만한 리시버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연결이 되지 않았겠지만, EGI가 개발한 물품들은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직, 지직… 어긋난 신호를 찾으려는 기계 움직임 소리가 점차 멎어갔다.
“선생님?”
─먼저 무전 치는 짓은 않으려고 했는데, 살아있나 하고.
이 상황에 웃음이 난다면 미친 걸까. 승오는 허… 헛웃음을 짓고선 송출 버튼을 눌러 대답했다.
“살아있어요. 의진이도 무사하고요.”
─다행이네. 24시간 뒤 극을 시작한다.
정부 요원들의 암호였다. 극을 시작한다는 건 공격을 의미했다. 작전 조율이 마무리되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 듯했다. 그전까지 천음과 도훈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승오와 의진이 시선을 마주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끊을게. 조심해. 무조건.
길게 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여울도, 승오도 알았기에 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신호 꺼진 리시버를 내려다본 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도망보다는, 우리가 저들을 안심시키는 편이 나을 거 같아.”
“우리? 너는 그냥 여기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야, 주승오.”
의진이 승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내가 말했지. 나도 너 지키고 싶다고.”
“……의진아.”
“네가 알아서 하겠다느니, 나는 여기 있으라느니 그런 말… 하지 마. 속상해. 걱정돼. 나는 다쳐도 같이 다치는 게 나아. 여기서 너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 음절 한 음절 꾹꾹 누르며 말하던 의진은 한 번 승오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 두고 가지 마, 승오야.”
의진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이 튀어 나왔다. 그게 더 의진을 힘들게 하는 걸 알면서도. 승오는 말을 마치고 우물대는 의진을 와락 안았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승오야.”
“나는 네가 다치는 게 내가 어떻게 되는 것보다 싫으니까. 자꾸 그런 말이 나와.”
“…….”
“내 목숨보다 소중한 것도 사실이고.”
“너 자꾸 그런 말 좀…!”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에 감격할 시간은 이곳에선 너무나 부족했다. 의진의 뒤통수를 끌어안은 승오가 주문을 외우듯 빠르게, 그러나 의진이 곱씹을 수 있을 만큼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너는 나를 지켜줘. 나는 너를 지킬 테니까. 그리고, 여기서 나가면 꼭 바다로 여행 가자. 꼭.”
승오의 말에 의진이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틀. 이틀이 지나면, 어떤 결말이든 막은 내려졌다. 그 결말 속에서 웃음 짓기 위해 서로를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