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도훈은 더욱더 연구에 매달리고 있었다. 천음을 위해 한 치의 오류도 없는 물질화 에너지를 완성 시킬 것. 그것만이 천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하게.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런 압박은 도훈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다만, 감정에 휩쓸려 천음에게 의진을 향한 마음을 고백한 후 천음의 태도가 저를 후회하게 했다. 연구 보고를 직접 듣지도 않을뿐더러 동행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천음님은.”
“아침 식사를 마치신 후 경기장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도훈님.”
오늘 새벽 자 연구 자료를 방역원에게 넘기며 도훈이 뻐근한 미간을 문질렀다. 방역원은 한 차례 눈치를 보고선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천음님의 일정 브리핑을 금하라는 명령이십니다.”
“…….”
“앞으로 며칠 간은… 조용히 움직이고 싶으시다고….”
도훈의 호박색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평정심을 되찾은 그가 방역원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침울한 마음을 다른 이에게 들켜서는 안 됐다. 아랫사람에겐 더더욱.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 도훈은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공허한 연구실을 둘러보던 도훈은 어느새 길게 자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은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흩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하기만 한 공간. 가끔 연구 중에 찾아와주던 천음이 없으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버림… 받은 겁니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나의 세상이던 천음에게 용서받지 못할 행악을 저질러서, 결국엔 세상 밖으로 버려진 것이다.
의진을 가둬둔 곳에 승오도 함께 있다는 말도 누군가를 통해 들었다. 천음은 무슨 생각일까.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던 그를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불시착 인생인 거다.
“…….”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었다. 천음이 경기장에 있다는 건 제가 살릴 에스퍼가 존재한다는 것과 같았다. 실험 준비에 돌입한 도훈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대전에서 죽은 에스퍼들을 제외하고 회복이 필요한 에스퍼는 총 열 명이었다. 죽어가는 에스퍼들만 연달아 실험실로 들이닥칠 뿐 천음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최종 제작에 점점 가까워지는 물질화 에너지를 기절한 에스퍼의 턱을 벌려 삼키도록 했다. 체내 흡수가 원활히 작용하도록 캡슐 형태로 만든 첫 번째 결과물이었다.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것을 확인한 즉시 회복 수치를 살피기 위해 피가 번진 손가락에 핑거팁을 꽂았다.
“…제발.”
여기까지 오면서 제발이란 말을 해본 적이 있던가. 일자 그래프가 점점 들썩거리며 꺾은선을 그려갔다. 모든 기능이 빠른 속도로 정상 범주에 들어서고 있었다. 실험은 가히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도훈은 굳은 얼굴을 조금이나마 풀고 꼼꼼하게 연구 일지를 작성했다. 천음의 동결된 마음을 녹일 수 있도록. 물론 실험과 개인적인 감정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도, 이것으로나마 제게 다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평소 정갈하던 글씨체와 달리 써 내려가는 글씨는 작은 요동이 쳤다.
*
승오와 의진은 ‘도시’로 온 이래 처음 서로의 온기에 기대 잠깐이나마 눈을 붙였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은 승오에게 꼭 붙어 그를 끌어안은 채 쪽잠을 자던 의진이 낯선 인기척에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 전에 맡아본 적 있는 공간의 냄새였다. 비 인류적인 경기장. 의진은 제 앞을 가로막은 승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
“천음님의 명령이다. 손 떼!”
“의진아, 괜찮아. 놔줘.”
“안 돼, 승오야….”
또 승오를 말도 안 되는 곳에 데려가 고통스럽게 할 것이 분명했다. 의진은 고개를 크게 저으며 허리에 감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어떻게 만난 건데.
“의진아.”
방역원들이 어쩔 수 없단 듯 곤봉을 꺼내 들자 승오가 낮게 말했다. 여기서 몸싸움을 했다간 다치는 건 의진이었다. 의진이 승오의 등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나 잠깐 갔다 올게.”
“다치면 어떡해….”
“네가 가이딩 해주면 되잖아.”
안심시키려는 말이 분명한데도 속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지, 승오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빼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허리에서 마른 팔이 스르륵 떨어지자 방역원들은 곧바로 승오를 끌고 방을 나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끌리는 대로 걷던 승오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의진을 바라봤다.
“어서 와.”
천음이 경기장 필드에 서 있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승오는 손목이 묶은 그대로 천음을 마주 봤다. 어제의 그 불쾌함이 아직 남아있어 얼굴을 마주 보기가 거북했다.
“오늘 네 상대는, 바로 나야.”
자줏빛 정장을 입은 천음이 승오를 보고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정신계 에스퍼가 아니었나? 그딴 표정으로 날 파악하려 들지 말고, 직접. 내 머릿속을 헤집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하, 이게 무슨…!”
승오에게 다가온 천음이 그의 손목에 묶인 가죽 수갑을 손톱으로 끊어냈다. 푸르딩딩한 멍 자국이 선연하게 남은 굵은 뼈대는 천음의 식욕을 돋우기에 적합했다. 아릿한 손목 감각을 되찾기 위해 승오가 한 발자국 멀어져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럼 내기를 하나 할까?”
“뭐?”
“네가 이기면 지의진을 풀어주도록 하지.”
일반인보다는 빠른 속도로 손목의 저릿함이 사라졌다. 의진을 풀어준다는 말에 손목을 바라보던 승오의 눈빛이 돌연 진지하게 변해갔다. 천음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승오의 어리석음에 푸흣, 웃음을 흘렸다.
“진심이냐?”
“물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천음은 여유 있는 자태를 줄곧 유지했다. 승오는 마른 체구의 천음을 바라보다가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날 이길 경우는 없겠지만.”
승오의 능력이 천음에게 닿기도 전에 시끄러운 이명이 장내를 울렸다. 정확히는 승오의 가느다란 고막이었다. 면역이 생겨 저번처럼 단숨에 무릎을 꿇진 않았다. 승오는 한쪽 눈을 찌푸리곤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최대한 정신을 집중시켰다.
끼이이이이익. 쇳덩이가 갈리는 소리 비슷하던 게 뚝 멎었다. 소리를 제어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천음은 흰 얼굴을 확 굳히고서 무서운 속도로 승오에게 달려들었다.
“네가 감히,”
소리와 마인드 컨트롤. 승패를 가르는 게 불분명할 정도로 비등한 능력인 건 확실했다. 뺨을 내리치려는 천음의 손목을 붙잡은 승오가 그에게 착시를 일으키려 정신을 조작하려 들었다.
천음이 잠시 머뭇거린 틈에 뒤로 빠져나온 승오는 얼얼하게 남아있는 통증을 털어냈다. 둘 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보니 경기 시간은 기존보다 길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같잖은 에스퍼 주제에.”
승오와 본격적으로 격돌하니 힘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천음은 그 점에서 분노했다. 저깟 에스퍼가 자신을 이기려 들다니. 고요한 어둠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으핫, 아… 그만… 으응!’
마치 누군가에게 겁탈당하는 듯한 의진의 교성. 승오는 그것이 천음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천음이 피식 웃음을 짓고선 의진의 교성에 자잘한 노이즈를 깔았다.
“저게 내가 만들어낸 허구일까? 네가 지금 여기서 나와 쇼를 벌이고 있는 동안 지의진이 감내하고 있을 고통은 아닐까?”
“닥쳐!”
스, 승오야…. 읏, 응! 아흑, 그만! 아…!! 승오의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점차 진동했다. 천음과 달리 승오는 아주 강력하고 확실한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의진의 고통에 찬 신음에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저 모습을 보라. 천음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윽!”
단숨에 승오의 목을 조르고 눕힌 천음은 계속해서 의진의 쾌락으로 가는 신음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정사는 숱하게 들어왔으니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쯤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헉, 헉, 헉…. 의진의 신음이 끊어질수록 승오의 얼굴이 새빨갛게 질려갔다.
“크읏, 너 이 새끼….”
“죽지 않을 정도로만 괴롭혀주지.”
살려줘, 승오야…. 아읏, 나 좀 살려줘! 악에 받친 의진의 목소리에 승오의 눈가에 피눈물이 고였다. 천음은 자신의 승리를 짐작했다. 기도를 조르는 손끝에 더욱 힘을 주고 귓구멍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보니 머릿속 희열이 번들거렸다.
“너는 그게 문제야.”
“긋, 크아악…!”
“지의진이 존재하는 이상,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천음의 손목을 붙잡은 승오가 숨을 헐떡이며 능력을 발휘했다. 무력화였다. 두 개의 거센 능력이 충돌한 탓에 맞붙어있던 두 사람이 화악 멀어졌다.
“큭, 큽…! 하아….”
막혀있던 숨을 들이쉬자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허리를 세우고 쿨럭, 쿨럭 마른기침을 연달아 뱉어내니 침 섞인 피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때 승오의 머리채가 뜯겨나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개새끼가!”
짜악, 울리는 커다란 마찰음에 승오의 고개가 돌아갔다.
“고작 병신 같은 가이드한테 박아대는 주제에…”
짜악! 짜악! 천음의 손이 매섭게 몰아쳤다. 끔찍하리만큼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한쪽 뺨의 감각이 점차 둔해지기 시작할 때쯤, 승오는 오른쪽 귀가 물을 먹은 것처럼 멍멍해졌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가뜩이나 의진이 덕분에 나은 고막이 다시금 제 기능을 잃었다.
승오의 잘생긴 얼굴이 잔뜩 부어오른 피멍과 터진 실핏줄로 형편없이 망가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오는 천음을 올려다보고선 실소를 터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뭐라고?”
늘 기고만장했던 품격있는 얼굴이 무너지는 모습은 생각보다 구렸다. 승오는 입안에 가득 찬 핏물을 뱉어내곤 천음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아주 큰 약점이 있는 것 같은데.”
“……건방진 새끼. 네가 뭔데 그딴 말을 하는 거지?”
승오가 고개를 돌려 관중석을 바라봤다. 그곳엔 굳은 얼굴의 도훈이 서 있었다. 악에 받친 천음을 처음 보는 듯한 도훈은 입을 꾹 다문 채 필드를 내려다봤다.
“쟤가 네 약점 아닌가?”
“…….”
승오의 머리를 확 던지듯이 놓은 천음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 나갔다. 승부는 무승부. 의진을 구하지도, 그렇다고 살리지도 못한 모호한 결과였다.
도훈은 천음이 사라지자 곧바로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숨을 고르던 승오 뒤로도 방역원 두 명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