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긴박한 무전이 끝나자마자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도훈이었다.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이는 차디찬 얼굴이 승오를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승오의 전신을 훑듯이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졌다.
의진에게 승오의 상태를 알리고 오던 참이라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친 상태였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주승오의 이름을 외치던 의진.
‘도시’에 온 이후로 늘 저를 미워하던 그가 고맙다고 한 이유는 오로지 승오였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연인의 상태를 알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했다.
“…….”
승오를 통해야지만 자신을 향한 의진의 미움을 여과시킬 수 있었다. 이젠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 거다.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려서도 안 되는. 죽은 줄 알았던 마음이 의진과 승오를 보니 무덤을 파헤치고 되살아나 도훈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천음님은 매일 이곳을 방문하십니다. 이런 얕은 술수 정도야 그분이 아시는 건 시간문제예요.”
도훈은 헐렁하게 묶인 사슬을 그럴듯하게 조였다. 승오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주어진 걸 알면 아예 손목을 자르려 들지도 몰랐다.
“한 가지만 묻죠.”
손목을 봉하는 도훈을 보던 승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의 물꼬를 텄다. 도훈의 침식된 눈이 그를 바라봤다.
“의진이,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뭘 하게 되는 겁니까.”
굳게 다물린 얇은 입술은 벌어지지 않고 승오를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약하게 조절된 조명 덕분에 승오는 도훈을 올려다보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아 줄곧 자세를 유지했다.
“물질화 에너지가 만들어진 거면, 의진이는 굳이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주승오는 자기가 꼴리는 대로 말을 줄였다가 늘려댔다. 이런 성정이 좋았던 걸까. 질문을 질문으로 듣지 않고 나와 다른 면모를 뒤지게 되는 도훈이었다. 승오의 깊은 눈 아래 도톰한 살이 살짝 떨려왔다.
“저는 그저 천음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놈의 천음….”
승오가 신경질적으로 의자 등에 기대어 읊조렸다. 천음을 폄하하는 말에 하얀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으나 옹호의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쇠 냄새가 밴 손끝끼리 살며시 문지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당신도 이곳에 순응하며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럼 혹시 모르죠. 의진 씨를 만나게 해주실지도.”
“…김도훈 씨. 정말 이러고 사는 게 행복해요?”
악의가 없다, 는 말로 정의 짓기엔 도훈의 곪은 마음을 정확히 내리찍어버렸다. 도훈은 천천히 승오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오른발을 먼저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와의 싸움에서 전패한 정부가 당신들을 구하러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진 매일 내 연구를 확인할 실험체가 될 거예요.”
“…….”
“그게 천음님이 당신을 죽이지 않고 데려온 목적입니다.”
쾅. 실험관 문이 닫히고 도훈은 한편에 마련된 연구실로 곧장 들어갔다.
“생각보다 더 답답한 놈이네.”
승오는 도훈이 걸은 발자취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다가 천장을 바라봤다. 노르스름한 빛을 겨우 내뿜고 있는 필라멘트 조명들. 바닥을 지켜보는 감기지 않는 눈 같기도 했다.
이곳에서 의진이가…. 승오가 팔을 당기며 주먹을 쥐자 손목과 의자 팔걸이에 같이 묶인 사슬이 마찰했다.
찰그랑. 도훈에게도 연구실 밖의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던 도훈은 격심한 갈증을 느꼈다.
“내가 행복하냐고?”
행복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의 하늘, 나의 대지, 나의 숨. 천음이 행복하면 저도 그런 것이다. 그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었다. 그런 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도훈은 셔츠 목을 조이고 있는 넥타이를 잡아 내렸다.
숨통이 트였지만 트이지 않았다. 기도를 막은 번만은 더욱 크기를 키워 도훈의 수명을 갉아먹었다.
“하아….”
메말라버린 눈물샘이 아릿했다. 왜 이런 패배감을 느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훈은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골몰하던 몸을 일으켰다.
저의 은공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승오 앞을 지나 연구실을 나간 발걸음은 지극히 단정했다. 발걸음 하나하나 각이 잡혀 있었고 걸음을 걷는 몸은 꼿꼿하기 그지없었다. 길쭉하게 뻗은 다리는 일정한 보폭으로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천음님.”
도훈이 도착한 곳은 천음의 방이었다. 하루하루 도훈이 살아가는 이유를 잉태하는 곳. 도훈의 전부. 천음은 업무를 보던 손을 멈추고 도훈을 올려다봤다.
“무슨 일로?”
“천음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리를 한쪽으로 꼰 채 도훈이 매일 전달하는 연구 일지를 내려놓은 천음이 미소를 지었다. 도훈은 언제나 저를 필요로 했으므로 그다지 생소한 부탁은 아니었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내면에 득실거릴 외로움, 열등감, 번뇌 같은 것이 제게로 안겨 올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는 거였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죠? 도훈 닥터의 부탁이면 뭐든지요.”
아마도 도훈은 의진과 승오를 맞닥뜨리고 나서 또다시 평범한 애정이 그리워진 모양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음은 도훈의 세상이었으니까. 그의 하늘과 대지와 산소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게 가능했다.
“천음님을, 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뺨에 입을 맞추고, 살결을 만지고, 환락의 구렁텅이 같은 다리 사이에 제 영혼을 밀어 넣고 싶어요. 도훈의 얇은 입술은 그렇게 말했다.
감정은 만질수록 모양을 잃는 법이었다. 도훈은 처음 의진을 만나는 순간부터 세포 같은 감정을 조물거렸다. 그러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그러니, 내가 필요할 수밖에.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을 쉴 틈 없이 만져댔으니 어려울 수밖에. 지워지지 않을 수밖에.
“이것 참. 그 애송이가 대체 뭐라고.”
당장이라도 내려가 지의진의 흰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감히 저까짓게 도훈을 오래도록 괴롭히는 게 괘씸했다.
“김도훈.”
천음의 수려한 목소리가 도훈의 멱살을 쥐었다. 도훈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천음을 바라봤다.
“지의진을 사랑하나?”
“…….”
셔츠 깃이 벌어지고, 넥타이가 겨우 매달려있는 도훈은 나사 빠진 로봇과도 같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천음의 질문에 천천히 그가 무릎을 꿇었다.
“주승오를 죽이고 그 곁을 차지하고 싶나?”
“…저는,”
바싹 말라 소실된 줄 알았던 눈물샘이 제 기능을 발휘했다. 온몸이 고장 나버린 탓이다. 천음은 도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래, 너는.”
뜨거운 눈물에 젖은 긴 속눈썹이 너울거렸다. 그저 호박색 눈동자를 담은 것이 축축해졌을 뿐인데 천음의 속은 심해로 빠져들었다.
“애정합니다.”
“…….”
“지의진을.”
애정. 애정은 사랑과 달랐다. 소리를 낼 때 혀의 위치, 입의 모양 모든 게 다른 말이었다. 전에 도훈이 말했던 동정과 비슷했다. 애정, 동정. 천음은 여상한 얼굴로 무릎 꿇은 도훈을 살폈다.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지의진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여기가… 미친 듯이. 밤이고 낮이고 이곳을 들쑤셔대서, 숨을 쉬기가 곤란합니다.”
도훈의 이런 절규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올바른 수하로서 명분을 다해왔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반짝이는 얼굴처럼 모든 게 완벽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망가지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군요.”
천음은 차분히 무릎을 꿇고 눈물 젖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서글픈 얼굴을 마음껏 만지고 축축한 뺨에 입을 맞췄다.
“내가 졌어요. 지의진을 향한 당신의 마음. 내 뜻대로 지워내기엔 너무나 짙은 듯해요.”
“천음님….”
“지의진을 품는 걸 허락하죠.”
천음은 팔을 뻗어 도훈의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뜨끈한 열감이 목덜미와 가슴을 타고 심장에 도달했다. 가느다란 흰 손가락은 머리카락 사이를 유영하듯 쥐어 잡았다.
“주승오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내게 욕정하던 것처럼, 지의진을 안는 거예요. 어때요?”
“…….”
“관객이 있으면 더 발정하는 법. 이 가슴 속에 있는 열병이 얼른 낫기를 바라요.”
머리카락을 끌어안던 손은 목덜미와 어깨, 빗장뼈를 지나 가슴을 쓰다듬었다. 도훈은 바닥에 구부려져 있던 손을 올려 천음의 허리를 감쌌다.
“당신의 실험이 끝나면 주승오는 가장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게 좋겠네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난도질을 한다든가, 폭주하는 에스퍼들의 샌드백으로 던져버린다든가.”
“…천음님.”
“이 정도면 괜찮겠어요? 지의진을 향한 그 아픈 애정이 조금 나아지겠어요?”
내 사랑이 이렇게 갸륵하답니다. 당신이 나만을 사랑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요. 천음은 마지막 말을 도훈의 귓속 깊숙이 퍼뜨렸다.
천음의 푸른 빛 도는 하얀 시트에 두 개의 살덩이가 엉켰다. 도훈은 그 고백 이후 천음님, 을 뺀 모든 말을 속으로 삼키고 삼켰다. 꽃술 냄새가 사근히 퍼지는 살에 입술을 묻고, 빨간 젖꽃판을 마음껏 빨고, 함빡 젖은 아랫구멍을 탐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응! 아! 더, 더 깊이…! 흐읏!”
질척한 접합부에선 희뿌연 정액이 꿀렁꿀렁 새어 나왔다. 검붉은 좆이 그것을 뒤집어쓴 채 마구잡이로 천음의 안을 헤집었다. 내벽이 잔뜩 조이며 절륜할 때 천음의 얇은 종아리가 도훈을 휘감았다.
“천음, 님, 하아….”
“우읏, 응, 아, 아아…!! 으흥! 응!”
찰박, 찰박. 탄력있는 볼기에 도훈의 고환이 빠른 속도로 짓뭉개지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잔뜩 벌어진 빨간 구멍이 좆을 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 자은, 응! 잔뜩, 으흐, 응! 아! 싸줘요, 내 안… 아흐응!!”
“하아, 하아….”
벗어날 수 없는 질펀한 섹스가 계속 됐다. 도훈의 뜨거운 눈시울이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천음을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