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경기는 처음이었다. 원래 천음이 관전하는 자리에선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야 경기는 막을 내리기 일쑤였다. 여러 군데가 찢기고, 다친 승오가 돌아온 곳은 여전히 그 실험실이었다.
완전한 캡슐 제조를 위해 연구에 몰두하던 도훈이 밖을 나왔다. 승오를 치료하는 건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밖에서 대기해.”
방역원을 실험실 밖으로 물린 도훈은 가운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사슬 구멍에 맞춰 열쇠를 돌리자 꽉 조여있던 사슬이 바닥으로 찰그랑대며 낙하했다. 승오는 살갗에 쓸려 엉망인 손목에도 눈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당신보다 낮은 등급의 상대였으니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풀어주는 거지?”
부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에스퍼였기 때문에 가이딩만 받으면 모든 상처가 완벽하게 나을 터였다. 의료용 가위로 너덜거리는 전투복 팔 부분을 잘라 제거한 도훈이 승오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였다.
“단순한 치료 명목입니다만.”
따뜻한 물주머니를 채워 넣은 도훈이 동상 부위에 그것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승오의 짙은 눈썹이 구겨졌다.
“이깟 상처로 에너지를 남용할 수 없어서요. 오늘 치료는 가이딩 없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승오는 차분한 낯의 도훈을 아니꼽게 올려다봤다. 도통 생각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천음의 충실한 부하이면서도 의진을 지키고 싶어 했다. 지금도, 승오에게 불필요한 자유를 제공한 셈이었다.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무엇을요.”
“정말 천음과 뜻이 같은 건가?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거냐고.”
도훈은 입을 더욱 다물었다. 회복력이 빠른 편이라 조금만 조처를 해주니 금방 아물어가는 것도 같았다. 숨 막히는 적요가 이어졌다. 승오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물주머니가 아주 뒤늦게 물러났다.
“글쎄요.”
“……?”
“저는 그저 천음님을 도울 뿐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목표까지 도달하실 수 있도록, 제 모든 것을 걸고.”
모호한 답이었다. 승오가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 곱씹기도 전, 치료를 마친 도훈은 트롤리를 저만치 밀어 보냈다. 평평한 바닥을 구르던 트롤리는 그가 목표한 데에 다다르자 천천히 속도를 멈췄다.
“왜 천음을 돕는 거지? 천음에게 맹목적인 이유가 뭐야.”
승오의 경험과 가치관,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도훈의 행동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것도 아니며, 천성이 폭력적이지도 않은 이가 왜 천음을 숭배하는지. 저 냉골 같은 얼굴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도훈을 뜯어보는 승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왜 그 이유를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치료는 끝났어요.”
“그래야, ‘도시’가 사라지고 모든 죗값을 치르게 되는 그날 네가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
우스운 말이었다. 도훈은 천음을 두고 혼자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슬쩍 입꼬리를 올린 그는 떨어진 사슬을 주워 승오의 손목에 감았다. 전보다 느슨한 힘이었으나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천음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요.”
“……하,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군.”
“그 누구도 숨을 쉬는 한 자신이 태어난 세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만 자리로 돌아가세요. 천음님이 돌아오실 시간이니. 도훈과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조금만 힘을 줘도 움직일 수 있는 사슬을 손목에 감고, 승오는 실험관으로 들어왔다.
“…….”
의진이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한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승오는 얼른 실험실이 잠잠해지기를 바랐다.
경기장에서 끌려 나온 의진은 머리가 띵했다. 우느라 홧홧해진 얼굴이 살이 에일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맞은 탓이었다. 터덜터덜 철창으로 돌아와 무릎을 끌어안은 그는 자꾸만 샘솟는 눈물을 지우려 무릎에 눈가를 벅벅 비볐다.
“승오야….”
분명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닿지 못하는 슬픔이 컸다. 시체 같은 에스퍼를 앞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도. 그냥 모든 게 다 슬픔을 종용하는 것만 같다. 어둑한 실내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끼익, 문이 열리며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승오야?”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불러보고 싶은 이름. 의진은 아릿한 발목을 애써 세워 앞으로 걸어가 보았다.
“…….”
김도훈…. 아슬한 빛줄기에도 알 수 있었다. 철창대를 잡은 손이 미끄러져 툭 허벅지 주위를 나돌았다.
“주승오는 방금 치료를 마치고 회복 중입니다. 2도에 근접한 1도 동상과 대전 때 생긴 가벼운 마찰상이 전부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그거 말해주려고 온 거예요?”
의진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했다. 도훈은 가만히 그림자 진 의진을 바라보다가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딴 거 필요 없다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에 없던 말에 도훈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의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승오 상태 말해줘서요. 그건, 고마워요.”
“…….”
“걱정 많이 했는데.”
생각 회로에 서슬 퍼런 냉수라도 들이부었는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날카롭게 쏘아대는 말보다 오히려 예전을 상기시키는 축 늘어진 말투가 도훈의 마음에 뿌리내린 죄책감을 활개 치게 했다. 의진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앞쪽에 서서 승오를 기다리던 그가 벽 쪽으로 향한 것이다.
“승오를 보게 해주는 건 무리겠죠?”
“…네.”
“그럼 이렇게라도 가끔 알려주면 좋겠어요.”
이번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움직이며 내는 소음으로 뜻을 파악한 의진이 다시 몸을 옹송그렸다. 정면을 바라본 도훈이 말했다.
“미안해요.”
“…….”
의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목소리를 뱉어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에, 도훈이 뒤를 돌아 나갔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그의 사과만 철창 근처에 소복이 쌓여갔다.
*
도훈이 밖을 나가고, 승오가 있는 실험실엔 승오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간은 이때뿐이다. 빠른 몸짓으로 사슬을 푼 승오는 허리춤에 숨긴 리시버를 꺼내 설정된 주파수를 확인하고 무전 버튼을 눌렀다.
“Number 601. 601. 응답 바람.”
치치칙. 치칙. ‘도시’ 안에 방해 주파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된 전달이 어려웠다. 승오는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또 한 번 연결을 시도했다.
“여울 선생님!”
3초의 정적 끝에 삑, 소리와 함께 여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오야?
하아. 승오는 출입문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긴장감에 등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와 의진이 모두 ‘도시’에 있어요. 잡혀 왔어요. 리시버는 다행히 빼앗기지 않아서, 이렇게 연락드리는 거예요.”
─그게 사실이야? 괜찮은 거야?
“네. 선생님, 지금 시간이 없어서. 센터 상황은 어때요?”
금방이라도 천음이나 도훈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아슬함에 모든 게 조급했다. 처음 연결만 어려웠을 뿐 바로바로 무전이 들려 그나마 다행이었다.
─팀장님한테 납치 상황 보고했고,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나 봐. 전국 군대를 소집해 들어갈 거야. 지금 각 센터장들이랑 회의 중이고.
“시간은,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봐야 알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승오는 황급히 무전을 끊고 리시버를 허리춤에 숨겼다. 급박한 와중에도 행동은 빈틈이 없어야 했다. 사방이 적뿐인 이곳에서 리시버는 센터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갈무리를 마친 승오가 헐렁한 사슬에 손목을 밀어 넣고 문 쪽을 바라봤다.
*
“주승오!”
갑자기 툭 끊긴 무전에 여울은 송출 버튼을 꾹꾹 눌러 승오를 불렀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승오가 붙잡힐 거란 시나리오는 예상에 전혀 없었기에 여울의 목덜미가 사뭇 뻣뻣해졌다.
“선생님 뭐예요?”
여울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태준이 다가왔다. EGI 전체가 ‘도시’와 천음 소탕에 가담하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훈련 일정은 중단된 상태였다. 천음의 특징을 알고 있는 여울과 태준, 지환 같은 경우는 작전의 주축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승오도 ‘도시’로 끌려간 거 같아.”
불 꺼진 리시버를 내려다본 여울이 태준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태준의 눈이 커다래지자 즉시 여울의 손이 어깨에 얹어졌다.
“아직 소란은 피우지 말자.”
“승오가 더 말한 건 없어요? 무사는 한 거예요?”
하아. 여울은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올리곤 업무를 처리하던 지환을 불렀다. 그리고서 무전이 끊기기 전, 승오가 했던 말을 아주 은밀하게 전달해주었다.
“물질화 에너지를 성공시킨 모양이야. 가이드 없이도 ‘도시’ 에스퍼들은 체력 회복을 할 수 있어.”
“그게 그렇게 쉽게….”
지환도, 여울도 태준의 의문점에 공감하는 바였다. 아무리 도훈이 날고 기는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단번에 물질화를 성공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울은 각자 분주한 요원들과 직원들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어차피 이점을 이용해 ‘도시’에게서 승기를 뺏어와야 하지만, 지금은 미완성된 정보이므로 셋만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부작용이 있는 것 같대.”
승오는 여울과 무전이 끊기기 바로 직전, 가장 중요한 말을 남기고 리시버를 숨겼다. 경기장에서 빙결 에스퍼와 싸움, 혹은 대전, 혹은 경기라는 것을 치르면서 느낀 점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뭔데?
‘부작용 일부일 수도 있는데, 폭주에 가까워질수록 능력 컨트롤이 현저히 저하돼요.’
─…알았어. 참고할게.
지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