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여울이 조달해준 군용차는 햇볕 쨍쨍한 벌판을 가로지르고, 양옆으로 숲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좁다란 길을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중간중간 차가 다니지 못하는 곳을 피해 돌아가느라 하루 가까이 걸리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승오가 몸을 덜컹거렸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운전하던 그는 불과 몇 달 전에도 보았던 풍경에 ‘도시’가 가까워짐을 실감했다. 조그맣게 유찬이 살던 마을이 보였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곳. 황폐해진 컨테이너 조각조각에 잠시 시선을 뒀던 승오가 정면을 바라봤다.
의진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절대 가고 싶지 않을 곳에 또 발을 들인 기분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울 것이다. 의진을 생각하니 핸들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줘.”
컨테이너 마을을 지나면 금방 ‘도시’에 도착할 터였다. 엑셀에 올린 발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군용차는 바퀴를 더욱 구르며 승오가 원하는 곳으로 도달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조금 저문 시간이었다. 주황빛 노을이 만물에 색을 입힐 무렵, 승오의 신경이 곤두섰다.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승오는 천천히 차의 속도를 늦췄다.
“…….”
섣불리 차 밖을 나갈 순 없었다. 잠시 차를 세운 승오는 고요하기만 한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서 주변에 머릿속을 파고들 인물이 있는지 간파해갔다.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려 들 때 가장 처음 느낄 수 있는 건 진입 시 감각이었다. 정신을 잡아채는 듯한 느낌. 그것이 신경으로 전달되기 전, 능력이 튕겨 나왔다. 적이 근처에 있었다.
콰앙!
승오가 적이 있다는 걸 느끼자마자 차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덩치 큰 차가 뒤집힐 법한 충격이었다.
“크윽…!”
전복된 차에서 겨우 빠져나온 승오의 앞에 다수의 ‘도시’ 에스퍼가 나타났다. 역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전투 자세를 취한 승오는 빠르게 머릿수를 세었다.
열 명. 아니, 그것보다 더 될 수도. ‘도시’ 은거지 근처로 유인했을 때와 달리 방어가 본격적이었다.
“정부 에스퍼를 생포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
중앙에 서 있던 에스퍼가 우렁차게 본인들의 목적을 외쳤다. 승오는 총집을 열어 권총을 꺼내 들고서 장전했다.
“누구 마음대로.”
“천음님의 명령이시다.”
돌격! 외침과 함께 승오가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가까이 다가오던 에스퍼 세 명이 즉각 관절을 늘어뜨리며 쓰러졌다.
다른 에스퍼를 향해 쏘려던 총이 탕! 하늘을 쐈다. 승오는 이곳에 웨폰 마스터가 있음을 감지했다. 모든 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탕! 승오의 의지 없이 총탄은 하늘에 세 발을 발사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씹,”
“천음님을 해한 벌을 받아라.”
바인드 능력의 에스퍼가 승오의 손목을 교차해 묶었다. 손을 쓸 수 없게 된 승오는 털썩 무릎을 꿇고서 폭발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바인드 에스퍼를 수색했다. 빠른 집중력이 필요했다. 뿌옇기만 했던 시야에 한 사람의 인영이 스치듯 보였다. 저거다.
승오가 능력을 사용해 바인드 에스퍼의 능력을 무력화시켰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팔이 나타나 그의 목을 졸랐다.
“아윽!”
“반항은 시간만 늦출 뿐이야.”
목이 졸린 채로 제게 떨어지는 번개를 피한 승오는 결박한 에스퍼를 잡아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크헉! 허리뼈가 부러진 에스퍼가 단말마 비명을 지르자 쉴 새 없이 공격이 몰아쳤다.
“하아….”
한 번에 남은 에스퍼 전부를 무력화시킨 승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건전지 빠진 로봇처럼 전부 동공이 풀어진 채 쓰러졌다. 더 상대할 인원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앞 범퍼가 아예 날아간 차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으니 걸어서 가도 될 것 같았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승오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발걸음을 뗐다.
“역시 S급 에스퍼다운 실력이네.”
어느새 나타난 천음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승오는 이를 악물었다.
“이 새끼….”
승오가 먼저 능력을 사용하려 했으나 천음이 빨랐다. 삐이이익. 고통스러운 이명이 들리자 저절로 무릎이 꿇어졌다. 방금 상대했던 하급 에스퍼와 차원이 다른 실력이었다.
“그러니까 고분고분 따라왔으면 귀가 터질 일은 없었을 건데. 멍청한 것도 여전해.”
천음은 쓰러진 바인드 에스퍼 입에 캡슐화한 물질화 에너지를 집어넣었다. 턱을 다물어 삼키게 하고선 승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 나한테 싹싹 빌 만큼 괴롭지 않아?”
“크으윽… 닥… 쳐.”
유약한 고막이 찢기고도 남을 아픔이었다. 핏줄이 터져 붉은 눈을 하고선 자신을 노려보는 승오의 객기는 실로 찬사를 보낼 만했다.
물질화 에너지로 회복된 바인드 에스퍼가 승오의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고정했다. 순식간에 갓 잡아 올린 고깃덩이로 전락한 그를 천음은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이제야 예뻐 보이네.”
“하아… 크윽!”
귀를 파고든 통증은 몸 전체를 지배했다. 승오의 귀에선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려지는 시야를 꺼트리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천음이 손을 뻗음과 동시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데리고 와.”
“네, 천음님!”
천음 뒤에 있던 다른 에스퍼들이 일제히 쓰러진 승오에게로 달려갔다. 천음은 그 모습을 보고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의진이 감금되어있는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의진은 확 머리를 들었다. 철창 밖으로 입과 손, 발이 묶인 승오가 정신은 잃고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승오야!”
“조용히 해!”
놀란 마음에 의진은 바로 앞까지 달려가 승오를 불렀다. 검은 방역원은 곤봉을 철창에 휘두르며 조용히 할 것을 일렀지만 입이 다물어질 리 만무했다.
“승오야, 승오야! 정신 좀 차려봐, 승오야!”
의진의 힘에 철창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소란스러움 속에 눈을 감고 있던 승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의진은 엉망이 된 승오를 보고서 눈물을 쏟아냈다.
“어으, 어떡… 아…….”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난 천음 뒤로 도훈이 걸어 들어왔다. 아무리 S급 에스퍼라 할지라도 천음의 날카로운 음파 공격은 꽤 속을 망가트려 놨을 거였다. 죽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오열하는 의진을 비웃은 천음이 승오의 머리를 매끈한 구두로 살며시 짓눌렀다.
“하지 마!!”
“푸훗, 개새끼가 성을 내봤자 시끄럽기만 하지. 사랑하는 연인을 마주한 기분이 어때?”
“당장 승오를 놔줘….”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목소리는 나름 살벌했다. 천음이 옆에 선 도훈을 바라보더니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도훈은 곧바로 찢어진 승오의 전투복 팔 부분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안 돼…!!”
“왜, 주승오도 내게 복종할까 봐 겁나?”
“주입 완료했습니다.”
승오에게 투여한 건 소량의 물질화 에너지였다. 어느새 의진은 죄다 젖은 얼굴로 정신 잃은 승오만 바라봤다.
“원한다면 네 앞에서 주승오와 격렬한 섹스를 해줄 수도 있고.”
“……악마 같은 새끼.”
하얗게 질린 의진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훈은 분노에 찬 의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승오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늘 오만하게 굴던 이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쓰러져있는 게 이질적이었다. 그렇다고 동정심이 솟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물질화 에너지는 의진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약을 주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잠잠했던 승오에게서 반응이 보였다. 묶인 손가락을 꿈틀거리다가 곧 느리게 눈을 떴다.
“승오야!”
“의진, 윽.”
천음은 곧바로 승오의 머리를 눌렀다.
“능력을 사용했다간 이 자리에서 지의진을 죽여버릴 줄 알아.”
머리를 압박당한 승오가 숨을 크게 쉬며 의진을 바라봤다. 정말 우습게도 이 와중에 의진의 안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승오의 눈은 줄곧 의진에게 향해 있었다.
“앞으로 주승오는 우리의 실험에 적극적으로 응한다.”
“…….”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 연인을 먼저 하늘로 보내게 될걸? 그걸 원하나?”
핏자국이 굳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밟은 천음이 낮게 말했다. 승오는 주먹을 꽉 쥐고서 그저 의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승오야… 승오야….”
“데리고 가.”
발을 내린 천음이 방역원에게 지시했다. 곧바로 세 명의 방역원이 승오에게 달라붙었고, 특별한 저항 없이 방에서 빠져나갔다. 의진은 승오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내밀려 안간힘을 썼다.
“슈퍼맨인 줄 알았던 애인이 저렇게 보잘것없어지니까 조금 정이 떨어지지 않나 싶은데.”
“…….”
천음은 의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소를 지으며 조롱했다. 의진의 슬픈 눈빛이 온도를 바꿨다.
“그 입 다물어. 찢어버리고 싶으니까.”
“개미 새끼 제대로 죽이지 못 하는 일개 가이드 새끼가 자꾸 기어오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의진이 아무리 흔들어도 굳건했던 철창이 천음의 힘에 쉽게 구부러졌다. 그리고서 턱, 마른 목을 잡아채 기도를 조였다.
“크으윽…!”
“죽어. 결국에.”
“천음님.”
“그러니까 적당히 까불어.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니까.”
시퍼렇게 질려가는 의진의 얼굴에 도훈이 급히 천음을 불렀다. 천음은 도훈을 한 번 돌아보고선 어쩔 수 없단 듯 손에 준 힘을 빼주었다.
“커억, 하아…. 하…….”
켁, 쿨럭…. 의진은 숨을 몰아쉬고선 천음을 노려봤다.
“그 객기가 얼마나 갈지 궁금하네.”
차가운 시선으로 의진을 내려다본 천음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도훈도 바로 천음을 따라나섰다.
숨을 잘못 마셔 목이 따갑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이골이 났다. 천음이 조였던 목보다, 아주 잠깐 승오와 눈을 맞췄던 그 순간이 더 아팠다.
“으흑, 승오야…. 흐, 너무, 미안해….”
까맣게 소등된 공간에서 의진은 홀로 숨죽여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