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천음을 보살피는 건 전부 도훈의 몫이었다. 하다못해 분노를 잠재우는 것까지도. 예기치 못한 의진의 도발에 동요된 것이 도훈에겐 뻔히 보였다. 늘 빌빌거리기만 했던 다 죽어가는 개새끼가 입질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천음 입장에선 화가 날만도 했다.
“그깟 애송이의 말에 휘둘릴 거 없습니다, 천음님. 갇힌 자의 유일한 발악이라고 생각하세요.”
출혈이 잠시 멎었던 상처 부위가 다시 피를 뱉어내고 있었다. 도훈은 두른 붕대를 풀러 스테인리스 트레이에 두고선 집게로 솜을 알코올에 적셨다. 천음도 도훈 앞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게 답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아프시진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도시’를 세우고 나선 상처를 볼 일 없는 그였다. 다소 쓰라릴 텐데도 천음은 표정 변화 없이 도훈의 치료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 끝날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
상처를 꿰매는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봉합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었으나 상대는 천음이었으므로 단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벌어졌던 피부가 극진한 정성에 점차 다물어져 갔다.
“주승오를 그 자리에서 사살할 걸 그랬습니다.”
천음도, 도훈도 어차피 그곳에서 승오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가 목숨을 거둘 곳은 이곳이어야 했으니까. 그걸 아는데도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농을 던진 것이었다. 천음은 간지러운 숨이 피부 결을 지나치는 걸 느끼곤 굳었던 얼굴을 서서히 풀었다.
“하늘 같은 천음님께 상처를 입혔으니까요.”
“푸훗, 이까짓 상처는 어차피 당신이 금방 치료할 수 있는 거잖아요.”
빠른 손놀림 덕에 치료는 금방 마무리됐다. 도훈의 치유 능력을 사용한다면 천음의 말마따나 당장 상처를 지워낼 수도 있었다. 도훈은 봉합 부위에 살며시 입을 맞추곤 새 붕대를 꺼내 들었다.
“지의진을 다시 이곳에 들인 기분은 어때요?”
“…아무 생각도요.”
드레싱을 끝낸 도훈이 살짝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에 천음이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입술을 벌렸다.
“물질화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더 안정화할 수 있을까, 제겐 이제 이 고민뿐입니다.”
“정말 그 고민뿐인가요?”
치료 도구를 다 정리한 도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새 머리가 긴 천음의 까만 머리카락은 예쁘게 뻗친 빗장뼈까지 닿아 있었다. 왜 그게 시야에 걸린 지는 모르겠다.
살이 다 비치는 로브를 다시 걸친 천음이 도훈의 가운을 잡아끌었다.
“주제 파악 덜 된 멍청이들을 상대했더니 조금 피곤해요. 가운 벗고, 이리로.”
천음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도훈이었다. 당연히 거슬리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천음 곁으로 다가가 팔을 뻗었다. 너른 품에 안긴 천음이 아까와 다른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올렸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았군요. 우리의 유토피아가.”
“다 천음님 덕분입니다.”
가슴 근육으로 팽팽해진 셔츠를 뜯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천음은 몸을 돌려 목까지 굳게 잠긴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잠겨있던 단추가 톡 풀릴 때마다 도훈의 살갗이 드러났다.
“나는 당신과 영생을 누리고 싶어요. 이렇게…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가장 높은 곳에서, 밀어를 속삭이면서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이뤄지고 있기도 하고요.”
“키스해주세요, 내 입술에.”
도훈의 상체가 다 벗겨지자 천음은 두툼한 가슴을 주무르며 재촉했다. 당연히 천음밖에 모르는 입술은 그대로 천음을 덮쳤고 잇새를 갈랐다. 기다렸다는 듯 섞여오는 혓덩이가 유독 달아서 살살 문질러대던 손가락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후으으….”
얽혔던 혀가 떨어지자 도훈은 천음의 얇은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한 번 홉, 빨아 드렸다가도 입을 벌려 천음을 삼켰고 또 질척한 타액을 공유했다.
이토록 혀 돌기 하나하나의 점막을 건드리며 키스하는 건 처음이었다. 가슴을 쓸던 손이 넓은 등근을 쓸고, 탄탄한 엉덩이를 주물렀다. 흥분으로 이끄는 신경이 온통 혀로 쏠린 듯했다. 천음은 파르르 속눈썹을 떨다가 눈을 떴다.
“……츄웁.”
도훈의 오묘한 눈동자를 숨기고 있떤 눈꺼풀이 곧바로 들어 올려졌다. 천음의 볼을 감싸고서 키스를 하던 그가 빤히 시선을 마주한 채로 혀를 섞었다. 천음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힌 듯한 기분이 들어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을 떼어냈다.
“하아, 그거 알아요?”
“무엇을요?”
이마를 가렸던 머리를 걷고서 입을 맞춘 도훈이 다정하게 물었다.
“예전보다 모든 게 깊어졌어요. 눈빛, 손길, 입맞춤… 하다못해 섹스할 때 느껴지는 숨 조차요.”
“…천음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 탓입니다.”
“처음엔, 지의진을 보호하기 위한 회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자를 이곳에 데리고 와서부터 당신이 짙어졌으니까요.”
살짝 부어오른 도훈의 입술을 엄지로 매만지던 천음이 말했다. 도훈은 천음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멈추고 오롯이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당신을 시험하고, 의심하고, 미워했어요.”
“…….”
“왜 저 한낱 풋내나는 애송이한테 마음을 뺏겨버린 걸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천음은 심장을 품고 있는 가슴을 쓰다듬었다.
“제 예상을 틀린 적이 없으니 사실이었겠죠.”
“…천음님.”
“그러나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맞아요.”
열기를 머금은 입술이 도훈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잇자국을 내어 열꽃을 남기고 그가 달아오를 수 있게 아래를 맞붙였다. 이미 흉흉해진 것이 느껴졌으나 더 뜨겁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은 나를 택하게 된 거예요. 어쩔 수 없는 나의 사람이니까.”
“저는 천음님에게만 욕정합니다. 그리고, 천음님만을 사랑합니다.”
아, 저 붉고 탐스럽고 흉물스러운 성기가 안을 파고들 때의 희열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천음은 또렷하게 세워진 윤곽 끝을 누르듯이 문지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제게 길든 몸이니 당연히 그럴 거예요.”
“지의진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동정이었습니다.”
“동정이라.”
값비싼 벨트를 푸르고 버클을 내리니 프리컴을 쏟아낸 속옷이 젖은 채 천음을 반겼다. 음탕한 사람. 천음은 음모 하나 없는 매끈하고 딱딱한 성기를 밖으로 꺼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죽이지 못하고,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않겠어요?”
천음도 허리를 조이고 있던 바지를 벗었다. 애초에 속옷은 걸치고 있지 않아 그대로 발기한 것이 퉁 모습을 드러냈다.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하면, 그 위로 도훈이 겹쳐졌다.
“당신의 모든 걸 용서할게요.”
“천음님….”
“그러니까 다시는 지의진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 마세요.”
투명한 애액으로 범벅된 구멍에 귀두가 비벼졌다. 금방이라도 좆을 머금을 듯이 빠끔이던 구멍은 성기가 밀려들자 완전히 입을 벌렸다.
“흐읏!”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겐 그자는 망자에 불과합니다.”
“하아, 아, 응!”
그제야 천음이 샐쭉 웃어 보이며 도훈의 목에 팔을 감았다. 콱, 콱 처박히는 성기가 유독 거칠었다. 천음의 마른 배가 그의 욕정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
승오가 떠나고 몇 시간 후. EGI 서울 센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여울이 승오를 보내고 나서 제일 먼저 간 곳은 유찬이 있는 보호소였다. 가장 안쪽에 있는지라 본관 앞쪽에서 이루어졌던 전투에 크게 영향을 받진 않았다. 외관부터 확인한 그는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선생님!”
놀이방에서 보호소 직원에게 안겨 진정하고 있던 유찬은 여울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와락 안겼다. 큰 폭격과 전투 소리에 놀란 듯했다. 자그마한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여울이 유찬에게 속삭였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
“또 누가 잡혀간 거예요? 우리 누나랑 예전 마을 사람들처럼…?”
유찬에겐 쓰라린 기억이 있었다. 홀로 남겨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되풀이된 상황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여울은 제게 계속해서 안겨 오는 유찬을 가득 끌어안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가 지켜냈지. 모두들 무사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여긴 안전한 곳이야, 유찬아.”
여울의 다정한 말에 울먹거리던 유찬도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저 순수한 얼굴에 대고 의진이 납치되고, 또 승오가 구하러 갔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유찬아!”
태준도 유찬이 걱정되었던 건지 상황이 어느 정도 갈무리되자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여울의 품에 있던 유찬은 태준을 보고서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승오가,”
동그란 뒤통수를 마구 쓰다듬던 태준이 여울을 보고서 작게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여울은 인상을 찌푸리며 검지를 입에 가져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태준은 그 행동에서 모든 것을 파악했다.
유찬은 승오와 의진을 찾기도 전, 긴장이 풀렸는지 곧바로 잠이 들었다. 보호소 직원이 유찬을 안아 들어 방으로 들어가자 여울과 태준은 표정을 굳혔다.
“생각한 그대로야.”
“하, 또 주승오 혼자 갔어요?”
“그럼 걔가 가만히 앉아서 우리랑 의견 공유라도 할 줄 알았어?”
“미친 새끼.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줄 아나….”
어이가 없다는 듯 욕을 읊조린 태준이 허리에 손을 짚고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왜 이런 일이 승오와 의진에게만 벌어지는지 의아했고, 또 같은 방법을 택한 승오가 미련하기도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태준이 여울에게 물었다.
“정말 혼자 가게 해도 괜찮을까요?”
“위험하지. 팀장님한테 말해서, 아니. 일단은….”
머리가 복잡한 건 여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장 요원이 아니라 트레이너였다. 조금 더 면밀하게 일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래도 일단은.
“팀장님한테 보고한 뒤 상의해보는 게 좋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수 인원으론 이제 힘들 수 있어요.”
태준과 여울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