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92)화 (92/114)

#92

“이제 지의진에게 일말의 호의도 베풀어선 안 될 겁니다.”

정사를 마친 후 천음은 도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간드러진 속삭임에 도훈은 작게 전율하듯 눈을 감았다.

“지의진은 나를 죽였어요.”

빨간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그 속에 더한 붉음이 도훈의 숨을 틀어쥐는 것만 같았다. 발갛게 상기된 하얀 몸을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음은 도훈의 넓은 등에 죽죽 새겨진 손톱자국을 매만지고서 빙긋 웃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EGI의 몰락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파멸로 응집된 서울을 하루빨리 보고 싶었다.

*

그 시각 의진은 천음이 제 몸에서 사라진 것을 그제야 완전히 실감했다. 간혹 신경 쓰이던 자잘한 잡음도 들리지 않았고 답답한 가슴 통증도 없어졌다. 승오와 함께 검사실을 빠져나와 숙소로 가던 중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

“어, 좋아.”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갈까 했으나 오늘 하루는 그냥 쉬는 편이 나아 보였다. 여울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핑계로 사려졌던 코빈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강한 자극을 받은 터라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거라면서.

승오는 걷는 내내 의진의 손을 붙잡고 연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남아있는 수십 개의 과정 중 단 하나를 완료한 것뿐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의진이 좋아했으니까. 오래간만에 보는 저 꾸밈 없는 미소가 승오를 기쁘게 했다.

“그럼 나도 좋아.”

“앞으로가 무섭기는 해. 근데, 지금은 그냥 좋아하고 싶어.”

날이 밝아 내일이 당도하면 유찬에게도, 여울에게도, 코빈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곁에 있어 주는 승오에게도. 안에 숨 쉬는 천음을 핑계로 하지 못한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저 나 힘들다는 이야기만 하기 급급했다.

“그리고 너한테 미안하고 고마워.”

느릿하게 걷던 승오가 고개를 돌렸다. 의진은 살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겹쳐진 손을 바라보다가 손깍지를 꼈다.

“나한텐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어떻게 그래. 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

의진의 조곤한 진심이 승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언제부터 그가 이렇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됐더라. 자각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자 의진이 깍지낀 손마디를 옴싹이며 체온을 비벼댔다.

“……좀 어색해?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아니, 너무 좋아서 잠깐 생각이 멈춘 거뿐이야.”

“뭐야, 주승오….”

의진이 눈을 끔뻑이며 승오의 말을 곱씹다가 화끈거리는 뺨을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숙소 초입에 들어서자 위에 달린 센서 등이 불을 밝혔다.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에도 의진의 옅은 행복감이 보였다. 승오는 깍지 낀 손을 잡아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들어가자.”

“뭐 그렇게 급해? 천천히 가.”

계단을 오르던 의진이 조금 앞에 있는 승오를 바라봤다. 반절 정도 올라와 평평해진 바닥에서 승오는 주변을 살짝 돌아보곤 의진에게 입을 맞췄다. 쪼옥. 양감 다른 입술이 곧바로 떨어지며 귀여운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이거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천천히 가라고?”

“……!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빨리 가야지.”

뺨을 문질렀던 손이 이번엔 입술을 가렸다. 홧홧해진 얼굴로 커다란 눈을 굴리던 의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승오보다 먼저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누, 누군 안 하고 싶은 줄 알아.”

의진의 중얼거림에 승오가 팍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고개를 휙 돌리며 쏘아보는 눈빛이 꼭 예전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을 들게 했다. 승오는 의진을 뒤따라가며 주변을 감싸는 평온한 공기가 더는 깨지지 않기를 바랐다.

천음을 의진의 안에서 소멸시키고 나서 두 사람은 몸에 박힌 털이 삐쭉 설 만큼 짜릿한 섹스를 새벽녘까지 이어갔다. 전립선을 콰득 찌를 때마다 울부짖는 의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를 끊임없이 침범하고, 성기를 조여오는 조붓한 내벽에 스며들지 못할 흔적을 남기고…. 침대 시트가 체액과 정액, 땀으로 흥건해질 때까지 몸을 섞다가 의진이 잠듦과 동시에 정사는 끝이 났다.

승오는 매번 의진과의 섹스가 생경하게 느껴졌는데, 이번엔 그것보다 더 다른 차원의 감각이 깨어난 기분이었다. 의진의 부르튼 입술이 벌어지며 교성을 내지를 때 승오의 뇌에서도 폭죽이 터지곤 했다.

‘헉… 아… 아아!! 으흐읏…!’

의진의 얼굴에 흥분이 배가 된 것인지, 의진의 가이딩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제게 밀려든 것인지. 아직도 그 미세한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다. 승오는 곤히 잠든 의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불을 더 올려주며 그 옆에 몸을 뉘었다.

*

승오가 잠시나마 바랐던 바람은 역시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침 해가 밝기 무섭게 센터는 에스퍼 요원들을 집합시켰다. 금일 새벽 4시 44분경부터 센터를 향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 보고됐던 거와 달리 점차 가까워지는 움직임은 규모를 계속해서 키워가고 있었다.

“전부 전투 준비태세에 돌입한다.”

“네, 알겠습니다!”

여러 명의 음성이 하나의 음성처럼 맞아떨어졌다. 이번엔 EGI 본사에서 내려온 총사령관이 서울 센터를 지휘했다. 승오는 아직 푸르기만 한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주먹을 쥐었다.

지금쯤 의진도 전투복으로 환복하고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터였다.

센터 주변 베리어를 더 강화하고 등급 높은 물리 에스퍼들을 앞으로 배치했다. 정신계 에스퍼인 승오는 후방에서 적의 접근을 감지하고 있었다. 가이드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페어 별로 흩어져 대기 중이었다.

“움직임이 사라졌습니다.”

“…….”

감시 센터 보고를 받고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승오는 그 순간 뒤를 돌아봤다. 그 많은 요원 사이에서 의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딘가 결연한 눈빛. 매번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벌벌 떨었던 그가 아니었다.

의진과 눈이 마주치자 승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의진도 뒤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던 모니터에 무수한 점들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삐빅, 삐빅, 삐빅!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감시원이 그것을 보고 입을 떼기가 무섭게 센터를 둘러쌌던 베리어가 소멸했다.

경계가 무너지며 가장 중앙에 선 천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도시’의 수장 천음.”

안개가 뒤덮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천음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나 들릴 만큼 커다랬고 또렷했다. 승오는 재빨리 뒤를 돌아 의진을 찾으려 했지만, 안개에 가려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씹!”

욕을 내뱉은 승오가 자리를 이탈해 의진이 서 있던 쪽으로 걸어갔다. 어깨에 부딪히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수많은 사람을 천음 혼자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문 속에서도 의진을 어서 찾아야 했다.

“너희를 파멸시키고 내 것을 찾으러 왔다.”

“의진아!”

천음의 단단한 목소리가 센터를 장악했다. 여전히 요원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의진도 보이지 않았다. 승오는 눈을 감고 의진을 좇으려 애를 썼다. 이제야 승오도 희뿌연 연기에서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의진도 천음이 나타나자마자 승오를 찾았다. 안개를 휘저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아까 전만 해도 금방 닿을 거리에 있던 그가 잡히지 않았다. 의진은 벌벌 떨리는 발을 겨우 떼어 목이 터져라 승오의 이름을 외쳤다.

“승오야, 승오야!”

“푸흐흐흣.”

비죽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의진 앞에 도훈이 나타났다.

“‘도시’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닥쳐!”

“그런 반항은 더는 통하지 않아요.”

빠르게 의진의 뒤로 간 도훈이 손을 펼쳐 입을 틀어막았다. 발버둥 치던 얇은 몸뚱이가 축 늘어지고 도훈은 뒤에 대기하던 방역원들에게 의진을 던지다시피 건네곤 모습을 감췄다.

“완료했습니다, 천음님.”

도훈의 말에 자욱했던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음은 의진을 찾느라 분주한 승오를 줄곧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원 돌격.”

으아아아아아! 동상처럼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마취 안개에 정신을 차릴 무렵, ‘도시’ 군대의 폭격이 쏟아졌다.

의진을 찾던 승오가 걸음을 멈추고 앞 상황을 바라봤다. 아직 정신을 회복 못 한 요원들이 눈에 걸렸다. 잠시 갈등하던 그는 능력을 사용했다.

‘센터를 보호해.’

승오의 정신 조종으로 공격을 피한 요원들이 하나둘 ‘도시’ 세력과 맞붙었다.

한 걸음을 떼면, 다른 에스퍼가. 그 에스퍼를 재끼면 또 다른 에스퍼가. 끝없는 싸움에 승오가 천음을 찾아 나서려 뒤를 돌았다.

“지의진을 찾는 중인가?”

“너 이 새끼…!”

피식, 천음은 제게 달려드는 승오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렸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상당한 힘이었다. 승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천음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잡았다.

“뭘 없애야 내 아래 둘 수 있으려나. 정신계 에스퍼니까… 뇌 조직? 아무 생각 없이 짐승처럼 헉헉대는 것도 볼만하겠네.”

“의진이 내놔.”

천음 주변엔 또 다시 안개가 휩싸였다. 자신을 은폐하는 수단인 듯 보였다. 승오가 힘을 주어 멱살을 풀어내기 무섭게 이번엔 목을 조여왔다.

“큿!”

“푸흣.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 걸 가져가는 것뿐인데.”

숨이 틀어막힌 승오가 조심히 허벅지에 고정해놓은 총집에 손을 뻗었다. 하늘이 노래질 만큼의 악력이었으나 참아야 했다.

천음은 그을린 목에 선 핏줄을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크읏! 승오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젖히자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지의진을 찾고 싶으면 또다시 네 발로 걸어와 봐.”

“…크으윽.”

“그땐 내가 친히 상대해줄 테니.”

이미 장전되어 있던 총을 집어 곧바로 천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목을 조이고 있던 손이 풀어지며 정확히 조준되진 못했으나 팔을 스친 건 맞았다.

“보기보다 제법이네.”

“천음님!”

천음은 살갗이 찢겨나간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도시’ 에스퍼들이 곧바로 그를 엄호하고서 자취를 감췄다. 천음의 상처 때문이었을까. 다시 안개가 센터 전체를 뒤덮고, 모두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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