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90)화 (90/114)

#90

이제 이 정도면 됐어. 의진의 훈련을 담당하던 코빈도, 유찬을 도맡았던 여울도 한날한시에 같은 말을 뱉었다. 그 말을 들은 의진은 살짝 얼떨떨해했고 승오는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유찬의 능력이 야금야금 천음을 갉아먹기는 했는지 의진은 이제 승오와 식당도 드나들었다. 예전이었으면 식당 근처를 서성이며 도시락 받아오는 승오를 기다렸을 거였다.

“많이 먹어.”

“어, 너도.”

햇볕 잘 드는 창가 근처 테이블에 앉아 식판을 맞대고 밥 먹는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승오가 내미는 스테인리스 컵을 받아든 의진이 어색하게 반응했다.

“내일 오전 훈련 끝나고 우리 훈련장으로 오래.”

“응. 그럴게.”

밥을 깨작대며 대답한 의진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배식을 받고 들어오는 은후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동료와 떠들던 그도 의진의 시선을 느낀 건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

의진은 푹 고개를 수그리고 혀에 부서지는 밥알을 억지로 삼켰다. 전에 그를 보고 발작한 탓일까. 은후는 의진을 보자마자 다른 곳으로 몸을 틀었다. 한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을 털어놓은 사이였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틀어지게 된 걸 체감하니 조금 서글퍼진 의진이었다.

“너 미워서 그런 거 아니고 힘들어할까 봐 피해준 거야.”

“…알아. 분명 아는데 기분이 좀 그렇네.”

승오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배려하는 게 맞지. 가끔 의진의 대한 안부를 묻는 은후가 주문처럼 읊조리던 말이었다. 정말로 은후는 의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 내가 망쳐놓은 거 같아서.”

의진은 양념 소스에 잘 버무려진 닭강정을 쇠젓가락 하나로 콕 찌르며 중얼거렸다. 위에 얹어져 있던 땅콩 분태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베어 물었다. 좋아했던 반찬도 예전처럼 그리 맛있지 않았다.

억지로 오물대는 의진을 바라보던 승오가 팔을 뻗어 괜히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쓰다듬에 의진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오늘 있을 계획이 머리를 장악했다. 의진은 그새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곤 침대에서 벗어났다. 욕실에선 샤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승오의 방문 앞에 서서 가슴 한편을 어루만지던 의진이 침을 삼켰다.

“정말로 없앨 수 있는 걸까.”

이제 혼자 있을 때 들릴 악몽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괜한 기대심과 혹시 모를 실망감이 공존했다.

“일어났어?”

샤워를 마친 승오가 의진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말하는 디데이. 모든 게 예상한 대로 흘러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승오야.”

“응.”

“나 조금 떨리는 거 같아.”

반라인 승오의 몸에선 따스한 열감과 라벤더 향이 풍겼다. 의진을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인 그는 이리저리로 뻗어가는 작은 머리통 속 잡생각을 정리해주었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은 하지 않았는데도 승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의진은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있는데 왜 떨어?”

“그러게. 네가 있는데 왜 떨지.”

“천음이라도 나타나면 한 대 패줄게. 아니, 몇 대고 때려줄게.”

머리카락 사이사이 들어온 손가락이 의진을 달래듯 부드럽게 유영했다. 의진은 승오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그냥 스스로 콱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극단적 결말까지 떠올렸다. 그만큼 의지가 됐고 그만큼 사랑하는 중이었다.

“네 말 들으니까 힘이 나는 거 같기도 하네.”

“그럼,”

가만히 기대있는 의진을 떨어뜨린 승오가 허리를 숙였다.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손짓에 의진은 활짝 웃고선 발꿈치를 들었다. 두 개의 입술이 짧게 부딪혔다 떨어졌다.

“의진이는?”

“이제 훈련 끝났대요. 곧 올 거예요.”

훈련장을 뛰어다니는 유찬을 지켜보던 승오가 여울에게 말했다. 여울은 고개를 끄덕이곤 뻐근한 목덜미를 꾹꾹 주물렀다. 요 며칠 승오의 훈련과 유찬의 프로그램을 병행하느라 안 그래도 없는 체력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인센티브 하나 없는 일에 열정을 쏟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 다짐했다.

“그래. 유찬이 집중력 떨어지기 전에 얼른 시작해야겠다.”

“네.”

“형, 여기 진짜 넓다. 우리 마을보다 더!”

훈련장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카랑카랑 외치는 유찬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활기찼다. 승오가 넓은 보폭으로 유찬에게 다가갔다.

“형 생각엔 거기가 더 넓었던 거 같은데.”

“그런가? 아닌데, 여기가 훨씬 넓어.”

자연스럽게 유찬은 승오의 손가락을 붙잡고 걸었다. 때마침 위에서 의진이 문을 열고 계단을 내디뎠다.

“조심해서 내려와.”

“응.”

“아이고, 참.”

연인을 향한 유난에 여울이 혀를 내둘렀다. 나무통 같은 제자가 사랑에 흐물대는 꼴은 아무리 봐도 면역이 생기질 않았다. 팔 부근을 쓸어내리던 여울은 몇 주 전보다 훤칠해진 의진을 보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훈련 잘 받고 왔어?”

“네. 컨디션도 괜찮아요.”

“다행이네.”

의진을 본 유찬이 승오의 손을 잡은 채로 그에게 달려왔다. 마치 가족 상봉의 모습이라 여울은 또다시 팔뚝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너는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무릎을 꿇은 채 유찬과 인사를 하던 의진이 확 표정을 굳혔다. 한동안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듣자 솜털이 바짝 서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의진아?”

“의진이 형 또 아파요?”

‘어디 마음대로 해봐. 끝은 지옥일 테니까.’

켜켜이 쌓인 비명들이 의진의 귀에 몰려들었다. 헉헉대는 신음도 있었고 죽기 일보 직전의 절규도 있었고 살기 위한 발악도 뒤섞인 채였다. 실물 없는 지옥. 귀로 들리는 악몽. 의진은 바닥에 고꾸라져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의진아!”

“하, 귀가 너무….”

아아아악! 한 여자의 높은 비명에 의진이 눈물을 떨궜다. 귀가 찢길 듯이 아팠고 오한이 들었다. 가슴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천음은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방관한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의진을 무너뜨리려고 기회를 엿봤던 거다.

“지의진!”

“형….”

오로지 의진에게만 들리는 고통이었다. 창백해진 손끝이 무엇이라도 붙잡으려 바닥을 파고들려 했다. 승오는 참을 수 없어 그를 일으켰다. 불안전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본 의진이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지의진, 정신 차려!”

“하, 제발, 제발 나 좀 놔!”

도망치고 싶어. 의진의 찢어지는 울음에 유찬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여울은 의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꽉 쥐었다.

“지의진. 이길 수 있어. 유찬이에게 가이딩 해.”

“선생님, 지금!”

“아니. 해야 해. 혹시 승오 능력 쓰려는 생각이거든 그러지 마. 오히려 더 독일 거야.”

의진의 허벅지에 조심스레 유찬이 손을 올렸다. 의진은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살려줘, 살려줘. 너 때문에 박정현이 죽은 거야. 의진아, 살려줘! 정현의 목소리와 천음의 조롱이 연달아 들려오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의진아!”

“흑….”

여울의 강단 있는 외침에 의진이 힘겹게 눈을 떴다. 유찬의 작달만한 손이 의진을 꼭 붙들고 있었다.

“왜 의진이 형만 맨날 이렇게 아픈 거예요?”

순수한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의진의 몸을 승오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고 앞엔 여울과 유찬이 있었다. 의진은 조그만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동아줄 삼아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죽어버려.’

칼날 같은 천음의 목소리가 고막을 관통했다. 그때 의진이 온힘을 다해 유찬을 껴안았다.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코빈이 줄곧 강조했던 작은 에너지를 상기시켰다.

‘에스퍼마다 필요한 에너지는 달라. 너무 지나쳐도, 너무 부족해도 가이딩은 하나마나한 결과를 가져오지. 유찬이 같은 작은 아이한텐 네가 낼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가이딩을 해야 하는 거야. 아주 가늘게, 조심스럽게.’

‘선생님도 알고 계셨어요?’

의진은 코빈이 제 상황을 모르리라 생각했다. 갈수록 제게 필요한 훈련을 진행하는 코빈에게 어느 날 물었다. 코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훈련에 집중하라 말할 뿐이었다.

‘난 그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훈련을 진행하는 것일 뿐.’

코빈의 말을 떠올리기 무섭게 비명이 의진을 덮쳤다.

‘네가 내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의진은 바로 지금, 이곳에 천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 목소리는 첨예했고 시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럴 리 없는데도 '도시'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후회 속에서 울부짖게 해주지.’

“천천히, 집중해. 할 수 있어.”

여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의진에게 말했다. 때마침 지켜보고 있던 유찬이 의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안쓰러운 몸을 감싸주고 싶은지 맞닿지 않는 손을 꿈틀대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의진이 형…!”

“하, 하아….”

가이딩을 하면서 튕겨 나가는 듯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공포와 고통으로 물든 감정 때문일까. 어긋나는 거 같으면서도 기를 쓰고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제게서 유찬에게로. 의진은 유찬을 더 꽉 끌어안고 이를 악물었다.

아, 됐다. 알 수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이곳에서 의진과 유찬의 머리카락이 부웅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유찬을 안았던 손에 힘이 빠졌다.

“의진아!”

승오에게 완전히 기댄 의진은 결국 정신을 잃었다. 여울이 급히 유찬을 살폈다. 의진의 품에 있던 유찬은 얼굴은 슬퍼했으나 눈동자가 훨씬 또렷해져 있었다.

“…주승오.”

“…….”

“당장 의진이 4층 가이딩 검사실로 데려가.”

“그럴게요.”

그곳은 코빈이 있는 곳이었다. 승오는 여울의 말에 바로 의진을 안고 계단을 올랐다.

“선생님, 의진이 형은 괜찮은 거예요?”

“응. 그럼.”

고개를 내려 유찬을 바라본 여울이 부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진이 형이 절 안았을 때 엄청 시원했어요. 형이 너무 차가워서 그런 거죠?”

가이딩은 들어간 게 확실했다. 천음의 에너지가 사라지면서 충격에 정신을 잃은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여울은 제대로 닫히지 못한 훈련장 문을 바라봤다.

“제발….”

의진을 안은 승오가 곧바로 코빈 박사가 있는 검사실로 달려갔다. 근처에 다다르자 코빈이 문을 열고 승오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들어오게.”

축 늘어져 있던 의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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