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88)화 (88/114)

#88

N187 작전에서 희생당한 요원들의 영결식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유족들이 그러기를 원했고 EGI 역시 언론 보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정된 사안이었다. 승오와 의진은 이젠 사진으로밖에 마주 볼 수 없는 동료들 앞에 국화 한 송이씩을 올려두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영결식이 있는 날이면 센터 분위기는 무겁도록 침묵 속에 잠겼다. 누구 하나 종용한 적 없는데도 입을 다물고 깊은 추모를 시작했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조차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숙소로 갈래?”

승오는 제 곁에서 걷는 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정한 시선에 의진도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봤다. 살랑살랑 고개를 저을 때마다 옅은 갈색 머리가 살랑거렸다.

“조금 걷다 들어가자.”

“그래, 그럼.”

“주승오.”

의진의 의견에 맞춰 산책길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뒤에서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엔 지환도 함께였다. 새카만 정장을 입은 네 사람이 한 곳에 모였다.

“안 그래도 할 말 있었는데, 잘됐네.”

“무슨 할 말?”

의진은 무뚝뚝한 얼굴의 지환이 조금 불편했는지 계속 곁눈질로 살펴보다가 아예 땅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유찬이 에스퍼 확정돼서 여울쌤이 프로그램 진행하기로 했어. 나도 방금 들은 거야.”

이제 말을 하기 전 사위를 살피는 건 모두의 버릇이 됐다. 태준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곤 마지막 말에 지환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프로그램 개설과 트레이너 배정에 지환의 입김이 작용한 듯했다.

“이곳에 오기 바로 직전에 결재 떨어진 거예요.”

지환이 말을 덧붙이자 승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도 태준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생각했다. 센터 내에서 상황을 공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 승오도 놀란 기색 없이 말을 받아들였다.

“다행이네요.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도움이 되길 바라요. 그럼 전 이만.”

“야, 훈련 때 보자. 연락할게.”

의진이 불편해한다는 걸 느꼈는지 지환은 살짝 미소 짓더니 그새 자리를 떠났다. 태준도 멀어지는 지환을 따라 서둘러 멀어졌다. 단정하게 걷는 지환에게 어깨동무하는 동료를 바라보던 승오도 의진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

“뭐가?”

“팍팍하기만 한 것 같은 센터에 좋은 사람들도 있는 거.”

“……응, 진짜로.”

여상하게 건네는 승오의 말에 의진은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매번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지환에게 거리를 두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긴 했다. 원래 이렇게 낯을 가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 단조롭고 감흥 없는 눈빛이 약간, 아주 약간 무서웠다. 악의가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지환 앞에선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도시’가 의진의 일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진 아마 극복하지 못할 트라우마지 않을까 싶다.

“훈련까지 시간 좀 있지? 조금 걷자.”

“응.”

쌀쌀해지는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지 않게 승오와 의진은 가까이 밀착한 채 천천히 주변을 걸었다. 두 사람이 지나간 길목마다 색 잃은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져 길을 덮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의진은 코빈이 있는 가이드 훈련실로 돌아왔다. 역시 무거운 정장보다 훈련복이 훨씬 편하고 마음이 놓였다. 캐비닛을 열어 주위를 돌아본 그는 주머니에서 몰래 가져온 사진 한 장을 문 뒷면에 붙였다.

“…됐다.”

조그마한 직사각형의 증명사진이었다. 그 속엔 지금보다 조금 앳된 승오가 어색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석에 부착해놓은 터라 의진밖에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슬쩍 웃어 보인 의진이 검지로 조심조심 승오의 얼굴을 매만졌다.

“거기 먼지라도 붙어있나?”

“아, 박사님.”

뒷짐을 지고서 의진의 어깨너머를 훔쳐보는 시늉을 한 코빈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민망한 마음에 확 문을 닫아버렸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무언가를 숨기는 티가 여실했다.

“일할 때 의지를 다지게 해주는 무언가를 붙여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자, 들어가자.”

“……네.”

뚜벅뚜벅 훈련실로 걸어 들어가는 코빈을 멋쩍게 바라보던 의진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요즘 들어 의진은 가이딩 에너지를 조절하는 법을 위주로 훈련하고 있었다. 가장 미세한 파장부터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진정시킬 수 있는 강한 파장까지. 의진에게는 오히려 전자가 어려웠다. 가이딩 대상자가 S급 에스퍼라 그런가. 한 번에 힘을 확 풀어 체력을 충전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조금만 더 집중. 수치는 더 낮아야 해.”

“…네.”

의진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엿보였다. 얼마만큼 더 낮아야 하는 걸까.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독한 입술을 슬쩍 물었다가 뗀 후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렇지. 지금 그 힘을 기억해놔.”

코빈은 모니터에 기록되는 의진의 가이딩 에너지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조금 헤매기는 했어도 원하는 범위에 금방 도달한 의진이었다.

“5번만 더 하면 오늘 훈련은 끝이야.”

“후우, 네….”

“힘드니?”

시원한 물 한 병을 건네며 코빈이 물었다. 의진은 물병 표면에 맺힌 촘촘한 물방울들을 보다가 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요, 힘들다기보단 어려워요.”

“에너지를 약하게 잡는 게?”

“네. 승오한텐 그런 에너지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쓴 적이 없거든요.”

그리 갈증이 나지 않았던 거 같은데도 금새 물 반 통을 비워냈다. 의진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곤 다시 훈련에 들어갈 태세를 했다.

“그렇다고 모르고 있으면 안 되지. 언제 어느 순간에 필요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네, 맞아요.”

의진은 볼을 살짝 부풀렸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코빈이 시작 버튼을 누르는 손짓에 맞춰 의진도 가이딩 에너지를 방출했다.

훈련에 임하는 자세도,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많은 게 달라진 의진이었다.

*

의진이 진중하게 훈련을 받는 동안 승오도 강도 높은 훈련에 들어갔다. 작전이 실패로 끝난 이후 전략기획팀은 모든 게 누그러진 상태였다. 더는 무분별하게 사상자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쪽 에스퍼들은 각성제를 이용해서 능력을 증폭시키는 거야. 즉, 완전히 제 것이 아니라는 소리지. 잘못 사용했다간 스스로를 겨눌 수도 있어.”

여울의 말에 승오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워는 막강했으나 그에 따른 리스크도 확실했다. 이 순간에도 더 많은 상위 에스퍼를 제조해내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더 확실하게 만드는 게 훈련의 목표야. 특히 천음은 소리를 지배하는 에스퍼니까 물리적인 힘보다 정신을 흔드는 쪽이 훨씬 승산 있어.”

“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전투는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테고, 만일 그때도 우리가 패배할 시엔 트레이너들 다 옷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맵 종료 후 열 오른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벼운 러닝을 뛰던 승오는 중앙에 서 있는 여울을 바라봤다.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야.”

훈련 흔적이 여실한 푹 패인 바닥을 여울의 흰 운동화 앞코가 톡톡 건드렸다. 주기적인 소음을 리듬 삼아 승오도 남은 바퀴 수를 빠르게 채웠다.

“그렇지 않게 할게요.”

“…엉?”

“의진이 목숨 줄로 가지고 노는 거 끝나면, 천음은 제가 반드시 처단할 거예요.”

“풋. 마음에 드는 포부네. 내가 사람 하나 잘 키워놨다.”

여울은 제 옆으로 다가온 승오를 올려다보다가 씩 웃으며 땀 젖은 등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고 유찬이 육성에 힘 써주세요.”

“원래 말하려던 게 그거지?”

“…….”

노려보는 척 눈을 흘긴 여울이 기지개를 켜고서 몸을 돌렸다. 다시 훈련 맵을 고르고 승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기록해야 했다.

승오도 여울을 따라 가이드라인 밖으로 걸어갔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천음 만큼은 지옥으로 떠밀고 만다. 여울에게는 고하지 못한 다짐을 속으로 삼킨 승오가 목 근육을 풀며 훈련을 재개했다.

“오늘 훈련 끝.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땀으로 폭삭 젖은 승오가 여울이 건네는 마른 수건에 얼굴을 묻고서 대답했다. ‘도시’의 군사력과 비등한 강도로 훈련을 하다 보면 기초 체력이 상당한 승오여도 가끔 이렇게 피곤이 몰려왔다.

훈련 일지를 챙긴 여울은 먼저 자리를 떠나고, 승오도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훈련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건물 사이 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

꼭대기 층 베란다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의진아.”

“얼른 와.”

불을 켜놓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의진의 기쁨이 승오에게도 느껴졌다.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마른 팔뚝도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연했다. 승오는 더플백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크게 달렸다.

승오가 건물을 오를 때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의진은 문이 열리자마자 안겨들었다. 투욱, 더플백이 익숙하게 바닥에 널브러졌다. 숙소로 돌아오기만 하면 버려지는 일 순위였다.

“언제부터 저기서 기다렸어?”

“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그냥 안에서 기다리지.”

“너 빨리 보고 싶어서라고 하면, 안 믿으려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의진이 승오의 두툼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동그란 뒤통수를 손바닥에 가둔 승오가 머리꼭지에 연신 입을 맞췄다. 흐흐, 간지러워. 조용하게 웃는 숨에도 키스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도 괜찮았어?”

“응, 괜찮았어. 안 우울해했고, 안 슬펐어.”

“그럼 됐어.”

현관 위 보조 등이 툭 꺼지자 둘은 급하게 입을 맞췄다. 의진을 안아 드는 순간 불이 확 켜지며 승오의 목에 팔이 감겼다.

“너는, 안 힘들었어?”

“응. 하나도.”

거짓말처럼 의진과 혀를 섞자마자 피가 미친 듯이 돌고 심장이 뛰었다. 소파에 의진을 내려놓은 승오가 얇은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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