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84)화 (84/114)

#84

천음의 방에서 나온 도훈은 곧장 잠들어있는 에스퍼들에게로 향했다. 마치 의진에게 절절한 고백을 한 적이 없다는 듯 실험관 약물 투입구를 여는 얼굴은 여상하기만 했다. 에스퍼들에게 연결된 전극을 따라 약물이 투여되는 게 도훈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몇 시간이 지나면 각성 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양의 가이딩 에너지를 갈구할 것이었다. 그럼 천음의 뜻하는 대로 맘껏 정현이 범해지고, 오로지 통곡만 가득한 신음을 의진이 듣게 되겠지.

“…….”

다섯 명의 에스퍼에게 약 투여를 마친 도훈은 혀에 남아있는 숙성된 포도주의 맛을 되새겼다. 의진에게 고한 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비겁한 진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종의 면죄부를 약속해놓고 죄를 치르는 거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사람은 그 무엇도 올바르게 쳐다보지 못했다.

에스퍼 보관실에서 나온 도훈은 앞에서 지키고 서 있는 방역원들을 살며시 돌아봤다.

“각성 반응 일으키는 순서대로 실험실로 들여보내.”

도훈의 말에 꾸벅 고개를 숙인 그들은 다시 정자세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정현에게 환각제를 주입할 차례였다. 이미 에너지를 많이 갈취당한 그는 언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 의진이 그곳에 있었을 땐 심장이 너덜거릴 듯 아파 왔는데, 정현을 볼 땐 전혀 요동조차 없었다. 부쩍 쇠퇴한 이유도 도훈의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비타민이라도 놔드릴게요.”

“이제 제발, 그만….”

철창에 갇힌 그는 도훈의 그림자를 보자마자 발작하듯 몸을 들썩거렸다. 바싹 마른 팔을 붙잡은 도훈은 가운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입으로 주사 뚜껑을 빼내고서 피부를 뚫었다. 주삿바늘이 혈관에 박혀 키가 짧아질 때마다 정현은 하얗게 질린 입술을 뻐끔댔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줄어들지 않는 미음 그릇을 내려다본 도훈은 그대로 연구실로 들어갔다. 박정현은, 오늘까지만 목숨을 부지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

숙소로 돌아온 의진은 습관적으로 왼쪽 가슴을 문질렀다. 이쯤 되면 작은 통증이라도 일어날 법한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 예상과 다르게 진행될 때 불안은 더 증폭되는 법이었다.

“무슨 생각해?”

“아, 아니야. 아무것도.”

근소한 시간 차이로 팀장에게 갔다 온 걸 숨긴 의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긴장감을 아예 은폐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자꾸만 주변을 흘깃거리고 귀를 주물럭대기도 했다. 승오는 부쩍 잔 동작이 많아진 의진을 바라보다가 손톱을 잘근 깨무는 손을 끌어내렸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

“내가? 아닌데….”

사랑하는 연인이자 정신계 에스퍼인 승오의 직감을 피할 수는 없던 모양이다. 의진은 소파에 앉은 몸을 더욱 웅크리곤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저 죄책감이 가신 마음과 대기 명령이 조금 지루해 그런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승오는 속지 않는 듯했다.

“지의진.”

“어?”

천음의 흑막이 있을 거라곤 어렴풋이 생각했다. 고작 도청의 목적으로 의진에게 에너지를 심어놓은 것은 아닐 테니까. 아무리 천음이 그렇게 말했어도 의진이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가능성으로 열어둔 승오였다.

의진을 믿고 싶었기에. 거짓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저버리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었기에. 승오는 구태여 의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의진을 의심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어떻게서든 의진이 제게 숨기려는 것을 알아내야 했다. 승오가 낮게 부르자 의진은 크게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나한테 숨기는 거, 진짜 없는 거 맞지.”

“……왜 그런 소리를 해.”

“확인하고 싶어.”

소파에 앉아있던 승오는 몸을 틀어 아예 의진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천음이랑 무슨 얘기 했어?”

“네가 블랙 가이드래.”

평소와 같은 얼굴로,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의진은 혈류에 도는 피가 냉각되는 기분을 느꼈다.

“…….”

“맞아?”

“…승오야.”

“그래서 일부러 N187 작전에 들어간 거고, 그곳이 ‘도시’가 사용 중인 지역이라 말한 거고. 그래?”

여전히 다정한 말투 때문에, 의진은 승오가 지금 제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실망한 건지, 그냥 물어보는 건지,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창백해지는 의진의 얼굴을 보던 승오가 조금 떨어진 뒤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랬어.”

“……그게.”

“왜 혼자 힘들게,”

“뭐든 하고 싶었어.”

의진은 안도했다. 승오는 제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캐물으려 물어본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능력을 사용해 머릿속을 읽고 천음이 두 번째로 지시한 거까지 알았을 텐데 승오는 작전 개시 전 상황만 말하는 듯했다.

“…네 목숨을 쥐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걸 무시해.”

“의진아.”

“네가 무사할 수 있는 일이면, 나 이제 뭐든 할 거라고 했잖아.”

승오가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의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다가 네가 다쳐.”

“상관없어.”

“지의진. 그게 왜 상관이 없어?”

붙잡힌 손을 한참 내려다본 의진은 팔을 틀어 빼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긴 싫었다. 승오와 의미 없는 줄다리기는 더욱 싫었다.

“나 조금 피곤해서, 조금만 자고 일어날게. 그때 얘기하자.”

“……그래. 그러자. 그러는 게 좋겠다.”

반바지를 입어 드러난 마른 다리가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승오는 의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휴우.”

이불에 둘러싸여 억지로 눈을 감은 의진은 자꾸만 뒤척이는 몸을 바로 했다. 살짝 열어둔 방문 밖으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잠기운이 하나도 돌지 않았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의진은 눈을 감으면서도 반사적으로 이불을 쥐어 잡았다.

‘아, 제발… 아, 아아… 윽… 아흐윽…!!’

허억. 의진은 번뜩 눈을 떴다. 꿈속에서 들렸던 신음은 눈을 떴음에도 이어졌다. 헉헉거리는 짐승 같은 숨소리와 비루한 신음. 의진의 커다란 눈에 금방 눈물이 가득 찼다.

‘살려, 살려… 윽, 으윽, 아…. 아…….’

그리고 이어지는 천음의 웃음. 몸을 웅크린 의진은 베개로 머리를 틀어막았다.

“제발, 그만…….”

‘벌을 받겠다고 한 건 너야.’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신음이 연달아 들리더니 이번엔 비명이었다. 아아아악! 의진은 두꺼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승오, 승오야….”

‘의, 의진아… 제발, 제발 나 좀….’

무주 센터 박정현 가이드. 둥글게 만 몸이 발발 떨려왔다. 제게 행해지리라 생각했다. 어떤 벌이든 내가 아파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진의 선택으로 정현은 단두대 앞에서 농락당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 상황이 그려졌다. 피와 정액으로 얼룩진 갑갑한 실험실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눈 시퍼런 에스퍼. 헛구역질이 날 만큼 역겹지만 벌어진 다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정신을 쉼 없이 갉아먹는 팔에 꽂힌 전극.

‘다음부터 괜한 객기는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아… 승오야, 승오야….”

‘읏, 윽…!! 아악!!’

정현의 비명 같은 신음이 멈췄다. 또각, 또각. 천음의 구두굽 소리가 의진의 귓가에 댕댕 울렸다.

‘이런, 죽어버렸네.’

천음은 그 말을 하며 웃었다. 더 참을 수 없던 의진이 방을 박차고 나와 승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천음의 에너지로 의진의 신음을 들을 수 없었던 승오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받아냈다.

“의진아.”

“승오야, 살려줘…! 아니, 죽여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제발…!! 그, 그냥, 아무 소리도 안 들리게… 차라리 죽여줘…. 제발….”

자신의 방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승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곤 울부짖는 의진을 끌어안고 그간 참아왔던 능력을 사용했다.

“스, 승오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천음의 모략, 제안. 의진의 확고한 신념과 마음. 팀장과 나눴던 아슬아슬한 대화. 그리고 의진의 죄책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끊어버린 타인의 목숨. 거대한 일들이 한 줄기 파노라마가 되어 승오에게 전해졌다.

“쓰레기 같은 새끼….”

의진이 승오의 품에 안겨 오열하듯 눈물을 쏟아냈다. 들끓는 화도 연인의 오열 앞에선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승오는 의진의 뜨거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일단은 잠들자. 아무 생각도 말고.

옷소매를 쥐고 당기던 손이 차츰 안정을 되찾으며 힘을 풀었다.

스르륵 잠든 의진은 완전히 승오의 품에 안겼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낸 건지 목 주변과 어깨 부위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세상이 네 것 같지.”

의진을 침대에 눕힌 승오가 판판한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즐겨둬. 어차피 다 돌려받을 테니까.”

이제 이 지긋지긋한 루트를 벗어날 때가 됐다. 의진은 저 몰래 고통받고 뒤늦게 안 자신은 분노하고. 한심한 반복을 깨부숴야만 했다. 승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제 어깨를 두드리던 태준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유찬, 여울 트레이너도.

잠든 의진을 한 번 바라본 승오는 휴대전화를 들고 방을 나섰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안에 꿈틀대는 천음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숙소를 박차고 나가는 승오의 눈빛은 폭주 그 이상의 분노를 담고 있었다.

“선생님. 유찬이 좀 데리고 훈련장으로 와주세요. 검사 결과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요.”

전화를 툭 끊은 뒤 승오가 향한 곳은 태준이 있는 체력단련실이었다. 막 오전 운동을 끝낸 태준은 굳은 승오를 보고 이마를 닦고 있던 수건을 내렸다.

“주승오, 여긴 왜….”

“나랑 어디 좀 가자.”

“뭐?”

“뭐든 도와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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