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승오는 의진이 잠들어있을 숙소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어쨌거나 팀장이 지시한 대기 명령은 따라야 했으니까.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지평선 위에 반쯤 걸쳐져 있던 해가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떠오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주승오.”
여울의 사무실을 지나 건물 끄트머리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던 승오를 불러세운 건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한 층 아래에서 들리던 목소리는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로 바뀌어 승오에게 다가왔다.
“아침 운동가다가, 너 여울 트레이너 사무실에 들어가는 거 보고 기다렸어.”
“무슨 일이야?”
의진처럼 깊은 트라우마까진 아니었으나, 승오도 모두가 말살당한 현장에서 지었던 태준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왜 너희만 살았냐는 눈빛. 그나마 너희라도 살아서 다행이라는 눈빛.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친 얼굴도 승오에겐 답이 명확한 문제처럼 읽혔다.
“요즘 센터에선 너희 얘기만 주구장창 들리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모르는 거 같아서. 신경 쓰이더라고.”
“…그러냐.”
다행히 태준은 생존자, 즉 승오와 의진에게 적대감은 없어 보였다. 승오가 잠시 위아래를 올려다보고선 다시 태준을 바라봤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괜찮은데, 의진이가 걱정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태준이 승오의 의견에 동조했다. 태준은 누구보다 의진을 향한 승오의 애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경고해주고도 싶었다. 요즘 들어 그 둘에게 여러 감정이 교차할 때가 많았다.
“너희가 본부로 복귀하고 바로 현장 감식반이 붙었어. 분명 요원들을 차출할 때 나름대로 최정예로 구성했는데도 부상자나 사상자는 오직 우리 요원들뿐이었다는 거야.”
“…….”
“의진이가 전에 말했던 거와 조금 다르지. 그땐 군대 규모가 우리보다 적고 훈련도 덜 되어있다고 그랬어.”
“…그래, 그랬었지.”
승오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의진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떨었던 손의 진동까지 세세하게.
“물론 난 의진이가 ‘도시’를 벗어나고 나서 군사력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해.”
승오는 태준의 말뜻을 단번에 파악했다. 지금 수뇌부들은 의진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울 센터로 복귀하고 나서 바로 팀장을 독대했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심증이 확고해지는 순간 물증을 잡으려고 들 거야.”
“지환 씨도 그렇게 생각해?”
승오가 태준을 향해 물었다. 지환은 태준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팀장 및 여러 임원의 신임을 사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일개 요원인 태준이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건 지환의 속삭임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물어본 거였다.
“지환이도 팀장이 시키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같은 뜻은 아니야.”
“……하아.”
“센터가 완전히 뜬 소문으로 뒤덮이기 전에 의심을 거둬내야 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생각보다 그게….”
한숨을 쉰 승오가 피곤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끝없는 덤불을 혼자 헤집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빛은 보이는데 헛발질을 하는 느낌이랄까. 여울과 방금까지 했던 말에 그나마 조금 희망을 얻었는데, 다시 기분이 저 밑으로 쑥 꺼져버렸다.
태준은 승오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깨를 다독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친구 좋다는 게 뭐겠냐.”
다부진 손이 승오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제가 모르는 상황을 말해주는 이가 있어 위안인 건 사실이었다. 승오가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말해줘서 고맙다.”
“수고해. 나도 이제 운동 가야겠다.”
손목에 찬 전자시계를 확인한 태준이 먼저 등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태준의 잔상을 바라보던 승오도 의진에게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숙소로 돌아가도 의진은 없을 테지만.
*
“…지의진 요원.”
“네, 팀장님.”
운명의 장난 같게도 그 시각 의진은 홀로 팀장을 마주한 채 서 있었다. 승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눈을 뜬 의진에게 호출이 재빠르게 날아왔다. 덜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전략기획본부실로 온 의진은 떨지 않으려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른 시간이지만 부르게 됐네.”
“네, 전 괜찮습니다.”
뒷짐을 진 의진은 마주 잡은 손끝을 주무르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랜 기간 정부를 위해 노력한 시간과 세월이 있으니 나도 자네를 의심하고 싶진 않아.”
“…….”
“주승오 요원이 천음과 대적했을 당시 기절했던 게 사실인가.”
중저음의 목소리가 의진을 향해 물었다. 여전히 의진의 시선은 카페트가 깔린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사실입니다.”
“작전 회의 당시 우리에게 말했던 ‘도시’ 군대 정보도 모든 게 사실이었나.”
“……네. 제가 본 것과 들은 것, 하나도 빠짐없이… 거짓 없이 전달 드렸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완전한 오전이 된 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팀장이 몸을 돌려 의진을 바라봤다. 초조한 눈빛의 의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본인만 ‘도시’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나.”
“…….”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그곳에서, 어떠한 이유로?”
“그건….”
잘근잘근 씹던 아랫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여린 살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진 것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의진의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김도훈.”
“……?”
“이곳에서 저의 트레이너였고, 또 ‘도시’의 스파이였던 김도훈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도훈이 도움을 줬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팀장의 얼굴이 한 번 움찔거렸다.
“그는 ‘도시’의 핵심 인물이며 천음과 가장 가까운 부하입니다. 그렇지만… 저와 센터에서 쌓았던 정을 잊지 못했습니다. 제게 여분의 방도 제공해줄 만큼이요. 그래 봤자 실험체에 불과했지만…. 실험 자원을 차출하고 난 후부터 줄곧 천음에게 건의했던 모양입니다. 저를, 센터로 돌려보내 달라고….”
의진은 본인이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혓바닥에 기름이라도 칠한 것처럼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경계 어렸던 팀장의 얼굴이 차분해짐과 동시에 날뛰었던 의진의 심장도 정상 범주를 되찾아갔다.
“그러니까 지의진 요원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김도훈의 공이 컸다. 이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자에게 감사해하고 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천음과 주승오 요원이 작전 현장에서 독대했던 그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거고.”
“…네, 그렇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팀장은 의진을 캐물어도 나올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이상 의진을 의심하는 건 괜한 체력 낭비일 수도 있겠단 결론을 내렸다.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장관들과 또 한 번 긴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주승오 요원과 지의진 요원은 내일부터 훈련을 재개하도록 해. 고생 많았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삼십 분도 안 되는 짧은 대화였음에도 의진은 온 기력이 빨린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본부실을 나와 문을 닫은 의진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천음은 이 자리에서 내가 승오를 배신하기를 원했겠지. 느릿느릿 걷는 신발 앞코를 내려다본 의진이 조금 전 승오와 마찬가지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런 말을 내 입 밖으로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텅 빈 복도에서 의진의 혼잣말이 발소리에 밟혀 으깨졌다.
*
모든 상황을 듣고 있던 천음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알량한 애정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견고한 면도 있는 모양이었다. 무릎 위에 걸쳐진 오른쪽 종아리가 부드럽게 살랑였다.
“도훈 닥터, 아쉽게 됐어요. 지의진이 내 명령을 무시해버렸네요.”
정부군을 말살시키고 돌아와 줄곧 몸을 섞었던 두 사람은 세상과 반대로 아직도 한밤중인 ‘도시’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천음의 와인 잔이 테이블에 놓인 도훈의 술잔을 톡 건드렸다.
“…….”
“벌은 생각해놨겠죠? 지의진이 고분고분 내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어떤 벌을 줘야 천음님이 만족하시겠습니까.”
도훈의 상아색 피부엔 천음이 숱하게 남긴 열꽃이 가득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멍울을 감상하던 천음은 느슨하게 목을 축이며 웃었다.
“글쎄요. 제 만족도는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요?”
“…그의 죄책감을 건드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도훈은 덤덤한 얼굴로 천음의 수심이 낮아진 잔에 와인을 더 따라주었다.
“박정현을 이용하면 되겠네요.”
제 흔적이 여실히 남은 도훈의 몸을 훑은 천음이 손을 뻗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달고 씁쓸한 게 앞에 보이는 피부에 입술을 묻었을 때와 엇비슷한 맛이 감돌았다.
“실험 대기 중인 에스퍼들한테 각성제 투여시키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지의진이 공포에 사무칠 때까지 가이딩 진행해야 할 거예요.”
“…….”
천음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 벽에 섰다. 어둑한 하늘이 그제야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두텁게 가려져 있던 구름이 스물스물 사라지자 새하얀 빛이 벽으로 투과되었다.
올곧은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훈은 남아있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중지 길이 정도 되는 긴 술잔을 쥐고 돌리고서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를 띤 천음과 시선이 뒤섞였다.
“나를 무시한 지의진을 짓밟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천음님.”
도훈은 하얀 햇살에 부서지는 천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훈의 대답에 천음이 빠르게 다가와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곧바로 입술이 맞물렸다.
익숙한 혓덩이와 낯선 술 향기가 버무려진 키스는 끝을 모르고 정점으로 내달렸다. 천음은 도훈의 머리칼을 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삽입하지 않았는데도 쾌락이 뱃속에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