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예상하지 못한 일이 되풀이됐다. 다시 한번 숙소에 갇히게 된 의진은 작전 복귀 후 의무적으로 받는 외상 검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함께 있던 승오는 잠깐 여울을 만나야겠다며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죄책감으로 들끓었던 정신을 승오가 만져준 것 같았다. 참혹한 현장을 본 순간부터 푹푹 패이고 있던 심장이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
모든 조명이 꺼진 집은 적막하고 어두웠다. 터덜터덜 거실 안쪽으로 들어가던 의진은 마치 환영 같았던 도훈을 떠올렸다.
‘우리가 멸망하는 순간이 온다면 저는 의진 씨를 구할 거예요.’
어둑한 거실 한복판에 멀뚱히 선 채 고개를 저었다.
“저 좀 그만 살려요.”
잔뜩 갈라진 의진의 목소리만이 널찍한 집을 돌아다녔다.
“내가 뭐라고….”
자조적인 한숨을 뱉은 의진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손을 펼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으나 마디마디에 붙어있는 관절이나 매끈한 피부는 느낄 수 있었다. 누구는 그렇게 죽어갔는데 또 멀쩡히 살아버렸다.
이젠 누구를 원망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훗날 지옥 길을 걸을 때 다 감내하리라. 그래도 딱 하나 다행인 것은 이 빈 숙소에서 돌아올 승오를 기다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죄스러운 선택의 유일한 이유였다.
“……!”
심장 부근이 후끈대며 소리가 안으로, 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고막이 찢어질 듯 아팠다.
‘주승오를 끌어내려.’
“흐… 그게 무슨….”
웅크린 자세로 쪼그려 앉은 의진이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천음의 말에 질문을 던졌다.
‘정부군이 말살당한 건 주승오의 능력 때문이라고 보고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승오는 건드리지 않기로…,”
‘내 말을 거역할 시에 벌을 받는 건 너야.’
귀를 관통하는 강한 고통과 함께 천음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정말 잠깐이었는데도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팔꿈치로 거실 바닥을 찍어 겨우 몸을 일으킨 의진은 천음이 한 말을 곱씹었다.
승오를 반역자로 몰라는 건가? 주먹을 꽉 쥐고서 눈을 깜빡였다. 천음의 의도를 파악 못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승오가 정부에서 퇴출당하면 ‘도시’ 사람으로 삼을 셈이겠지. 그러나 천음이 간과한 게 있었다.
“의진아, 나 왔어.”
승오의 목소리에 서둘러 일어난 의진이 휘청거리며 스위치 쪽으로 걸어갔다.
“의진아?”
“아, 응.”
타악. 급히 누른 탓에 거실 불이 아니라 현관 쪽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여태껏 불을 켜지 않고 있던 것뿐인데도 승오의 안색은 걱정으로 물들어있었다.
“왜 불도 안 켜고 있었어.”
“그럴 겨를이 없었어. 너도 없고….”
승오는 물끄러미 의진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한 발자국 성큼 걸어와 미열 나는 몸을 꽉 끌어안았다. 머리꼭지에 턱을 올리고 후끈한 등에 커다란 손을 올려 천천히 토닥이기까지 했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그냥 있어.”
“…….”
“내가 그럴 수 있게 해줄게.”
“…승오야.”
의진은 쿵쿵, 뛰는 승오의 심장 부근에 귀를 갖다 대고서 허리에 팔을 감았다. 정말 자연스레 긴장의 끈이 풀리며 가이딩 에너지가 방사됐다. 의진을 감싸 안은 팔뚝이 살며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승오를 지키기 위해 천음의 명령에 수긍하고 있다지만 이번엔 그 말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천음이 간과한 한 가지는 승오는 생각보다 EGI의 무궁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냥 너만 있으면 돼.”
“……나쁜 꿈이라도 꿀까 봐 그러지.”
“괜찮아. 옆에만 있어 줘.”
의진은 아예 허리에 감은 손을 깍지를 껴 당겼다. 피부 위로 올라오는 열감이 제게도 닿아왔다.
“…그래, 그럴게.”
제 손으로 승오를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벌을 받는 게 나았다. 천음은 승오를 향한 애정을 철저하게 간과하고 있었다.
그 어떤 말도 더 붙이지 않아서인가. 그들의 밤은 적요하기만 했다.
*
날이 밝자마자 승오는 부리나케 여울의 사무실로 향했다. 어젯밤 잠시 들렸던 훈련장에서 여울에게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유찬에게서 이그노얼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팀장의 말대로라면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대기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한시가 급했다.
훈련 시작도 전이라 불 켜진 식당을 제외하곤 사람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승오는 부쩍 싸늘해진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퍼 트레이너가 모여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선생님.”
“어, 승오야.”
승오의 복귀 소식을 듣고 여울도 서둘러 유찬의 검사 자료를 프린트하던 참이었다. 어제는 구두로만 말했던지라 정확한 지표로 보여주고 싶었다. 막 잉크가 묻어 따끈한 종이를 들고서 여울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온풍기 리모컨을 조절했다.
“앉아. 9시 전엔 너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빨리 얘기할게.”
“그래서 유찬이가 에스퍼인 게 맞는 거예요?”
방 중앙에 비치된 응접용 소파에 앉아 승오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말했다. 프린트된 결과지를 내려놓은 여울도 따라 궁둥이를 붙였다.
“아직 백 퍼센트 확실하다고 말할 순 없는데, 일단은 그래. 네가 말했던 이그노얼 능력 반응도 있었고.”
“확실하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죠?”
“너도 알겠지만, 유찬이는 아직 10세 미만 아동이야. 성인처럼 한 번에 에스퍼 검사를 마칠 수 있는 체력도, 힘도 없다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 모두에게 비밀로 하느라 장시간 데리고 있는 것도 불가능이야.”
“언제쯤 완전히 알 수 있는 거예요?”
여울은 하루 사이 부쩍 수척해진 승오의 얼굴을 보다가 검지 손끝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아주 미약하게 실시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봐봐. 그 나이대 발현된 아이들 중에서 가장 능력 반응이 좋아.”
“…….”
“이번 주 중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만일 유찬이가 이그노얼을 사용하는 에스퍼가 맞다면, 몸 안에 스며든 에너지도 없앨 수 있을까요?”
승오는 유찬의 검사 기록이 쓰여있는 종이에서 여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고민하던 여울이 다시 한번 유찬의 기록표를 바라봤다. 만일 예상하는 대로 유찬의 등급이 A가 맞다면, 분리된 에너지 정도는 소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섣불리 승오에게 말했다간 희망 고문이 될 수도 있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아직 거기까진 확신할 순 없어. 그래도, 의진이 고통을 덜어주는 데 도움은 줄 수 있겠지. 안 그래?”
“하…….”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나도 최선을 다할게.”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승오의 훈련이 또 중단되면서 여울은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였다. 현재 ‘도시’ 소탕이 모조리 실패하며 현장직을 담당하는 임원들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천음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으니까. 담당자들이 질책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김도훈 이후에도 스파이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서울 센터가 완벽한 보안을 시행하고 있는지부터 의심해봐야겠지요.’
EGI 본부에서 내려온 간부가 센터장에게 했던 말을 우연히 들은 여울이었다. 아무래도 멀쩡하게 돌아온 승오와 의진에게 훈장이 아닌 의심의 눈초리가 먼저 들러붙을 것 같았다.
“그래도 승오야. 지금은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
여울의 무거운 말에 승오가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너희 상황을 알고 있는 게 아니고, 또 여긴 만약 알고 있다고 해도 이해해주지 않을 곳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생각보다 의진이에 대한 불신이 깊은 것 같아. 이번 일을 통해 더더욱.”
“왜 의진이를 의심하는 거죠?”
“…‘도시’에서 살아 돌아왔잖아.”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승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납치당한 가이드들의 소식, 들어본 적 있어?”
“…아니요.”
“물론 의진이도 그곳에서 감당하지 못할 아픔을 겪었겠지만, 팩트는 살았다는 거야. 그것도 혼자서만. 그리고 의진이가 갑자기 작전에 투입 의사를 밝히고, N187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하, 그건!”
여울은 주먹을 쥐고 유리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흥분하려는 승오를 잠재우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게 의진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네가 이런 반응이었을 거 같아?”
“…….”
승오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연인이기에 가능한 믿음이다. 그리고… 의진은 블랙 가이드가 맞았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거야. 더 책잡히지 않게. 네가 의진이를 지켜야 하잖아.”
“…맞아요. 지금도 의진이 몸속에 그 더러운 목소리가 숨 쉴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요.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데….”
마른세수한 승오가 낮게 중얼거렸다. 여울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선 팔을 뻗어 단단한 어깨를 두드렸다.
“조급해하면 일만 더 그르치는 법이야. 차분하게,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의 방법을 다시 생각해봐.”
“그럴게요. 감사해요, 선생님.”
“괜히 주승오 트레이너로 걸려서 이런 고생도 한다, 내가. 참.”
여울의 농담에 승오는 그나마 굳어있던 얼굴을 풀어냈다. 역시 정신계 에스퍼를 담당하는 트레이너답게 승오의 멘탈을 케어하는 데 제일 특화된 사람이었다.
“염치없지만, 조금만 더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유찬이 검사 결과 나오면 연락할게. 아마 너도 그렇게 오래 대기하고 있진 않을 거야. 체력 떨어지지 않게 집에서 잘 조절하고 있어.”
검사표를 들어 작게 접은 여울은 가운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건 승오와 여울의 극비 사항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됐다.
“네, 그럼 가볼게요.”
“어. 연락할게.”
그래도 아주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승오는 여울의 사무실을 나오며 가라앉는 마음을 다독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