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유찬의 등장으로 이명이 사그라진 의진은 본능적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한동안 챙기고 다니던 초콜릿은 마침 벗어두고 온 카디건에 넣어둔 듯했다. 텅 빈 주머니 안을 마른 손가락이 오래 휘적거렸다.
“그러게. 유찬이한테 자꾸 이런 모습 보여서 어떡하지?”
관자놀이에 묻은 땀이 바람에 식어가고 있었다. 손등으로 한 번 찍어누른 의진이 벽을 짚고 일어서 유찬을 내려다봤다. 아이의 눈동자는 잘 닦은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는데, 볼 때마다 그 번쩍거림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미안. 오늘은 초콜릿도 없다.”
“그것도 괜찮아요! 승오 형이 안 그래도 초콜릿 이만큼 갖다 주고 갔어요! 물론 보호소 선생님이 뺏어가서 매일 하나씩 받고 있긴 하지만….”
“승오가?”
대수롭지 않게 답한 유찬이 의진을 향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유치 빠진 구멍 뚫린 이가 우스워서 의진은 천음이 저를 훑고 간 상황에도 따라 웃게 됐다.
“의진이 형이랑 놀아줘서 고맙다고 주는 거랬어요.”
“뭐?”
힘 빠진 웃음이 픽픽 잇새로 새어나갔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인데도 자기 몰래 유찬과 접선했을 승오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헉! 이거 형한테 비밀이라고 했는데. 쉬잇. 승오 형한텐 말하지 말아 주세요.”
짧동한 검지가 자기 입술을 가리며 의진에게 속삭였다. 의진은 유찬에게서 풍기는 순수한 냄새를 가득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비밀로 해줄게.”
유찬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온 의진은 거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훈련은 체력 하나 닳지 않을 만큼 쉬웠으나 그 뒤가 혼을 쏙 빼놓았다. 천음의 목소리는 다행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소리가 증발하는 순간 오싹 돋았던 소름은 쉽사리 잠재워지는 게 아니었다.
“…우연이겠지?”
천음의 에너지에 정신이 아찔해질 무렵 유찬이 등장한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사라졌던 소음은 제자리를 되찾았다.
유찬이 입고 있던 유니폼은 다른 보호소에서 전달받은 옷이었다. 그러니까 형질이 정확히 분류되지 않은 아동이나 미성년자들이 주로 착용하는. 한 마디로 일반인과 다름없었다. 유찬은 에스퍼가 아니었다.
불 꺼진 거실엔 햇살이 들어와 은은하게 어둠을 지워내는 중이었다. 천장을 바라본 채 손톱을 물어뜯던 의진은 조금 전 상황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찬의 등장으로 천음의 힘이 없어졌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의진아.”
의진이 판단을 마친 순간 오전 훈련을 끝낸 승오가 숙소로 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누워있던 의진도 금세 허리를 일으키고 복도를 지나는 승오를 좇았다.
“왔어?”
“응. 일찍 왔네?”
“나야 뭐. 오늘 별거 안 했어.”
남몰래 의진 살찌우기 프로젝트에 돌입한 승오는 오늘도 어김없이 식당에서 도시락 두 개를 받아왔다. 쇼핑백을 식탁에 내려놓고선 성큼성큼 의진이 앉아있는 소파로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동등해진 시선에 의진이 눈을 끔뻑이자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의진은 눈을 살며시 감고 목을 살며시 주무르는 따뜻한 손길에 천천히 에너지를 방출했다.
“그래도 수고했어.”
“으응, 너도.”
애정 어린 시선을 나누던 중 의진이 문득 나른한 표정을 뒤바꿨다.
“아, 맞아.”
“응?”
“나 오늘 훈련 끝나고 바로 숙소 들어오기 뭐해서 유찬이 있는 보호소까지 걸어갔다가 왔거든.”
“응.”
의진이 입을 열자 승오는 목덜미를 쥐었던 손을 내려 어깨를 쥐었다.
“천음 에너지 때문이겠지만, 가끔 주변 소리가 사라질 때 있잖아.”
“오늘도 그랬어?”
진중해진 승오의 목소리에 의진은 흘깃 그를 올려다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승오를 걱정시키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 의진이 느끼기에 아무 일이 아녀서, 이런 경험담 정도는 승오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응. 이명까지 들려서 귀가 찢어지게 아프더라고.”
“지금은, 괜찮은 거야?”
“그럼. 괜찮지. 너 걱정하라고 한 소리 아니니까 인상 풀어.”
의진의 입에서 자신이 모르는 상황이 흘러나올 때마다 승오는 짙은 눈썹을 구겼다. 그가 덤덤하게 말한다 한들 듣는 이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구겨진 미간 위로 의진의 손끝이 닿았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나 지금 멀쩡하잖아.”
“하여간….”
“아무튼, 귀가 아파서 잠깐 머뭇거리고 있는데 유찬이가 나타났었어.”
유찬을 만난 조금 전을 떠올린 의진이 승오의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내렸다.
“그러니까 거짓말처럼 아픈 것도 사라지고 소리가 들리더라.”
“저번처럼?”
“응, 저번처럼.”
승오도 의진과 같은 생각을 했다. 유찬이 나타남으로 인해 에너지가 잠시 소멸한 게 아닐까. 승오의 눈동자를 바라본 의진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유찬이 말고 나라든가, 다른 사람이 나타났을 땐?”
“글쎄… 자각을 해본 적이 없어. 유찬이 말고는.”
“…희한하네.”
“우연이겠지? 아무래도 유찬이는 아직 어리잖아.”
“혹시 모르지.”
뭔가, 알아볼 필요성은 있었다. 만일 유찬이 의진의 안에 있는 천음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키라면 놓쳐서는 안 됐다. 사뭇 진지해진 승오를 줄곧 바라보고 있던 의진은 제 어깨를 쥔 커다란 손을 잡아 내렸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
“야, 주승오.”
“어, 어. 그럴게.”
잡생각에 빠진 승오를 끄집어낸 의진이 뒷머리를 만지작대며 또 다른 말을 이어갔다.
“그건 그렇고, 너 유찬이한테 나랑 놀아주는 거 고맙다고 뇌물 줬더라?”
“아, 유찬이가 말했어?”
“그래. 그리고 너 말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날선 의진의 말투에 승오가 힐끗 의진을 바라봤다.
“엄연히 따지면 내가 유찬이를 놀아주는 거야.”
예상 밖의 대답에 승오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뻔뻔하고 당당하고 솔직하고. ‘도시’에서 돌아온 이후 간혹가다 보이는 의진의 당당한 옛 모습은 무척이나 반가운 것 중 하나였다.
“유찬이 나이 때에는 그렇게 띄워주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다음부턴 반대로 말할게.”
“치, 그러라고 말한 거 아니거든.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의진의 손에 끌려 식탁으로 가는 와중에도 승오는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천음의 능력이 발동할 때 유찬이 나타나면 사라졌던 소리가 다시 들린다….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던 고민의 실마리가 아주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했다.
승오는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내는 의진의 작은 뒤통수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
제1 도시 은거지 침투 날짜가 픽스되고 나서 승오는 더욱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의진과 점심을 먹고 난 뒤 곧바로 훈련장으로 돌아와 가벼운 트레이닝을 하던 중 피곤한 낯의 여울이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은 의진이랑 먹었어?”
“네.”
“야, 그래도 너 요즘 도시락 받아먹는다고 영양사님이 특별히 메뉴 신경 쓰는 거 같더라.”
“에이, 설마요.”
“진짜야. S급 에스퍼가 능력만 인정받는 건 줄 알아? 특혜가 있어야 S급이지.”
부른 배를 두들기며 걸어오는 여울을 지켜보던 승오는 스트레칭을 멈췄다.
“혹시 선생님.”
“응?”
“에스퍼 능력 발현은 언제부터 될 수 있어요?”
신입도 하지 않는 질문을 승오가 하니 여울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현장에서 날고 기는 에스퍼들은 옛날옛적에 배웠던 가장 기초적인 이론을 머릿속에 저장해두지 않았다. 아마 배운 다음 날 기억에서 지웠으리라. 사실 쓸모없는 내용은 맞았다.
“나이 불문이지.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을 갖춘 채로 나오고, 누구는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발현되고, 또 누구는 죽는 날 아는 사람도 있어.”
“…그럼 아주 어린 나이에도 에스퍼가 될 수 있단 소리네요.”
“물론.”
여울의 말에 승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그럼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보호소에서 보호 중인 유찬, 이란 애요.”
“유찬? 아… 어!”
여울은 유찬의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얼굴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쳤다.
“발현 검사 한 번 해봐도 될까요?”
“갑자기? 그 아이가 에스퍼 발현 조짐이 보인다거나, 뭐 그런 내용 전달받은 거 없는데.”
만일 승오의 생각이 맞다면, 그건 눈으로 보이는 능력이 아니었다. 능력을 쓴 에스퍼만 은밀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유찬이도 의도적으로 쓴 게 아니라 모를 가능성이 컸다.
“제 생각엔, 이그노얼 같아서요.”
“이그노얼? 그 꼬마가 능력 무력화를 할 줄 안다고?”
“…네,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본 적 있어?”
식곤증으로 나른했던 여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근래 들어온 신입 요원들의 능력들이 흔해 빠진 물리적인 것들뿐이라 회의감이 들던 찰나였다. 승오 앞으로 바짝 다가온 여울은 볼펜 뒤축으로 관자놀이쯤을 살짝 긁었다.
“의심되는 정황이 있어서요.”
“의심되는 정황?”
“…….”
승오는 순간 고민했다. EGI 사람 중 승오가 제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으니 의진의 지금 상태를 믿고 말해도 문제는 없을 거였다. 정면에 보이는 휑한 훈련장을 한 번 보던 승오가 결심한 듯 몸을 돌렸다.
“…선생님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뭐를?”
“의진이 몸 안에 천음의 에너지가 들어있어요.”
“어?”
여울은 놀란 마음에 큰소리로 되묻다가 사위를 돌아봤다. 이게 무슨. 급작스러운 고백에 잠이 번뜩 달아났다.
“…의진이가 ‘도시’로 납치당했을 때. 천음 그자가 의진의 몸 안에 에너지 일부를 넣어놨어요.”
“천음 능력은… 소리를 다스리는 거잖아. 그렇다는 건,”
“우리의 말을 다 들을 수도 있고, 의진이 주변에 있는 소리도 조종할 수 있어요.”
“하, 잠깐만. 그럼 유찬이가 그걸 막았다는 소리야?”
이마를 짚고 골똘하게 생각하던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승오는 그 질문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제 예상으론 그래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능력 검사를 한 번 해주셨으면 해요. 물론, 아무도 모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