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75)화 (75/114)

#75

회의가 마무리되자 전력기획본부실 문이 열렸다. 윗선에 보고하기 위해 팀장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후였고 노트북 정리를 하던 지환과 아직 나가지 않은 태준이 두 사람과 남아있었다. 태준은 가장 앞쪽에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와 승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의진이가 작전에 참여한다길래 조금 놀랐어.”

그 말에 의진도 태준을 바라봤다.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예전은 이미 지나간 예전일 뿐이었다. 지환도, 태준도. 모두 의진에겐 낯설고 어려운 상대였다. ‘도시’와 얽히고서부터 의진의 당당함은 뿌리 뽑혀 버린 지 오래라 더욱 불편했다.

“그냥 팀원으로 대해줘.”

머쓱하게 웃는 의진의 얼굴을 보던 승오가 태준에게 말했다.

“그래, 뭐. 알았다. 나중에 보자.”

태준도 의진이 겪었던 일을 모르는 게 아니라서 더 말을 얹지 않고 지환과 함께 본부실을 벗어났다. 모든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의진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있었다.

“천음이랑 김도훈이 그런 얘기도 했었어?”

사위를 둘러본 승오가 천천히 걷는 의진에게 밀착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진은 승오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선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은 적 있어. 불필요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잊고 있었나 봐.”

“그랬구나.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잘했어.”

마른 팔뚝을 꽉 쥐는 다부진 손을 힐끔 보던 의진이 또 한 번 주억거렸다. 천음이 들었으려나. 얼마나 더 거짓말을 해야 승오를 해치지 않겠단 약속을 해줄까. 의진은 기약 없는 조건을 상기시키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싶어?”

“어? 뭐라고?”

“여울 쌤한테 오후 일정 전달받기 전까지 시간 있는데, 뭐 하고 싶냐고.”

“…아. 음… 그러게. 난 아무거나 다 좋아.”

살짝 얼빠진 의진의 얼굴을 승오는 빤히 바라봤다. 집요하면서도 아득한 시선에 의진은 침을 꼴깍 삼키고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의진보다 계단을 한 칸 더 내려온 승오가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왜, 왜 그렇게 봐.”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서. 괜찮은 거 맞지?”

회의할 때도 잔잔히 뛰던 심장이 승오의 말 한마디에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그럼. 조금 떨려서 그랬어. 나 이렇게 나서는 거 처음이잖아….”

국내 최상위 정신계 에스퍼에게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는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승오에게는 흑막을 뒤집어쓴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알게 될 사실이라 할지라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었다.

어느 연인이 너를 위해 적의 스파이 짓을 하고 있노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진은 여전히 자신을 지긋하게 바라보는 승오를 바라봤다.

“그런 거야?”

“으응. 우리 조금 걷다 들어가자. 너랑 산책하고 싶어.”

“그래, 그러자. 업어줄까?”

“…됐거든.”

승오는 문득 들었던 의심을 걷어냈다. 의진의 노력을 애써 무시하고 싶지 않았고, 정말로 자신이 읽어내지 못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었다. 내밀었던 등을 툭 치며 옆으로 내려오는 얼굴 또한 공포심으로 물들어있지 않아서, 더 파고들 마음도 들지 않았다.

중앙에 마련된 공원과 가이드 훈련장을 지나자 가끔 도훈과 걸었던 숲길이 앞에 나타났다. 승오는 얼굴을 굳히고 돌아서려 했다. 저 숲에 남은 기억은 뭣 같은 것뿐이었다.

“…다른 데로 돌아가자.”

“……그냥 들어가 볼래?”

그때보다 훨씬 울창해진 숲길을 응시하던 의진이 승오의 손을 잡아끌었다. 몇 주 전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트라우마 때문에 이 길을 보자마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조심히 한 걸음씩 발을 디디니 승오가 둥근 어깨를 붙잡았다.

“왜 여길 들어가려고 해. 그러다가 또 힘들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

“내가 괴로워하는 기억들 네가 바꿔주면 되는 거잖아.”

숲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물 먹은 풀 냄새가 확 콧속으로 들어왔다. 도훈과 이 길을 걸으면서 안도했을 때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선생님이 제 트레이너라서 정말 다행이다. 이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저를 걱정하는 승오의 외침은 무시한 채.

의진은 신발 바닥에 뭉쳐있던 흙이 무게에 퍼지는 걸 느끼며 승오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힘들어?”

“아니. 되게 신기하다. 예전이었으면 무서워서 너한테 안겼을 거 같은데 지금은 멀쩡해. 그냥… 미안해, 너한테.”

“…또 뭐가 미안해.”

“너한테 여기서 화내서.”

의진은 커다란 돌이 세워진 길 끝에 서 있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승오에게 되레 화를 내던 멍청한 모습이 어제 일처럼 재생됐다. 내가 승오였다면 온갖 정이 다 털렸을 텐데. 새삼 승오의 애정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괜찮아. 그런 거로 미안해하지 마. 넌 나한테 미안해할 거 하나도 없어.”

그 이후로 또 한 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숲길은 승오와 의진이 걸을 적마다 자취를 남기려는 듯 깊이 발자국이 새겨졌다. 승오의 단호한 대답에 의진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널 좋아하니까.”

“…….”

바람을 머금은 나뭇잎들이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의진은 그제야 눈물이 나려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넌 나한테 안 미안해해도 돼.”

“…그런 게 어디 있냐….”

“여기 있다고 하면, 조금 유치하려나?”

승오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의진을 바라봤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낸 의진이 아주 밝게 웃어 보였다.

“어, 유치해.”

“그럼 유치한 사람 하지 뭐. 그것밖에 할 말이 없는데.”

어쩌면 고통의 시작점이었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또 한 번 바람이 흔들리는 순간 의진이 발꿈치를 들어 승오에게 입을 맞췄다.

죄를 지어도 행복한 이유는 너 때문이야. 의진은 벌어진 잇새로 파고드는 혀를 감싸 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

“천음님. 제1 도시 주변에 정부군으로 보이는 자들이 발견됐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죽 슈트를 빼입은 천음이 순찰조 에스퍼를 내려다봤다. 역시나 무능한 정부였다. 뿌려놓은 미끼를 덥석 물다 못해 미끼가 들어있는 통을 두들기는 수준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를 훌륭하게 키워놓으면 뭐하나. 대가리가 멍청한데.

더욱더 완벽한 실험 설계와 에스퍼 육성을 위해 터를 옮긴 후 버려졌던 제1 은거지는 천음의 손에서 재탄생 되었다. 폭발로 망가졌던 건물을 밀어버리고 커다란 창고를 만들었다. 그리고서 전투기 정비팀을 만들어 요 며칠 그곳을 드나들게 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그것조차 내 계획이었으니까요.”

“침입을 시도할 땐 사살해버릴까요?”

한 벽이 전부 창문으로 된 곳에서 회색 ‘도시’를 바라보던 천음이 무릎을 꿇고 있는 순찰조 에스퍼에게 다가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에스퍼는 빠르게 천음의 방에서 나갔다. 제 심기를 건드릴세라 급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던 천음은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도훈의 노력으로 이곳 에스퍼들은 괴물처럼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밤마다 들려오는 울부짖음과 신음은 천음을 즐겁게 했다. 그때 경기장 밖으로 생존 싸움에 실패한 사망자들이 방역원들의 손에 축 늘어져 나왔다.

“그러게 더 강해질 생각을 했어야지.”

쯧. 혀를 찬 천음은 오래간만에 볼 승오가 기대됐다. 사랑에 눈먼 애송이는 과연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제1 ‘도시’ 은거지로 정부가 쳐들어오게 될 그 날, 천음도 그 자리에 있을 생각이었다.

“천음님, 김도훈입니다.”

“들어와요.”

빨간 키스 마크를 목덜미에 매달고 온 도훈은 천음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제가 남긴 작품이었기에 천음은 흡족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가이딩 에너지 물질화 실험 보고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어땠나요?”

“물질화하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에스퍼에게 주입 시 정상적인 가이딩 작용이 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질화하는 과정에서 주요 에너지원이 소실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은 성과군요.”

목숨을 잃은 에스퍼들이 줄줄이 소각장으로 향하는 걸 바라본 천음이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성급할 필요 없어요. 마음이 급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니까요.”

천음과 한 뼘 거리에 선 도훈은 구름에 가려진 해에도 빛나는 하얀 얼굴을 바라봤다. 도훈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음이 고개를 돌렸다. 까만 눈동자와 오묘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연구실에만 박혀있으려니 심심하지 않나요?”

“…천음님을 위한 일이니 즐겁기만 합니다.”

달콤한 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천음은 픽, 웃음을 터뜨리다가 도훈에게 손을 뻗었다. 아직도 진하게 남겨져 있는 열꽃을 엄지로 문지르던 그는 눈을 치켜뜨고 도훈의 속눈썹을 훑었다.

“오랜만에 도훈 닥터와 산책을 가볼까 하는데.”

“…….”

“곧 정부 군대가 제1 도시를 파괴하러 올 거예요. 그 자리에 나와 동행해주면 돼요.”

“설령 힘없는 정부라 해도 천음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천음은 고개를 기울여 열꽃이 핀 자리에 입술을 묻었다. 이를 세워 자근자근 살을 씹으니 열꽃은 더욱 빨갛게 색을 입었다.

“어차피 그 팀엔 주승오와 지의진이 있어요.”

“…….”

“그 둘은 나를 죽이지 못합니다.”

도훈의 시선이 멀어지는 빨간 입술에 닿았다.

“내 편이 세 명이나 되는데 죽기야 하겠어요?”

“…천음님.”

“제가 주승오와 이야기하는 동안 도훈 닥터가 지의진을 맡아주세요.”

지의진이란 말에 도훈은 순간 모든 신경을 움찔거릴 뻔했다. 표정 변화 없이 천음을 바라본 도훈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천음님의 명령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천음은 도훈의 꿈쩍 않는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곁에 두기에 너무나도 완벽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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