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67)화 (67/114)

#67

의진과 유찬이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승오는 훈련에 몰두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의진을 지킬 수 있을까. 그 생각만이 승오의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는 안개처럼 자욱하게 떠다녔다.

“주승오, 집중.”

여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전장 매트릭스 속 가상의 반정부 군대가 승오를 향해 달려왔다. 잠시 주춤하던 승오는 제게 쏟아지는 군인 전부를 무력화시켰다. 예전 등급 검사를 다시 받았을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었다.

훈련 맵 속에 있는 가상의 것들은 승오에게 그리 위협 대상이 아니었다. S급으로 승격 이후 실력이 훨씬 더 늘어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손쉽게 미션을 달성한 승오가 정면을 바라보며 숨을 내뱉었다.

─훈련 종료.

안내 음성이 들리자 무력 상태가 되어 겹겹이 쌓이던 군인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오늘 약간 집중 못 하는 거 같다?”

“죄송해요.”

볼펜 뒤축을 질겅질겅 물며 나온 여울은 바싹 마른 수건 하나를 승오에게 던져주고는 고개를 저었다. 우등생이 한 번 집중 못 한다고 해서 열등생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승오의 훈련 허가와 동시에 그가 새로운 작전에 투입되면서 여울에게도 막대한 책임감이 부여됐다.

‘주승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걸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근무하시길 바랍니다.’

센터장의 말을 전한 어느 직원의 말이 여울의 만성 스트레스성 위염을 북돋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능력을 더 월등하게 만들면, 센터에서 감당은 할 수 있고?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그는 수건으로 땀을 닦는 승오를 올려다봤다.

“훈련이니까 네가 죽을 일은 없겠지만, 이게 만약 실전이라고 생각해 봐. 너, 목 날아가는 거 순식간이야.”

“…네, 그럴게요.”

승오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천음의 명을 받은 에스퍼들을 떠올렸다. ‘도시’로 향하면서 만난 에스퍼들이 그곳의 힘의 척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딘가가 어수룩했고 자신이 가진 힘에 삼켜진 것 같은 자들이 태반이었다.

이미 승패를 결정지어 놓고 제 앞에 적을 뿌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여러 번 대면했던 승오조차 ‘도시’의 힘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의진이 때문에 그래?”

“그것도 그렇고, 여러 모로요.”

“새로 들어간 팀. 분석에서부터 애먹는다며.”

여울과 승오는 뒤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여울이 먼저 운을 떼자 승오가 물병을 쥐고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지환을 필두로 ‘도시’와 천음에 관해 필사적으로 분석하고 있었으나 한계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센터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고작해야 ‘도시’ 위치와 그들의 실험 목표 정도였다. 물론 의진이 모든 걸 발설한다면야 모든 게 업데이트되겠지만.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렇죠.”

물병 뚜껑을 열어 반절 정도를 들이킨 승오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애써 배제한 의진이가 다시 그 팀에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거야? 어차피 의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며?”

“…….”

여울은 승오의 초짜 시절부터 함께 한 트레이너였다. 크게 표정 변화가 없는 승오의 기분도 해가 지날수록 잘 파악했고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들키기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몸 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양심이 콕콕 쑤셔왔다.

“네, 의진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팀장님도 사람이신데 기억 못 하는 애 억지로 붙잡고 생각하라 하지 않으시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겠죠?”

“그래. 나는 의진이도 의진이지만, 네가 걱정돼.”

예상치 못한 여울의 말에 승오가 고개를 돌렸다.

예전보다 수척해진 마른 볼을 문지르던 여울이 눈을 흘깃댔다. 승오가 여울에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그도 승오에게 직접 애틋함을 나타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결이 완전히 다른 처음이긴 했다.

“네 걱정도 좀 하면서 살아, 인마.”

탄탄한 팔뚝을 성의 없게 툭툭 친 여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훈련에 돌입할 차례였다.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함도 없지 않아 있는 듯했지만, 승오는 다 먹은 페트병만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충분히 쉬었지? 이번엔 제대로 집중해.”

“네.”

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오가 정면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언젠간 여울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선생님을 속여서 미안하다고. 그날이 오면 매운 손찌검을 하염없이 맞아도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처절함으로 이루어진 곳. 천음은 새로운 은거지로 오면서 건설한 작은 경기장을 유독 애용했다. 에스퍼들의 실력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을뿐더러 불필요한 존재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관전하는 게 흥미로웠다.

“으아아아악!!”

퀴퀴한 먼지 냄새가 자욱한 곳에 피비린내가 번졌다. 천음은 도훈의 실험으로 훨씬 더 막강한 파워를 얻게 된 에스퍼들을 내려다봤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표정들이 천음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오롯이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남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패배자를 밟고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했다. 악(惡)은 그래야 했다.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영혼들은 막강한 힘으로 서로를 죽여나갔다.

“날이 갈수록 도훈 닥터의 실력이 느는 것 같군요. 확실히 다들 예전보다 더욱 훌륭해졌어요.”

“감사합니다, 천음님. 천음님이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으아악!”

천음은 도훈의 부드러운 말씨에 빙긋 웃었다. 방금 만들어낸 번개를 상대에게 내리꽂아 죽인 에스퍼는 과거 승오와 격돌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최상위 A급으로 각성시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무턱대고 죽여버렸으면 아까울 인재였다.

“이제 슬슬 저자들을 밖으로 풀어볼까 합니다.”

“…….”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천음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도훈이 의진에 대한 모든 감정을 척박한 땅에 묻어버리고 난 뒤 부쩍 평온을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지의진이 내 명령대로 잘, 입을 다물고 있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죠.”

“…어디로 보낼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주 센터를 쑥대밭으로 만들 거예요. 도훈 닥터가 개발한 저들이라면 그것쯤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얇은 눈썹을 들썩인 천음은 게임이 끝난 경기장을 내려다보곤 박수를 한 번 쳤다. 하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치형으로 뚫린 입구에서 하나둘 나와 죽은 에스퍼와 생존한 에스퍼를 분리해 끌고 나갔다.

“우리가 액션을 취해야 그것들이 더 부리나케 움직이지 않겠어요?”

“그럼 지금 당장 출정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도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음이 손을 올렸다.

“지의진에게서 얻은 가이딩 에너지로 충분히 회복시킨 다음 나가도 늦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곤 하지만 어차피 죽음으로 물들여질 곳이라 에스퍼들이 대전하는 경기장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생명이 죽어가는 회색빛. 그곳에서 천음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그의 뜻대로 움직이던 자들이 사라지자 도훈과 천음.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

천음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도훈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도훈 닥터의 생각을 좀 묻고 싶어요.”

키스할 듯 다가오던 그는 도훈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눈으로 훑고서는 다시 멀어졌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이 걸린 채였다.

“무주 센터가 피바다로 물들면 서울은 아마 지의진을 더 압박하려 들 겁니다. 나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테니까요.”

“…….”

“그는 내가 시킨 대로 이곳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거짓말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제 명령의 반쯤은 거부하고 있는 셈이죠. 안 그래요?”

“…….”

도훈은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천음의 의도를 언뜻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벙어리마냥 입을 다문다면 벌을 줄 생각입니다.”

“…천음님.”

“그 벌을 도훈 닥터가 생각해주세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을 보던 천음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절망하는 모습을 애써 숨기는 그가 안쓰럽고 우스웠다.

“그게 무슨….”

“나름 지의진을 긴 시간 봐오지 않았나요?”

“저는 그저 그를 꾀는 일에만 몰두했을 뿐입니다.”

도훈이 그렇게 말하자 웃고 있던 천음이 확 얼굴을 굳혔다. 그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순종하면 되는 것을. 의진이 관련되면 가끔 멍청하게 구는 도훈이 짜증 났다.

“제게 그런 알량한 거짓은 통하지 않습니다, 도훈 닥터.”

“…….”

“이번 일이 끝나고서도 지의진이 내 말을 거역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 시 당신이 생각한 그대로 그를 벌할 겁니다.”

어차피 도훈은 천음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저런 불필요한 말은 오히려 겨우 잠재워뒀던 소유욕과 질투를 건드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이 무섭도록 차분해졌다.

“무주 센터에 지의진과 친분 있는 가이드가 있는지 알아 오세요.”

“…….”

“만약 있다면 그자를 이곳으로 데려와도 좋겠네요. 안 그래도 요새 날뛰는 에스퍼가 많아 가이드 한두 명 정도는 들여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요.”

“…천음님.”

“아니면, 다른 가이드도 지의진처럼 실험해보는 게 어때요?”

물끄러미 도훈을 바라본 천음은 픽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하아.”

천음이 완전히 사라지자 도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거기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제 입이 원망스러웠다. 간신히 의진을 향한 감정을 땅속에 처박아뒀다고 생각했는데. 핏자국이 선연한 마른 바닥을 내려다보던 도훈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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