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62)화 (62/114)

#62

“내일 나를 또 봐야 할 거 같아서 주는 선물이야. 일종의 뇌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럼 저는 이걸 받았으니까 내일 또 여길 와야겠네요?”

“와준다면야 오늘 캐러멜의 세 배도 줄 수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나?”

웃음 띤 얼굴로 검사실을 나온 의진은 코빈이 건넨 캐러멜을 훈련복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인형과 캐러멜이 한데 모여 주머니가 두툼해진 것도 같다. 문을 닫고 복도에 선 의진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고는 한적한 복도를 걸었다.

어쩐지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다정함과 배려를 유독 느끼게 되는 나날이었다. 지혜와 코빈을 동시에 떠올린 의진이 승오를 만나러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본관 뒤에 연결된 에스퍼 훈련장은 페어 가이드 출입만을 허용했다. 간혹 그곳에서 급하게 가이딩을 진행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탓에 입장 제한을 두었다.

코빈의 긍정적인 영향 탓일까, 의진은 연결된 통로가 아닌 건물 뒤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왠지 오늘은 다른 사람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의진이 건물을 나와 뒤편으로 돌아갔다.

“…….”

잔디가 수북하게 깔린 뒤편은 추워지고 있는 날씨에도 꽃이 만개해있었다. 겨우살이 꽃이거나 식물을 다룰 수 있는 하급 에스퍼들의 능력이 깃든 것들인 게 분명했다.

의진은 내심 용기를 내 나왔지만, 그래도 사람이 없는 것에 약간 감사했다. 긴장한 얼굴을 지우고 걷고 있는데, 잔디 틈에서 키가 작은 어린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몰래 나와서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 심심해서 그랬어요!”

소년은 의진을 보자마자 우다다 달려와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

“저 정말 꽃은 안 꺾었어요, 선생님! 정말 보기만 했는데….”

의진에게 까만 손바닥을 보인 소년은 동그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원 모양 펜던트에는 유찬, 이라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의진은 그것으로 이름을 짐작했다.

“아… 그런데 나는 선생님이 아닌데.”

의진이 말을 얼버무리자 유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오가 유찬을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의진은 그가 초면이었다. 선생님이 아니라는 말에 다소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 개구쟁이 면모를 드러냈다.

“그럼 나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거지?”

“어, 으응.”

“아휴, 난 또.”

폭 한숨을 쉰 유찬은 다시 잔디가 무성한 풀숲으로 달려갔다. 손이 꼬질꼬질했던 건 흙장난을 치고 있어 그랬던 듯싶었다. 의진은 유찬을 그냥 지나칠까, 고민했다. 아무리 센터가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저 작은 꼬마를 그냥 두기엔 어른으로서의 체면이….

뒷머리를 긁적인 의진은 쪼그리고 앉은 유찬에게로 조심히 다가갔다.

“그런데, 뭐 하고 있는 거야?”

“우리 마을에서 가져온 씨를 심고 있어.”

“마을?”

“응. 몇 개 모아둔 민들레 씨가 있어서.”

딱 봐도 아이 체구에 맞게 수선한 바지는 약간 볼품없어 보였다. 센터 내 보호소에도 이렇게 어린 연령대는 처음이었을 거였다. 급한 대로 제일 작은 훈련복을 줄이고 잘랐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내 탈탈탈 씨를 털어 넣은 유찬이 뿌듯한 얼굴로 파놓은 흙을 다시 덮었다.

“우리 마을 땅은 퍽퍽해서 꽃이 자라지 못한대. 그래서 가끔 바람을 타고 날라오는 씨를 모아둔 거야. 이곳에선 아주 잘 자랄 수 있겠어!”

“…너는 어디에서 왔는데?”

“N217.49.50!”

의진은 유찬의 말이 온통 외국어로 들렸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은 왜 여기 있어? 이 시간이면 다른 형, 누나들은 다 저 뒤로 가던데.”

꽃가루에 코가 간지러웠는지 유찬은 흙 묻은 손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까맣게 칠해진 동그란 콧등을 본 의진이 다른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건물을 바라봤다. 에스퍼들의 훈련장이었다.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의진은 다시 유찬을 바라봤다. 이번엔 흙더미 위로 기어가는 개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에스퍼가 아니야.”

“그럼 가… 가이… 그거야?”

“응, 가이드.”

“그래, 그거!”

승오 형이 말해줬었는데! 유찬은 작은 손바닥을 모아 손뼉을 치고는 가이드, 에스퍼…를 중얼거렸다.

“승오?”

“응, 주승오. 형도 알아? 여기서 되게 유명한 에스퍼래.”

의진은 조금 더 무릎을 끌어안고선 유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가 승오를 어떻게 아는 거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너는 그 형을 어떻게 아는데?”

“그 형이 날 여기로 데려왔거든.”

개미 하나를 손등에 올려 기어가는 걸 지켜보던 유찬이 의진에게 말했다.

“너를, 여기에?”

“나쁜 사람들이 우리 누나와 마을 사람들을 다 데려가서 나는 혼자 마을을 지키고 있었어. 그때 승오 형이 짠, 나타나서 우리 누나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리고 난 여기로 온 거고. 여기가 훨씬 안전할 거래. 누나도 나중에 여기로 데려와 준다고 했어.”

검지를 땅에 기울여 내리자 개미는 유찬의 손가락을 타고 땅으로 내려갔다. 유찬에게는 센터에 있는 모든 게 새로운 세상 같았다. 황폐한 모래바람도, 밤이면 덜덜 떠는 추위도 없는 곳은 책에서만 봤던 낙원과 비슷했다.

“……나쁜 사람들이 혹시….”

의진도 언뜻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손목에 수갑을 찬 채 줄지어 가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것처럼 낯선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럼 그게 그 유찬의 마을 사람들이었던 건가.

“이름은 나도 몰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형은 혹시 알고 있어?”

의진은 순수 그 자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방금까지 가벼웠던 마음이 또다시 무거워졌다.

“아니, 형도 몰라. 미안.”

“그렇구나. 미안할 건 없어.”

“유찬! 너 또 여기 나와 있지!”

보호소를 담당하는 직원이 불호령을 지르며 본관 뒤편으로 다가왔다. 유찬은 헉, 소리를 내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다! 형, 안녕!”

바지에 흙 묻은 손을 탁탁 쳐내던 유찬은 바지춤을 잡고 황급히 달려오는 직원에게로 뛰어갔다.

“사라져서 선생님이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죄송해요….”

보호소 직원은 유찬의 꾀죄죄한 손을 꼭 붙잡고 끊임없이 잔소리해댔다. 어린아이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다는 걸 잘 알 텐데도 놀란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의진은 사라지는 유찬을 바라보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오늘 찬이가 좋아하는 간식 나오는 날인데, 선생님 혼자 다 먹는다!”

“아아!”

그 말을 끝으로 유찬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의진은 유찬이 덮고 간 흙을 바라보고선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고래 인형과 캐러멜 세 개가 달그락 손에 잡혔다. 이거라도 쥐여줬으면 좋았을걸. 애먼 후회가 바람을 타고 의진에게로 밀려왔다.

“…….”

유찬과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의진은 승오가 기다리고 있을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한 손은 유찬에게 전해주지 못해 아쉬운 캐러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승오야.”

“어, 왔어?”

“안녕, 의진이.”

“안녕하세요.”

마침 쉬는 시간이었는지 여울과 승오는 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의진을 바라봤다. 여울은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맵을 구현하는 관리실로 몸을 숨겼다. 다소 티가 나는 발걸음이었지만, 의진은 애써 모른 척했다.

“쉬는 시간이야?”

“응, 타이밍 잘 맞춰서 왔네. 검사는 잘했어?”

“응, 덕분에.”

500mL 물 한 병을 말끔히 비워낸 승오는 페트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곤 의진의 머리통에 손바닥을 올려 쓰다듬어주었다.

“한 타임만 더 하면 오전 훈련 끝나.”

“응, 그건 그렇고 너 혹시 유찬이란 애 알아?”

의진은 이곳으로 오면서 내내 목걸이에 짤랑거렸던 이름을 되새겼다. 승오를 만나자마자 그 아이에 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확실히 승오와 연관된 아이가 맞았는지 그는 놀란 얼굴로 의진을 내려다봤다.

“네가 유찬이를 어떻게 알아?”

“훈련장 돌아서 오다가 풀밭에서 만났어.”

“아… 틈만 나면 거기로 나간다고 하긴 하더라.”

“어떻게 알게 된 애야? 혹시, 그때 만난 거야?”

그때라면 ‘도시’에 갇힌 의진을 쫓아가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승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진의 손목을 끌었다. 그리곤 작게 마련된 벤치에 조심스레 앉혔다.

“응. 그런데 도무지 혼자 둘 수가 없겠더라고. 태준이한테 부탁해서 데려와달라고 했어. 누나는 대충 눈치챘겠지만, ‘그곳’에 있고.”

“……그럼 그 아이도.”

“김… 도훈이 케어 해주는 거 같았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의진은 승오의 말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혹여 저처럼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의진의 옆에 앉은 승오는 움츠러든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중에 나랑 같이 유찬이 보러 가자. 꼬질꼬질한 게 꽤 귀엽지?”

승오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의진도 허벅지에 올려진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감싸는 손의 온기가 잡생각으로 빠지려는 의진을 건져 올린 셈이었다.

“응, 귀엽더라. 이거 주고 싶었는데 깜빡했어.”

캐러멜 하나를 꺼내든 의진이 승오를 보며 말했다. 승오는 그 작은 캐러멜을 빼앗아 종이 껍질을 벗겨냈다.

“내가 하나 먹어도 돼?”

“그럼. 네 손에 들려있으니까 엄청 작아보인다.”

의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승오는 곧바로 캐러멜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의진의 턱을 쥐고 키스했다.

“……!”

침샘을 콕콕 자극할 만큼 아찔한 단맛이 혓덩이에 맺혀 넘어왔다. 의진은 캐러멜의 묵직한 단맛을, 승오는 의진이 만들어내는 가이딩 에너지의 짜릿한 감각을 경험했다.

“하… 여울쌤이 보면,”

“안 봐. 이럴 거라고 미리 얘기해놨어.”

조그마한 캐러멜은 금방 녹아버렸다. 잠시 떨어진 틈에 의진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승오는 다시 의진의 턱을 제 쪽으로 돌리고는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달콤한 향의 가이딩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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