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숙소로 돌아와 의진의 두려움이 진정될 때까지 문 앞에 서서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옷자락을 쥔 손에 차츰 힘이 풀려갈 때쯤 승오는 등을 쓸어주는 걸 멈추고 몸을 떼어냈다. 다행히 울진 않았는지 살짝 붓기 있는 눈은 건조하기만 했다.
“괜찮아?”
“…응, 고마워.”
“은후한텐 내가 나중에 잘 설명할게.”
땀 냄새가 약간 묻은 승오의 품은 포근했다. 다시금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불안한 숨을 뱉은 의진이 번뜩 눈을 뜨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거, 어디 갔지?”
“…뭐?”
지혜가 준 인형. 분명 바닥에 나뒹군 것까진 봤는데, 그 후가 기억나질 않았다. 의진은 비어있는 카디건 주머니를 몇 번을 뒤적거리더니 허망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은 그 인형에 의지해볼까 싶었다. 그랬었는데. 지워지지 않는 과거에 벌벌 떠느라 금방 받은 선물마저 잊어버렸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입술을 꾹 깨문 의진 앞에 승오는 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쳤다. 커다란 승오의 손바닥에 놓인 고래는 의진에게 있을 때보다 더 작아 보였다.
“이거 찾아?”
“……어떻게, 내 건 줄 알았어?”
의진의 질문에도 승오는 별말 없이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딱히 능력을 쓴 건 아니었고, 의진이 전에 들고 온 손뜨개 담요와 같은 실로 만든 거 같아서 주워온 것이었다. 고래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얼굴은 아까보다 침착해져 있었다.
“그 박사님이 주신 거야?”
“아, 응. 악몽 꾼다니까 주셨어.”
“귀엽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승오가 가져온 도시락을 앞에 두고 의진은 고래 인형을 바라보며 밥알을 깨작거렸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어차피 먹어봤자 금방 게워내기도 했고. 그저 직접 식당에서 도시락을 받아왔을 승오의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 먹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였다.
아까 전 은후를 봤을 때 마주했던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해서 괜히 물로 목을 축이는 의진이었다. 승오는 식사에 집중 못 하는 의진에게로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응.”
의진은 도시락 뚜껑을 덮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먹는 것보다 승오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그 고래 인형의 효과는 뭐래?”
잠시 적막이 감돌던 주방에 승오의 물음이 떠올랐다. 의진이 인형을 볼 때 차분해지는 걸 보고선 주제를 돌린 거였다. 의진은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악몽을 먹는대.”
“풉, 뭐?”
다소 귀여운 역할에 승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의진도 낮은 웃음소리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얘 주식이 악몽이라서, 내가 나쁜 꿈을 꾸면 먹어준대.”
“좋은 애네. 이 친구 이름은 뭐야?”
머리 부분에 달린 눈을 제 쪽으로 돌린 의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너랑 같이 정하려고 아직 생각 안 했어.”
“나랑?”
“응, 그러고 싶어서. 뭐가 좋을 거 같아?”
짧은 손톱이 콕콕 볼을 찔렀다가 등을 찔렀다가, 꼬리를 쭈물거렸다. 승오는 꽤 파랗고 통통한 고래와 의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 먹은 도시락과 의진 몫의 도시락을 겹쳐 올리곤 말했다.
“승진이.”
“…뭐?”
“우리 둘 이름 합친 거.”
가만히 듣고 있던 의진은 정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나름대로 고심 끝에 이야기하긴 했으나 큰 반응을 바라고 말한 건 아녔었어, 승오는 순간 얼굴을 굳히고 의진을 바라봤다. 조금 많이 그리웠던, 예전의 의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게 뭐야. 진짜 웃겨.”
“……그런가? 목표 있어 보이고 좋지 않아?”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웃던 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름 승진이로 하자.”
승오는 고래 인형을 들고 피식대는 의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 웃음에서 까마득해져 버린 행복감을 느꼈다.
*
“저기, 승오야.”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고서 다시 밖을 나가는 승오를 불러 세운 의진이 쭈뼛대며 말꼬리를 늘렸다.
“오늘 늦게 와?”
“아니. 금방 올 거야, 왜?”
“……그냥.”
오후엔 훈련이 아닌 팀장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정말 금방 다녀올 거긴 했지만. 승오는 손톱을 틱틱, 괴롭히는 보통 크기 손을 붙잡고선 허리를 숙였다. 자석처럼 맞붙는 입술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춘 후 의진과 시선을 맞췄다.
“오래 안 걸려. 갔다 와서 보자.”
“어, 으응.”
의진은 열 오른 볼을 숨기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거리는 머리통을 한 번 흩트린 승오가 문고리를 열고 숙소를 나섰다.
“부르셨습니까.”
전략기획본부실을 찾은 승오는 자리에 앉아있는 팀장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그가 무슨 연유로 저를 불렀는지는 대충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안내받은 곳에 앉은 승오는 각 잡힌 정장에 먼지 한 톨 올라가 있지 않은 어깨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네, ‘도시’ 소탕과 관련된 겁니까?”
“방향을 틀 생각이야. 그들의 수장 천음을 잡아들이면 ‘도시’는 자연스럽게 없어지지 않겠나.”
“…그럼,”
승오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들은 아직 천음을 몰랐다. 이곳 센터에 있었던 천음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는 존재였다.
“일단 천음, 그자를 잡아내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자가 다스리고 있는 군대도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자네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네만.”
“…….”
“지의진 요원은 ‘도시’에서 생존한 유일한 가이드야. 그리고, 자네는 천음을 상대한 유일한 에스퍼고.”
팀장은 의진의 기억과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세우려는 계획인 듯했다. 그게 가장 확실하고 승기를 쥘 방법일 테니 이해는 갔다. 그렇지만,
“지의진 요원이 그곳에 있었다고는 하나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자기가 보고 겪은 것을 스스로 말하라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돼.”
승오가 고개를 들었다. 팀장은 승오를 빤히 응시했다. 타인의 생각과 과거까지 읽을 수 있는 정신계 에스퍼. ‘도시’ 안에 갇혀있던 의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과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지 않은가.”
“저 보고, 멋대로 의진이의 머릿속을 읽으라는 말입니까?”
“주승오 요원.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럼 하염없이 지의진 요원을 ‘도시’ 안에 가둬둘 셈인가?”
“…….”
크게 숨을 쉰 팀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울였다.
“지의진을 망친 건 ‘도시’ 그자들이야.”
“…….”
“상대하기 위해선 때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마주할 줄 알아야 해.”
“그렇지만….”
“그게 설령 자신의 파트너를 갉아먹는 짓이라고 해도.”
“…….”
“천음이, 그가 세운 ‘도시’가 크기를 키워 이 나라를 지배하기 전에 막아야지.”
팀장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나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꼭 의진이 필요한 걸까.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그게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지 않나. 나라를 지키는 것. 목숨을 바쳐 평화를 유지하는 것.”
전략기획본부를 나온 승오는 뒷머리를 헝클였다. 최정예 팀원들을 모아 작전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이었다. 좀 더 섬세한 ‘도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의진이었고. 승오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뒤로 몸을 물렸다. 그리곤 예전에 도훈과 마주친 적 있는 자료실을 바라봤다.
김도훈은 저기서 어떤 자료를 가져간 걸까. 눈살을 살짝 찌푸린 승오가 다시 앞서 걸어갔다. 그가 서울 센터를 헤집었듯, 승오도 그가 지나간 흔적 모두를 좇을 거였다.
“의진아, 나 왔어.”
승오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숙소 문을 열었을 때 욕실에서 의진이 부리나케 나왔다.
“금방 왔네?”
“응, 뭐 하고 있었어?”
옷 소매로 입술을 닦은 의진은 안아달라는 의미로 팔을 뻗었다. 자연스레 의진을 끌어안은 승오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가이딩 에너지에 살짝 미소 지었다.
“…네 생각.”
“확실해?”
“그럼.”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치고 입술이 부딪혔다. 츄으읍, 춥. 몇 번 도독한 살을 문지르고는 서로의 숨을 삼키기 위해 혓덩이가 얽혀왔다. 의진은 승오의 두툼한 어깨를 쥐고서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의진의 얄쌍한 턱을 쥐고 혀를 밀어 넣던 승오는 골반과 엉덩이를 훑고서 번쩍 들어 올렸다. 익숙해진 행위에 의진도 놀라지 않고 키스에 집중했다.
방으로 향한 승오는 의진을 내려놓은 뒤 빠르게 잠옷 단추를 풀었다. 작은 알갱이 같은 단추들은 승오의 손놀림에 차례대로 엮여있던 틈과 멀어졌다. 일정이 끝난 후 매일 같이 나누는 입맞춤은 단비와 같았다. 복잡한 생각을 휘발시키는 감각들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흐읏….”
벗겨진 의진의 전라는 이제 승오의 흔적만으로 가득했다. 채도 다른 열꽃을 품은 몸 위로 입술이 내려앉자 의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 소름이 돋아 바짝 세워진 유두를 빨던 승오는 훈련복 상의 지퍼를 내리고 빠르게 탈의했다.
부드러운 살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의진이 느낄만한 감도로 애무하니 반쯤 발기한 성기가 아예 세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나른한 가이딩 에너지는 맘껏 상판을 유영하는 승오의 혀로 감겨들었다.
“응… 간지러워, 좋아….”
“그런 거 같아. 느껴져.”
벚꽃색 유두는 쪽쪽 빨리기 무섭게 색을 붉게 물들였다. 홀쭉한 배꼽에 혀를 굴린 승오의 머리채를 살짝 쥔 의진이 허벅지를 더 벌렸다.
“아… 승오야. 으흣!”
“따뜻하다, 의진아.”
배꼽에 닿았던 입술을 더 벌리면 쿠퍼액을 뱉고 있는 귀두가 닿아왔다. 딱딱해진 좆대를 한입에 문 승오가 무너진 발음으로 의진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