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마지막으로 천음의 안에 사정한 도훈은 책상 위로 내려왔다. 그대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천음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여린 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피부와 대비되는 더운 숨이 잔뜩 뭉개졌다.
천음은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천박하게 아래를 빨아대는 도훈을 감상했다. 단정한 얼굴에 정액이 범벅이었다.
“흐응… 으응….”
“이제 화가 좀 풀리십니까.”
“글쎄요.”
몸을 일으킨 천음은 옷 소매로 타액으로 흥건한 입술을 닦고서 도훈을 내려다봤다. 아래는 발가벗은 채 무릎 꿇고 있는 차림은 가히 화를 누그러뜨릴 만한 절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 아래엔 의진을 연구한 자료가 깔려있었다.
“이런 식의 아양은 이제 사양이에요.”
곱다란 발이 정액으로 범벅된 얼굴을 꾸욱, 꾸욱 짓눌렀다. 도훈은 그저 아무 감흥 없이 천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러한 굴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음에도 그 애송이 때문에 나를 멀리한다면,”
천음에게 짓밟힐 수치심 따위는 존재한 적조차 없었으니까.
“나에 대한 충성보다 그깟 가이드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짙다면,”
천음에게 짓밟힐 수치심 따위는 존재한 적조차 없었으니까.
“그 감정을 처절하게 짓뭉개주겠습니다.”
옷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도훈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도훈은 온갖 체액으로 난잡해진 서류들을 모아 파쇄시켰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종이들을 빤히 보던 그는 신호음이 울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DEAD. 빨간 글씨의 네 글자가 실험관 앞면 모니터에 반짝였다. 전투 능력을 비교하기 위한 경기에서 패한 에스퍼 한 명을 데려다 실험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에너지를 주입하다 중단된 탓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
도훈은 오늘 제대로 해낸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실험 실패로 에스퍼를 죽였고, 의진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천음을 화나게 했다. 책상 뒤로 빠진 의자에 털썩 앉은 도훈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엉킨 실타래에 갇힌 부유물이 된 것 같았다. 예전 천음을 만나기 전 느꼈던 패배감이 어제의 감정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로 소각시켜버리세요.”
연구실에서 나온 도훈은 앞에서 대기 중이던 방역 요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실험실을 빠져나온 그는 정처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어차피 ‘도시’는 아주 작아서 어디를 걷든 천음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배리어가 보이는 끝까지 걷던 그는 의진과 함께 들꽃을 꺾었던 곳에서 멈춰 섰다. 그새 건물이 올라가 고개를 내밀었던 풀은 콘크리트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이곳에 제 감정을 묻어두겠습니다.”
도훈은 어렴풋이 알았다. 의진에게서 느꼈던 감정은 아무래도, 사랑…과 비슷했던 거 같다. 그를 보면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늘 웃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영원히 제 편이라 말했던 입술에 어쩌면 입을 맞추고 싶었을지도.
“…….”
멎어가는 숨에 입을 맞췄던 순간을 떠올린 도훈은 저도 모르게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생명력을 잃어 까슬하기만 했던 감촉. 정말로 의진에 대한 모든 걸 이곳에 묻어두고 기억하지 않아야겠다 다짐했다. 그게, 의진을 그나마 지옥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발 디딘 땅을 내려다본 그는 금방 몸을 돌려 가장 커다란 검은색 건물로 향했다. 천음과 제가 존재하는 ‘도시’의 중심으로.
*
승오가 돌아올 때까지 의진은 소파에 앉아 가만히 멍을 때리거나 억지로 낮잠을 잤다. 대부분 ‘도시’에 있었던 그 끔찍한 일이 꿈에서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짤막하게 꿈을 깨어나면 욕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그러다가 다시 잠들고, 다시 꿈을 꾸고…. 피폐해져 가는 일상이었지만, 승오가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한 번 더 토를 한 뒤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던 중 훈련이 끝난 승오가 숙소로 돌아왔다. 현관에서부터 그의 피로가 뭉실뭉실 느껴졌다. 의진은 입을 대충 닦아내며 쏜살같이 그에게로 달려갔다.
“승오야.”
“어, 잘 있었어?”
“응.”
의진은 급하게 에너지를 풀었다. 승오가 느끼는 피곤함이 완전히 지워지도록. 승오도 그걸 느꼈는지 무거운 더플백을 내려놓고 의진을 끌어안았다. 휘리릭 들리는 몸이 전보다 부쩍 가벼워졌다.
“야, 그렇게 갑자기 안으면….”
“너 너무 가벼워진 거 같아.”
“…원래 가이드는 체중 조절이 필수야.”
그를 번쩍 안아 든 승오가 눈을 맞추며 말하자 부끄러운지 궤변을 늘어놓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본 승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고개를 빼 뽀뽀를 재촉했다.
“…….”
의진이 승오의 허리에 종아리를 감자 안정적인 자세가 됐다. 의진은 목에 팔을 감고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쪽쪽. 간지러운 입맞춤 소리가 맞부딪힌 입술에서 들려왔다. 눈을 슬그머니 뜬 승오는 아까보다 더 밝게 웃었다.
의진과 마주하자마자 정신이 개운해지고 뻐근한 근육통이 사라지는 게, 역시 제 가이드다 싶었다.
“살 거 같다.”
“그래? 다행이네.”
“너랑 이러고 있는 것도 꿈 같고.”
“그건 나도 그래.”
의진도 승오를 따라 조심스럽게 웃었다.
“아마 이번 주에 팀장이 새로운 팀을 짜서 소집할 거 같아.”
“팀…이라고.”
“괜찮겠어?”
의진을 내려놓은 승오가 다소 걱정되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직 의진의 트라우마가 거셀 뿐만 아니라 또 한 번 의진을 끌어들이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우리를 처치한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겠지. 네가 그걸 훼방시켜.’
의진의 눈동자는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아무래도 들어가는 건,”
“아니.”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가 뱉은 그는 승오의 팔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의진아.”
자신은 그 팀에 들어가야 했다. 천음의 말을 거역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자의 잔혹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수긍할 것이었다.
“내 옆엔 네가 있잖아. 그리고 나도 언제까지 이렇게 약하게만 있을 순 없어, 너한테도 미안하단 말이야.”
“뭐가 미안해.”
승오와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워 고개를 돌렸다. 의진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잦은 구토로 인해 식도가 손상되었는지 따끔했다.
“걱정하지 마. 나 다시 강해질게.”
“…지금도 충분히 강해.”
승오는 의진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품에 안겨 다독거림을 받던 의진은 눈을 감고 마주 안았다.
‘얼간이도 아니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는 거지?’
천음의 목소리. 천음의 일그러진 표정. 제게로 걸어오는 천음의 발걸음. 눈이 가려진 에스퍼가 그 순간 분수처럼 피를 터뜨리며 쓰러졌다.
쿵쿵쿵. 심장이 뛰었다. 쏟아지는 검붉은 피가 제게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죽는 거야. 지의진. 네가 똑바로 하지 않아서.’
‘아, 니야…. 아니에요…. 잘할게요. 제발….’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그러다가 말을 할 때마다 목구멍에서도 펑펑 피가 터졌다. 천음은 그것을 보고 비웃었다. 지독하리만큼 추악한 꿈이었다. 의진은 엉금엉금 기어 쓰러진 에스퍼에게로 걸어가 입을 맞추고 다리를 벌렸다.
‘아… 흣, 윽… 아윽…!’
약에 지배된 좀비 같은 에스퍼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끊임없이…. 제 다리를 쥐는 손길엔 이성이라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섭고 끔찍했다.
‘저런, 딱해라.’
걸레처럼 쓰고 버려진 의진을 거둔 천음이 말했다. 그가 입을 맞추려 다가올 때 의진은 벌떡 꿈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단전이 너무나 아팠다. 의진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을 쉬기 위해 헉헉거렸다.
“아흑….”
“의진아, 왜 그래.”
의진의 신음에 기민하게 반응한 승오는 웅크린 의진을 안아 들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승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으흑, 싫어.”
“의진아!”
“아니야, 싫어. 싫어….”
발버둥을 치는 의진을 끌어안은 승오는 능력을 사용했다. 곧바로 진정이 된 몸이 완전히 늘어져 승오에게 안겼다.
“……의진아.”
“승오야….”
의진의 눈 옆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걸까. 승오는 엄지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고서 그가 안심할 수 있게 몸을 토닥였다.
“괜찮아, 진정해. 여기 우리 숙소야.”
“키, 키스해줘….”
승오의 뺨을 감싼 의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승오는 말이 끝나기도 전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가이딩 에너지 대신 의진의 생각이 들렸다. 승오는 눈을 질끈 감고 키스하는 의진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느 정도 입술을 물어오니 허우적거리던 혀 놀림은 평소와 같이 잔잔해졌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봐도 돼?”
입술을 뗀 승오가 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의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예상하는 것과 모든 걸 마주 보는 것엔 엄청난 간극이 자리했다. 승오에게 그 지옥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악몽을 겪는 건 저 하나로 족했다.
“…싫어. 절대, 절대 그러지 마.”
“……알았어. 안 그럴게. 절대.”
“그냥, 그냥 나 좀 안아줘. 승오야.”
승오의 너른 등을 팔 뻗어 안은 의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꿈이어서 다행이다. 눈을 뜨면, 네가 있어 다행이다. 의진은 등을 쓸어주고 토닥여주는 손길에 감사했다. 악몽을 꾸더라도 승오가 제 곁에 있어, 너무나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