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승오야, 미안해.”
“뭐가 미안해. 괜찮아. 너도, 나도 무사하면 됐어.”
승오는 품에 안겨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의진을 끌어안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폭주 전조에 거의 다다랐던 몸을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그토록 그리웠던 의진과 의진의 가이딩 에너지를 마주하고 있는데도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걱정되어 기쁘지 않았다.
“의진아,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으윽, 흑….”
동그란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저를 다스리기 위한 행동도, 상대를 현혹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도 아니었다. 그저 홀로 괴로웠을 모든 걸 다독여주는 순수한 애정이었다. 의진은 정말 승오에게 돌아왔다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어쩌면 지금부터 승오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었기에. 그간 응어리졌던 그리움을 마음껏 풀어낼 수도 없었다. 승오에게 안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졌다.
“…….”
겨우내 시달렸던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흐느끼는 의진이 안쓰러웠다. 내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이렇게 울었을까. 거기선 울 때 안아 줄 사람도 없었을 텐데. 얼마나 외로웠을까. 승오는 드러난 목덜미를 쓸어주며 고개를 들게 했다. 그새 눈물길에 함빡 젖어버린 얼굴이 승오를 바라봤다. 잘게 떨어지는 눈물에도 목이 메어왔다.
“얘기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돼.”
“승오야….”
의진의 갈라진 입술이 달싹였다. 말하고 싶었는데,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대며 공기만 뱉어낼 뿐이었다. 이것 또한 천음의 영향인 듯싶었다. 벌써 의진을 좀먹으려 들었다.
엄지로 짓무른 눈가를 닦아준 승오는 마인드 리딩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의진을 안아줄 뿐이었다. 의진이 하고 싶은 이야기 무엇인지. 그곳에서 어떤 악행에 고통스러워했는지. 나를, 얼마만큼 그리워했는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의진이 겪을 것들을 읽어내고 싶었지만, 의진과의 재회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
비슷한 온기의 이마가 맞닿자 의진이 눈을 감았다. 승오에게 자신이 생각이 들릴까. 의진은 눈을 감고 아직도 눈앞에 그려지는 도시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으아아악!’
‘제대로 해. 네가 뻗대면 뻗댈수록 죽어가는 건 네가 아니라 이것들이야.’
‘하, 할게요. 하면, 하면 되잖….’
천음의 목소리, 얼굴이 가려진 채 고막이 터져 피를 흘리는 에스퍼… 죽어가는 에스퍼를 붙잡고 억지로 행했던 가이딩. 떠오르는 모든 기억은 역겹고 천박했다. 의진의 어깨가 칼바람 앞의 겨우살이 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 윽, 읏… 하, 제발… 아, 아아…!!’
‘츄읍, 흐아. 하….’
의진이 기억하는 것들은 아마 뇌리에 깊게 새겨진 충격적인 장면이 대부분인 듯싶었다. 사실이었다. 가축과도 같은 생활을 하며 가이딩 에너지만 뽑아대는 전지 역할이었으니까.
“…우욱…!”
끔찍한 기억은 결국 토악질로 끝나고 말았다. 승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승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생각들만 혀끝에서 뭉개져 바스라 졌다.
승오는 의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밀착한 틈으로 의진의 가이딩 에너지가 물씬 흘러들어왔다. 당연한 것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고착된 버릇처럼 의진의 기운이 승오에게로 안겨들었다.
“많이 힘들었지.”
“……승오야.”
의진은 입술을 꽉 물었다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고, 살기 위해 내게 달려드는 사람들이 너무나 무서웠다고. 눈을 감고 떴던 자그마한 쪽방은 미치게 답답했다고. 모든 걸 퍼붓고 싶었으나 고개만 주억거릴 수 있었다.
“다 괜찮아.”
“정말… 정말 그럴까?”
나, 돌아가도 되는 거야? 의진이 떴던 눈을 다시 사르륵 감자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승오는 자잘하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자. 우리가 있던 곳으로.”
의진을 지킬 것이다. 이제 다시는 그를 위한다는 핑계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반역으로 내몰려도 의진만은. 기적처럼 제 곁으로 돌아온 의진만큼은 지켜낼 거라고 승오는 다짐했다.
“내가 이번엔 꼭, 반드시 지켜줄게.”
“…승오야, 나….”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의진의 뜨거운 이마에 입을 맞춘 승오가 굳은 의지로 말했다. 따뜻한 입맞춤에 의진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주승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승오는 의진을 안은 채 뒤를 돌았다. 태준과 지환이었다. 바람 에스퍼가 무너뜨린 두꺼운 나무 기둥을 넘어 승오 쪽으로 온 태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죽은 듯 보이는 시체 여러 개가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다.
“어떻게….”
“하, 갑자기 승오 씨 GPS가 잡히지 않아서요. 마지막 신호가 이곳이라 혹시나 하고….”
승오는 산 초입 폭발 때를 기억해냈다. 아마 그때의 충격으로 휴대전화가 부서진 것 같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고, 그 이후로 의진을 찾는 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어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틀 정도가 지나있었으니, 그때부터 태훈과 지환은 이곳으로 달려온 듯 보였다.
의진은 자기도 모르게 승오의 품에 안겨 몸을 움츠렸다. 의진에겐 ‘도시’도 EGI도 전부 무섭고 두려웠다. 숨어든 그를 내려다본 승오가 양팔로 더 의진을 가렸다.
“지의진, 찾은 거야?”
“어… 근데 너희만 온 거 맞아?”
“팀장 지원으로 일단은 확인 차 우리끼리만 왔어. 무슨 일 있으면 요원들 몇 명 더 보내기로 했었는데, 필요 없는 거지?”
질문에 숨을 몰아쉬며 대답하던 태준이 승오의 품에 안긴 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승오는 태준과 지환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소행이 맞았어.”
“알았어, 일단 이곳에서 나가자.”
“자세한 건 밖에서 얘기해요.”
험난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승오는 자꾸만 고꾸라지는 의진을 부축하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업혀.”
“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나 네 가이딩 받아서 멀쩡해졌어. 하나도 안 힘들어.”
“…….”
“얼른.”
승오의 성격상 업히지 않으면 종일 저러고 있을 걸 알았다. 의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너른 등판에 몸을 기댔다. 곧바로 일어나 허벅지를 감싸는 손이 따뜻했다. 목에 팔을 두른 의진은 아예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얘기 안 해도 돼.”
“…….”
“의진이 너는, 이제 마음 놓고 쉬어.”
이 다정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의진은 팔에 힘을 꽉 주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앞서가는 일행을 따라 걷는 속도가 아까보다 느려졌다.
‘도시’의 공격이 멈춘 터라 대기 중인 군용차도 흠집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뒷좌석에 올라탄 승오가 의진이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찰나의 떨어짐도 불안한지 의진은 손을 뻗어 승오의 팔을 꼭 쥐었다.
“혹시 추우시면 담요 드릴까요? 다치신 곳은 없어요?”
지환은 미리 준비해둔 담요와 물, 휴대용 산소호흡기 등을 건넸다. 담요로 의진을 감싼 승오가지환이 물을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일단 쉬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지금은 그래. 센터로 돌아가면 어쨌든 간에 너희가 입증해야 할 것들이 많아. 전에도 말했지만, 의진이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들 거야.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덮어버리든가.”
“그래, 그러겠지.”
“의진이는 어디서 발견한 거야? 네가 직접 그곳을 들어간 건 아니지?”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거친 땅바닥을 굴러가고 있어 핸들을 바투 쥐고 운전하던 태준이 물었다. 승오는 사이드미러로 태준을 바라보며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어느새 의진은 승오의 어깨에 기대 선잠에 빠져있었다.
지금은 의진에게 편안을 선물하고 싶었다. 생채기 난 커다란 손이 작은 얼굴에 번진 눈물 자국을 조심히 지워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도시. 그 중심에 천음과 도훈이 존재했다. 의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뻔뻔하게 미소 짓는 얼굴을 상기한 승오는 저절로 욕이 나오는 걸 삼켜냈다. 죽음으로 개척해낸 땅에 침을 뱉고 모든 걸 파괴하고 싶었다.
‘돌아와 줘서, 그것만으로도 고마워.’
의진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낀 승오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황폐해진 풍경을 바라보곤 생각에 잠겼다.
‘내가 데리고 올게, 네 누나. 열 밤만 자고 있어.’
‘근데 열 밤만 자면 우리 누나, 정말 다시 올 수 있는 거야?’
‘언젠간 동생 옆으로 돌아갈 거예요.’
제 주제도 모르고 지게 된 책임이 떠올랐다. 쓰러져가는 컨테이너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지내던 소년. 의진을 놓아주면서 ‘도시’ 또한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럼 그곳에 버려진 유찬의 신변 또한 확신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태준아. 세 번째 부탁 들어줄 수 있을까.”
*
적요가 감도는 차 안은 달리고 달려 어느덧 센터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파란 삼림을 마주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의진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 여전히 제 어깨에 기대 꿈 없는 꿈을 꾸고 있을 의진을 내려다본 승오는 가까워지는 EGI 서울 센터를 보고 단조로운 표정을 지었다.
“곧 도착이야.”
“일단 팀장님한테 연락 넣어놨어. 후문으로 들어가면 돼.”
“오케이.”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싶어도 완전히 다른 길에 들어선 것이다. 천음이 그토록 원하는 정의가 몰살하는 길과 승오가 소망하는 악(惡)이 파멸하는 길. 그 갈림길에 선 승오와 의진은 이제 새로운 걸음을 떼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