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49)화 (49/114)

#49

엉망이었던 의진의 몸은 남겨진 울혈을 제외하곤 깨끗하게 씻겨진 채 침대에 눕혀졌다. 암전된 꿈에서도 얼굴 없는 그림자에게 살을 뜯기고 아래를 범해지는 추악한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 말라고 외칠 의지도 소실해 무력하게 다리를 벌렸다.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행위를 이어가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의진을 덮쳤다.

“으윽….”

가슴을 움켜쥔 의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모로 누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밭은 숨을 내쉬자 단전이 거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아예 몸을 엎드리고서 시트를 쥐어짜고 있자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진 씨.”

“하아….”

“의진 씨!”

들어온 사람은 도훈이었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 작전을 개시하기 전, 아침 일찍 의진을 찾았다. 혹여 어디 아프진 않을까, 마지막 걱정 차원에서 방문한 거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자마자 도훈은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입술이 하얗게 질린 그는 도훈을 보고선 고개를 휙 돌렸다.

“어디 아파요?”

“숨이,”

도훈은 시선을 내려 가슴을 틀어쥔 의진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이은 가이딩으로 에너지가 떨어진 와중에 천음의 힘이 들어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옷이 죄다 구겨질 만큼 하얗게 질린 주먹을 바라보던 도훈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자신의 능력을 쓴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걸 의진이 달가워할까.

“너무… 아프,”

결국, 그는 의진의 눈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바짝 마른 입술에 키스했다. 도훈의 청화한 수풀 내음이 은은하게 방안에 퍼져나갔다. 혀 하나 닿지 않는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까칠한 입술 결을 느끼며 도훈은 최대한으로 에너지를 풀었다. 의진에게는 그리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

천음의 에너지가 안에 깃들어서 그런가. 의진은 몸부림을 멈추고 가슴을 쥔 손에 힘을 뺐다. 거짓말처럼 단전을 비틀었던 통증이 사라졌다. 의진의 호흡이 돌아온 걸 눈치챈 도훈은 맞물렸던 입술을 떨어뜨렸다.

“…….”

의진은 도훈의 오묘한 호박색 눈동자를 보자 눈물이 났다. 한때 동경했던 눈동자가, 이제는 씻을 수 없는 악몽의 근원이 됐다.

“…미안해요.”

“……흐윽.”

겨우 참아냈던 울음을 토해낸 의진은 도훈의 품에 안겨 오래도록 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분노, 배신감, 서러움, 외로움, 아픔, 슬픔을 내려놓고 그저 옛 기억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도훈은 의진의 몸을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세게, 아주 세게 끌어안고서 마른 등을 토닥였다.

“주승오에게 보내줄게요.”

도훈은 흐느끼는 의진의 뒤통수를 쓸어주며 아주 낮게 속삭였다.

*

도훈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의진은 다신 입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EGI 서울 센터 훈련복을 갖춰 입었다. 욕실에 비치된 거울로 옷매무새를 확인하던 의진이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너무 많은 게 변해있었다. 몰골이 수척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피부는 생기를 잃었으며 이제 제 안엔….

의진은 어딘가 불편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의진 씨, 이제 나와요.”

방문을 연 도훈이 의진을 불렀다. 손에 든 승오의 배지를 목 부분 카라에 매단 그가 한 번 더 거울을 보고선 방을 나왔다.

도훈과 의진은 천음의 방으로 향했다. 늘 맨발로 거닐었던 복도를 스니커즈를 신은 채 걸으려니 어색했다. 살짝 삐걱대는 걸음으로 걷는 의진에게 맞춰 보폭을 좁힌 도훈이 계단에서 손을 내밀었다.

“잡고 올라가는 게 편할 거예요.”

“…….”

어제 종일 혹사를 당한 몸은 안 그런 척하려 해도 다 티가 났다. 걸음걸이가 이상했고 발을 디딜 때마다 얼굴이 움찔거렸다. 의진은 내민 큰 손을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손끝을 붙잡았다.

천음의 방에 도착한 도훈은 크게 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늘씬한 몸에 딱 맞는 검은 슈트를 입은 천음이 문이 열리자마자 의진을 바라본 채 미소 지었다.

“어서 와요.”

“…….”

“도훈 닥터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어요.”

의진에게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천음이 말했다. 도훈은 옆에 선 의진을 쳐다보고는 고개 숙여 몸을 돌렸다.

“…….”

“내 에너지를 가진 기분이 어때.”

“기분 더러워.”

토막 난 말에 천음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분신과 다름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하지.”

“분신? 내가 그딴 걸 원했다고 생각해? 차라리 날 죽이지 그랬어….”

“그럴 순 없지.”

의진에게 사뿐히 다가온 천음이 검지를 치켜들고 판판한 상판을 콕 찔렀다.

“너 죽고 싶지도 않잖아.”

“…….”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만일 죽음의 문턱이 다가오면 선뜻 그곳으로 넘어가지 못할 거였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도시’를 무서워했던 것처럼.

“센터로 돌아가 너는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

“뭐…?”

움찔거리는 의진의 얼굴에 푸흣, 웃음을 터뜨린 천음이 손을 뻗어 마른 어깨를 잡았다.

“단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고.”

천음의 목소리가 고막과 달팽이관을 훑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주승오가 너를 구해줬다고.”

소리가 느껴지다니. 의진은 눈을 크게 뜨고 천음을 바라봤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의 그 납작한 몸이 펑, 터져버릴 거야.”

“…….”

“아니면 네 옆에 있는 주승오의 귀가 터져나갈 수도 있고.”

허리 숙여 간지럽게 속삭인 천음이 푸흐흐, 웃으며 의진과 눈을 마주했다.

“센터로 돌아가게 된 걸 축하해.”

의진은 저 말에 복종해야 하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보자 금방이라도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다음에 또 봐.”

*

‘도시’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던 의진의 파장이 어느 기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승오는 제 앞을 가로막는 울창한 나뭇가지들을 헤쳐가다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수 없이 능력을 사용해 무언가라도 읽어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아니야,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야만 이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유하가 제 마음을 잘 전달해줬으리라. 주먹을 한 번 꽉 쥔 승오가 험난한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산은 으슬으슬한 추위까지 동반됐다. 승오는 반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질 정도의 바람이 몰아치자 곧바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흙에 꽂혔다.

“…….”

그리고 또다시 적막. 승오가 고개를 돌리며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부터 멀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우지끈, 밟자 고요했던 바람이 화악! 여러 방향으로 나부꼈다.

“윽!”

얼음 조각은 살갗이 베일 만큼 첨예했다. 그렇다는 건 단순한 기후 변화가 아니었다. 에스퍼의 공격임을 인지한 승오는 접근해오는 에스퍼가 몇 명인지 파악했다. 하나, 둘… 셋… 다섯이 넘어가자 단단한 턱이 악물어졌다.

“공격 개시.”

누군가의 목소리로 시작된 무분별한 폭격에 승오는 하나둘 숨어있는 위치로 추정되는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정신을 조종해 공격을 멈춘 것 같다가도 그새 능력을 풀어내곤 다시 공격해왔다. 주변에 가이드도 함께인 모양이었다.

“침입자 발견. 서쪽 16시 방향.”

무기를 소환해낸 에스퍼가 승오가 있는 방향으로 장총을 난사했다. 전보다 전투 실력이 월등해진 에스퍼들의 맹습에 승오 혼자 그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간신히 탄막을 피한 승오는 자신을 추적해 다가오는 에스퍼에게 팔을 뻗었다.

“윽…!!”

남자의 헬멧을 강제로 벗겨내고 시선을 맞추자 손쉽게 남자는 이지를 상실했다. 승오는 곧장 ‘주승오를 사살하라.’라는 임무 명령 위에 ‘총알을 맨몸으로 막을 것.’이라는 암시를 덧씌웠다. 자세가 무너진 에스퍼는 곧장 자신이 왔던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승오가 그를 방패 삼아 몸을 가린 뒤 리볼버로 탕, 탕 적을 제거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이딩 없이 에너지를 과다하게 소모한 탓이었다. 숨을 내쉰 승오가 빠르게 다가오는 빙결 에스퍼의 정신을 조종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마지막 총알이 발사되자 남은 적은 단 한 명뿐이었다.

“크읏…! 머리가…!!”

일순 승오의 까만 눈동자가 어두운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폭주 전조였다. 찌르는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의진이 있는 도시가 바로 눈앞에 아른거렸으니까. 고개를 저은 그는 저 멀리서 불어오는 토네이도를 없애려 남은 에스퍼를 추적했다.

“죽어.”

공포에 젖어 덜덜 떨던 바람 에스퍼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쓰러지는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쿵. 마지막 에스퍼의 숨이 끊어지자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

정신계 에스퍼의 폭주는 다른 에스퍼들과 달리 스스로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정신을 해리시켜 죽음으로 이끌거나 ESP 에너지가 역류하면 에스퍼 본인의 자아 자체가 파괴될 수 있었으니까.

폭주 직전의 승오가 뱉는 숨이 얕았다. 무너지듯 쓰러진 승오는 까마득하게 시야를 메운 숲을 바라봤다. 정면만을 바라보던 시선이 간만에 하늘로 향했다. 빽빽한 숲 때문인지 하늘이 무너진 것인지 새까맣기만 했다.

결국, 마지막이 다가오는 듯했다. 의진을 만나지 못한 채. 아지랑이만 쫓은 채.

“…승오야.”

익숙한 목소리에 승오가 눈을 번쩍 떴다. 쓰러진 에스퍼들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내려왔다.

“주승오.”

바싹 마른 작은 몸, 핏기없는 입술, 슬픔으로 점철된 밤색 눈동자.

“…의진아.”

신기루인가. 승오는 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번만 더 목소릴 들려줘. 버석한 성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장이었는지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승오, 승오야…! 어떡해….”

신기루가 아니었다. 쓰러진 승오가 시야에 들어오자 의진은 높은 경사를 내달렸다. 의진이 달려오자 승오는 팔을 뻗어 그를 단번에 안았다. 살을 맞대는 순간 확신했다.

급속도로 몸에 퍼지는 이 짜릿한 감각. 애정을 담아 끌어안은 온기. 색조를 잃어가던 승오의 눈동자는 꽃이 피듯 맑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아….”

“지의진….”

의진이 승오의 손을 맞잡자 폭발적인 가이딩 파장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었던 격렬한 가이딩이었다. 눅진하고 끈적거렸던 승오의 머릿속에 의진이 불어넣은 파랑이 밀려들었다. 점점 의진으로 젖어가는 육신은 새로 태어난 듯 가볍고 상쾌하기만 했다.

“정신이 들어?”

의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완전히 회복된 승오가 의진을 부서지도록 끌어안았다. 안고 있었음에도 의진이 모래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

의진은 대답 대신 발꿈치를 들어 승오의 뺨을 감싸 입을 맞췄다. 입술로 전해지는 가이딩이 마치 새 생명을 부여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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