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41)화 (41/114)

#41

소년은 승오의 말을 듣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가 후다닥 어딘가로 뛰어갔다. 자그마한 서랍장에서 부랴부랴 무언가를 꺼내온 소년이 색 바랜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우, 우리 누나는 이렇게 생겼어. 나랑 똑같이 주근깨가 있고, 또 머리는 빨갛고….”

“……그러네.”

“근데 열 밤만 자면 우리 누나, 정말 다시 올 수 있는 거야?”

“그래, 인마.”

승오는 그 사진을 받아들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리곤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음은 생각보다 더 악독한 존재였다. 반드시 그 오만함이 잘못됐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

“형은 뭐 하는 사람인데?”

어느덧 소년은 승오를 형이라 불렀다. 아직 어린아이기는 한 모양인지 불안이 사라지자 경계심까지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나? 나라를 지키는 사람.”

“우와….”

“그건 그렇고, 그럼 혹시 너 이런 거 본 적 있어?”

승오는 전투복 안쪽 주머니에서 ‘도시’ 에스퍼에게서 얻은 양피지를 꺼내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일반적인 곳이라면 건물마다 주소가 붙었겠지만, 여긴 그런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 관할지 밖인 것 같았다. 이게 위치를 나타내는 암호일 경우 소년의 마을에서 쓰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건 위치 좌표야. 우리는 이걸로 길을 찾아.”

“그럼, 이게 뜻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어?”

으음…. 승오의 말에 소년은 작은 얼굴을 구기며 양피지를 들여다봤다. 또박또박하지 않은 글씨체라 어린 소년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경… 경도, 261….”

더듬더듬 숫자를 읽어가던 소년은 문득 이곳 좌표와 비슷하다는 걸 눈치챘다. 엎드려있던 그는 벌떡 일어나 컨테이너 안에 작은 직사각형 창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쭈욱 가면 돼! 그러고 보니 음식을 가져다주는 아저씨들도 매일 저곳으로 사라졌어.”

꼬질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이었다. 승오는 끝이 뿌연 곳을 응시하고는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었다.

“고마워. 너희 누나, 꼭 내가 데려와 줄게.”

“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네가 가기엔 위험한 곳이야. 누나가 그걸 원하지는 않을 거야. 문 잘 잠그고 기다리고 있어.”

“……치이.”

“그런데 너, 이름은 뭐냐?”

밖으로 나온 승오가 무릎을 굽혀 따라 나온 소년과 눈을 맞췄다. 까무잡잡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주근깨가 박혀 있어 꽤 귀여웠다. 의진이 봤으면 잔뜩 귀여워했을 것도 같다.

“성은 유, 이름은 찬. 유찬이야. 누나는 유하.”

“둘 다 예쁜 이름이네.”

승오가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멋스러운 승오의 얼굴과 전투복을 살폈다. 멋있다…. 나중에 누나가 오면 이 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해주리라 마음먹었다.

“너무 늦지 않을게. 울지 말고, 모르는 사람 와도 문 벌컥 열지 말고. 알았어?”

“응….”

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오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곤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쾌쾌한 먼지 바람 냄새가 이는 것도 같았다.

승오는 문을 빼꼼 열고 자신을 쳐다보는 찬에게 손을 흔들고 뒤를 돌았다. 조금 더 홀로 지내야 할 저 어린아이가 걱정되지만, 본인이 늦지만 않으면 될 일이었다. 새로운 짐을 얹은 어깨는 더는 소년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길을 걸으며 승오는 소년이 건네준 사진 한 장을 내려다봤다. 붉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고 카메라가 낯선 듯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녀가 작은 직사각형 필름에 들어가 있었다.

*

의진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이 ‘도시’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으로 삼을만한 존재를 만난 것에 감사했다. 눈을 뜬 그는 제일 먼저 침대 맡에 있는 들꽃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햇빛을 받지 못해 파릇파릇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다 뜨지 않는 눈으로 가녀린 잎을 살살 만진 의진이 히죽 웃었다.

“센터로 돌아가면 공원에 있는 꽃들 좀 내가 돌봐야겠다.”

그곳에 있는 모든 식물을 자생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만은 그냥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게 익숙해지네.”

웃기게도 의진은 좁아터진 쪽방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침대 끄트머리에 놓인 아침을 먹고, 그러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어김없이 새하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이 루트가 이젠 낯설지 않았다.

“저기요.”

“…….”

오늘도 흰색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은 의진의 물음에 침묵했다. 아무래도 의진을 이송하는 중에 잡담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선 입에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들은 신발까지 신고 있는데, 저만 맨발인 거 좀 억울한데요.”

“…….”

차박, 차박. 오늘도 정확히 맨발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는 오십 번의 차박 소리 끝에 실험실에 도착했다. 가운데가 갈라진 문 두 개에 동그란 원형 창문. 어쩐지 닫혀있는 문에서 알 수 없는 소름을 느꼈다.

방역원들이 문을 열자 실험을 준비 중이던 도훈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요, 의진 씨. 잘 잤어요?”

“……네.”

흰 목폴라를 입은 도훈은 의진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오늘부터 의진은 에너지 추출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다는 건 ‘도시’ 에스퍼와 성적 접촉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의진에 대한 아직 정확한 감정을 성립하지 못한 도훈은 복잡한 심경에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여기 앉아요.”

실험관에 들어가기 전 늘 해왔던 수순대로 의진은 소량의 환각제를 맞았다. 평소보다 투여량을 늘린 주사기가 끝까지 의진의 혈관을 뚫고 약을 주입했다.

알코올 솜으로 주사 부위를 문지르고 솜을 덧대 의료용 테이프를 붙인 도훈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의진을 쳐다봤다.

“……오늘은 추출을 진행할 거예요.”

“…….”

의진은 도훈의 가라앉은 분위기로 언뜻 직감하고 있었다. 입 안쪽 볼살을 자근자근 씹은 의진이 고개를 휙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버텨주길 바라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뭐라 더 말하려던 차 의진은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돌았다. 두통에 눈을 감자 도훈은 뒤에 서 있는 방역원들에게 들여보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의진의 마른 팔을 한쪽씩 쥐고 실험관 앞에 세웠다.

멍 자국이 선연한 팔에 자비 없이 전극을 꽂고서 휘청거리는 의진을 실험실에 가뒀다. 환각제 여파 때문인지 의진은 엉금엉금 중앙으로 기어가면서도 벅찬 숨소리를 뱉었다.

“들여보내.”

도훈의 차디찬 음성을 따라 뒷문을 열고 눈을 가린 에스퍼가 들어왔다. 뒷손이 묶여있어 꼭 범죄자를 철창에 집어넣는 것도 같았다.

“Z-37. 가이딩 실시.”

방역원들이 묶여있는 손을 풀어주자 에스퍼는 득달같이 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각성제를 맞은 후라 가이딩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의 목표 등급은 A. 의진이 이 에스퍼를 승격시킬 수 있다면 다른 에스퍼들도 거뜬할 거였다.

“시, 싫…!”

벗길 것도 없는 옷을 입고 있어 속살을 만지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에스퍼의 땀 밴 손바닥이 의진의 허벅지를 매만지고 골반과 옆구리를 마구잡이로 희롱했다. 의진은 몸이 달아오르고 있음에도 토악질이 날 거 같아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육체적인 흥분과 정신적인 흥분은 완전 별개의 것이었다.

“의진 씨, 삽입까진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침착해요.”

도훈의 목소리가 실험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혀를 섞기 위해 제 몸에 올라타 턱을 쥐고 입술을 비벼대는 무게와 숨소리, 촉감. 모든 게 징그러웠다. 의진은 고개를 틀며 악!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마!”

“의진 씨.”

“흐으, 제발….”

에스퍼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의진의 얇은 옷을 목까지 거둬내고 상판을 핥았다. 더운 숨을 잔뜩 머금은 혀는 승오가 자극했던 스팟만을 오가며 끔찍한 기억으로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젖꽃판에 닿는 혀가 소름 끼쳐 의진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분명 성기는 반쯤 발기해있는데, 역겹기만 했다.

“하아… 좋은 냄새… 이거야…. 더…! 가이딩… 빨리…!”

“읏, 제발! 제발!”

도훈은 약에 취한 에스퍼에게 탐해지는 의진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분명 의진에게도 환각제가 들어간 게 맞는데, 추출되는 에너지는 일 퍼센트 미만에 불과했다. 정신적 괴로움이 혼곤함을 지배한 듯싶었다.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다가 아랫배로 입술을 옮긴 에스퍼가 의진의 성기를 틀어쥐었다. 화드득 떨린 발이 에스퍼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깨와, 팔 이곳저곳을 밀어댔다.

본능에 잠식된 에스퍼를 의진이 이길 수는 없었다. 가이드 냄새에 더욱 갈증이 심했던 에스퍼는 의진의 머리카락을 쥐고 들어 고개를 젖혔다. 딱딱해진 아래를 의진의 성기에 문지르며 억지로 혀를 밀어 넣었다.

“우읏, 읍…!”

섞이는 혀를 당장이라도 씹어 뱉고 싶었다. 의진은 화끈거리는 두피도, 무식하게 비벼지는 아래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행해지는 키스도 너무나 끔찍했다. 맞물린 잇새로 투명한 타액이 새어 나왔다.

도훈은 모니터를 바라봤다. 점차 차오르는 에너지는 그래 봤자 십 퍼센트 미만이었다. 의진의 몸을 뒤집어 억지로 엉덩이를 벌리려는 에스퍼를 보고 재빠르게 제어했다.

“윽!”

에스퍼 목에 차고 있던 제어 장치가 발동해 순간적인 자극을 줬다. 잠시 쓰러진 에스퍼 밑으로 기어 나온 의진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숨을 골랐다.

“추출 완료. Z-37 5층 실험실로 보내.”

실험관 문을 열고 들어온 방역원들은 쓰러진 에스퍼를 들고 유유히 밖을 나갔다.

“…하아, 하아….”

의진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와 아랫배에 그가 남긴 선액이 질척거렸다. 그걸 보자 아랫입술에도 통증이 일었다. 토기가 올라왔다.

“우욱!”

“의진 씨, 괜찮아요?”

도훈은 벽에 기대 하염없이 떨고 있는 의진에게 담요를 건네주며 물었다. 등을 쓸어주려는 손짓을 거세게 쳐낸 의진이 담요를 꽉 쥐고 진정될 때까지 몸을 잔뜩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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