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37)화 (37/114)

#37

“…의진 씨가 이곳에 필요하니까요.”

“저를 지옥에 떠밀어 놓고 지금 적대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건가요?”

티슈 한 장으로는 의진의 젖은 손을 다 닦아낼 수가 없었다. 도훈은 제 손길을 거부하는 의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저에게 접근한 이유가 있었잖아요. 내 걱정을 들어주는 척, 나를 걱정하는 척! 결국, 천음인지 나발인지 그 사람 목적에 맞춰 저를 흔들었던 거잖아요.”

“…….”

“승오와 사이를 가르고, 결국 우리를 떨어뜨려 놨잖아요. 선생님이.”

“…의진 씨.”

“그런데 어떻게 단번에 다시 원래 사이로 돌아가요? 여기는 정부 소속 EGI 서울 센터도 아니고, 나는 더 이상 정부의 가이드도, 승오의 파트너도 아닌데! 어떻게 선생님이랑 오순도순 지낼 수 있냐구요!”

의진은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작은 얼굴이 금세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걸 본 도훈은 심장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이번엔 꽤 극심한 고통이라 얼굴이 찌푸려지기까지 했다. 그간 감내했을 슬픔이 도훈의 변함없는 다정한 행동에 촉발된 듯싶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무슨 말을….”

“나도… 의진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겁니다.”

물론 이 ‘도시’에서. 도훈은 의진이 이곳에서 승오를 잊고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까지 시간이 걸릴 줄을 알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의진은 훨씬 더 승오를 사랑한 모양이다. 수분을 잃어버린 입안이 텁텁했다.

“…오늘 실험은 쉬는 게 좋겠어요. 방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내가 여기서 당신들한테 협조하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손등으로 눈물을 조심성 없게 닦아내던 의진은 도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승오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

“승오가 무사히 나를 찾아올 때까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시라고요.”

“…….”

“아시겠어요?”

도훈은 가만히 의진을 바라봤다. 사랑이란 건,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주승오도, 지의진도 서로를 끔찍하게 위하는 것일까. 대체 사랑이 뭐길래. 죽음과 직결될 수 있는 위험에 뛰어드는 것일까. 천음과의 정사에서 들었던 착각은 아마 사랑이 아닐 것이었다. 그저 쾌락에 저민 애정 비슷한 것이겠지.

도훈은 탕비실을 나서며 옆에 대기 중인 인원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방역원들은 탕비실로 들어와 의진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

의진은 축축한 눈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도훈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봤다. 오늘 실험도 진행되기는 어려울 듯 보였다. 일단 의진의 상태가 위태로웠고 도훈도, 급격한 피곤이 몰려들었다. 도훈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도훈은 연구실로 들어와 안경을 벗어 던졌다. 욱신거리는 가슴 통증을 어떻게든 없애기 위해 보이는 서랍을 모두 뒤졌다. 깨끗했던 공간이 서랍 안에 있던 소품들로 너저분해질 때쯤 깨달았다. 약 같은 건 소용 없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자가치유 에스퍼였다.

“…….”

그는 천음과 의진,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금껏 고군분투해왔다. 의진의 눈물로 그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의진에게는 그저 행복을 파괴한 반란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흔들거리는 전등을 노려본 도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야, 다시 웃어주는 겁니까.”

이미 답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물었다. 무엇이 의진을 행복하게 하는 일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떠들었다. 또 다른 답이 있기를 바라면서. 천음을 배반하지 않고, 의진을 웃게 할 방법이 생기기를 바라면서. 도훈은 가운 틈으로 손을 넣어 왼쪽 가슴을 지그시 짓눌렀다.

별 볼 일 없는 하급 에스퍼에서 천음의 곁으로 오기까지 그는 수많은 멸시와 혐오를 당했다. 존재 자체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 속에서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게 천음이었다. 도훈의 세상이 그때 새로이 창조됐다.

그런 세상을 등질 수 있을 리 없다. 천음은 곧 제 세상이며 숨이며 빛이고 어둠이었다. 훗날 만나게 될 지옥. 그것마저 천음일 것이다. 도훈에게는 그랬다.

깊게 숨을 내쉬는 도훈의 주위로 초록 음영이 생겨났다. 복잡한 머릿속과 가슴을 일시적으로 씻어내기 위해 능력을 발동한 것이었다.

“…….”

의진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도훈은 의진을 이곳에 데려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웃음이 적어졌어도 승오의 품에 안긴 의진을 보고 있지 않아도 됐기에. 천음을 홀로 두지 않아도 됐기에. 그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가이딩 에너지를 분자화 시킨 샘플이 그의 책상에 수도 없이 꽂혀있었다. 체념한 듯한 얼굴로 빽빽한 실험관 거치대를 바라본 도훈이 주변에 있는 음영을 거둬냈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측은해하지도 않아야 했다. 의진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 또한 그만둘 때가 됐음을 자각한 그는 마른 한숨을 짜내고 엉망이 된 책상을 정리했다.

“때가 되면 저를 이해할 거예요.”

도훈은 바닥에 떨어진 사원증을 집어 들었다. ‘EGI’ 소속 가이드 트레이너 김도훈. 처음 의진을 만나게 해준 물건을 들고 읊조린 그는 곧바로 그것을 서랍에 처박았다.

그리곤 천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의진의 몸부림을 최소화로 줄이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물질화된 가이딩은 상성 반응 없이 모든 에스퍼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했다.

천음이 제게 베푼 시혜처럼 단 하나의 불평등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또, 의진 없이 영구적으로 생성 가능한 개체를 개발해내는 게 도훈의 목표였다.

‘…저를 속이셨잖아요.’

낮게 깔린 의진의 목소리를 떨쳐내려 도훈이 고개를 저었다.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목소리다. 그런 시선, 그런 말투. 의진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

‘도시’로 향하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험난하고 위태로웠다. 지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조금이라도 의진의 파장이 잡힐까 걷는 내내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또 다른 천음의 방해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했다. 한 마디로 1분 1초마다 승오의 에너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갔다.

에스퍼는 날 때부터 일반인들과 다른 신체 구조를 지녔지만, 어디까지나 그 옆에 가이드가 있다는 한해서 무적인 존재였다. 능력을 사용하는 만큼 에너지는 소모됐으므로 치유 에스퍼가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 충전이 필요했다.

“후….”

그늘 한 점 없이 지글거리는 지면을 몇 시간을 밟았을까. 몇 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환영이라고 착각할 만큼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체력을 채우는데 급급했던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이 뚫려 있어 문고리를 쥐고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됐다. 며칠 동안 잠 한 번 자지 않고 길을 나섰던 승오는 시원한 그늘이 덮쳐오자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무로 된 벽에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 아주 짤막한 꿈을 맞이한 승오가 잠의 나락으로 살며시 발을 디뎠다.

“…….”

우느라 뻑뻑해진 눈가를 연신 깜빡이던 의진은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다는 걸 상기해냈다. 그리 푹신하지 않은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승오 보고 싶다….”

작은 읊조림을 끝으로 의진도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의진은 꿈을 거의 꾸지 않았다. 오늘도 예전처럼 까만 어둠이 계속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저 멀리 어딘가에 기대어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군용 전투복을 입고, 햇볕에 피부가 잔뜩 그을린 남자…. 승오였다.

‘승오야!’

지금 의진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꿈이었다. 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승오를 향해 내달리는 발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일으키고 등줄기에 땀이 솟아났을 무렵 곤히 잠든 승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승오야….’

의진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 듯 승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잔뜩 마른 그를 보자니 울음부터 났다. 의진은 승오를 끌어안으며 딱딱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까칠한 뒤통수를 쓰다듬고 살점 하나 잡히지 않는 팔을 어루만졌다. 비록 꿈일지라도 승오를 느끼고 싶었다.

‘승오야, 일어나 봐. 나 의진이야.’

굳게 감긴 눈매는 승오가 맞았다. 짙은 인중, 선매가 진한 입술도. 의진은 눈물샘이 터지기라도 한 듯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꾸역꾸역 닦아냈다. 잠든 승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은 의진이 여기저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흐윽, 보고 싶단 말이야. 눈 좀 떠.’

까슬해진 입술에 계속해서 키스하자 승오에게도 의진의 눈물이 번져갔다. 벌어지지 않는 잇새를 파고들기 위해 애쓰던 의진은 붙잡고 있던 어깨를 더욱 꽉 쥐고 입을 맞췄다.

‘…….’

승오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갈 때쯤 의진의 허리로 열감 있는 손이 올려졌다. 의진은 느껴지는 체온에 눈을 번뜩 뜨고 승오를 바라봤다. 의진이 좋아했던, 지금도 좋아하는 깊고 진한 눈매 안에 갇힌 우주가 의진을 향해 깜빡이고 있었다.

‘…꿈인가.’

‘승오야, 정신이 들어?’

승오는 울먹이는 의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곧바로 키스했다. 뜨겁고 축축한 혓덩이들이 급하게 비벼졌다. 승오의 허벅지에 올라탄 의진은 비벼져 오는 아랫입술을 물고 빨았다. 오랜만에 맞붙는 체온에 금방 몸이 달아올랐다.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승오도 의진의 둔부와 허벅지를 진득하게 주물렀다.

‘보고 싶었어….’

‘나도. 늦어져서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또 너를 힘들게 하고 있잖아….’

입술을 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토해냈다. 꿈이란 것을 알면서도 진심을 얘기하게 됐다. 승오는 함빡 젖은 의진의 속눈썹을 다정하게 엄지로 문질러주었다. 그 손길에서 다시 눈물이 터졌다. 의진이 훌쩍거리자 승오는 뜨끈해진 목덜미를 만져주며 그를 다독였다.

‘왜 그게 네 잘못이야. 내가 너를 못 지킨 건데.’

‘그래도, 그래도 승오야. 나 미워하지 마. 나 버리지 마…. 나, 너 많이 보고 싶어.’

말을 마친 의진은 혹여 승오가 사라질까 봐 목을 끌어안고 다시금 입을 맞췄다. 촉, 촉…. 맞붙었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작은 파생음이 주변을 울렸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더는 끝내고 싶지 않은, 그런 중독성을 지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으러 갈게.’

‘…….’

‘그러니까, 조금만 버텨줘.’

승오의 낮은 목소리가 불안한 의진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의진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승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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