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34)화 (34/114)

#34

“의진 씨, 잘 잤어요?”

간단한 빵과 수프를 트레이에 들고 들어온 도훈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의진에게로 다가갔다. 밤새 울었던 모양인지 오밀조밀한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도훈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의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 준비해왔어요. 먹어요.”

“…….”

도훈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침대 위에 트레이를 놔두고서 가까이 다가가자 몸을 돌리는 의진이었다.

“아직까진 배신감이 들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의진 씨. 이건 다 의진 씨를 위한 일이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거짓말.”

“…….”

“이딴 실험으로 제가 좋아질 게 뭐가 있는데요?”

참 신기한 일이었다. 고작 목소리 하나 듣는 것만으로도 안도할 수 있다니. 도훈은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의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천 쪼가리에 불과한 옷 한 장을 입은 터라 마른 다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앙상한 발목에 채워진 발찌는 센서가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퍼와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죠.”

“…….”

“승오 씨와 함께하면서 겪었던 감정들을 자세히 생각해 봐요. 슬픔이 더 크지 않았나요? 매일 불안에 떨며 지내지 않았나요? 후회와 자기혐오로 본인을 괴롭히지 않았나요?”

“…….”

도훈은 무릎을 꿇고서 의진과 눈을 맞추려 애썼다. 손을 뻗어 뒤통수를 쓰다듬자 의진이 확 고개를 들어 그 손을 쳐냈다. 차악! 청명한 마찰음에 도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쳐진 손을 꿈틀거리던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소리 좀 작작 해요. 당신이 내 인생에 나타나기 전까지 모든 게 완벽했어.”

고요한 방 안에 의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가이드를 상대할 땐 천음의 능력으로 그들의 악다구니나 조롱 섞인 핀잔도, 살려달라 울부짖는 절규도 도훈에게 닿지 못했다. 하지만 의진과 일말의 관계가 쌓인 사람은 도훈이 유일했기에, 천음은 표본의 상태 유지를 위해 의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배려해줬다.

그러나 의진이 내뱉는 어떤 단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이 아닌 헛소리. 선생님이 아닌 당신. 자신이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의진의 인생까지 전부.

도훈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의진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생각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네요. 식사는 꼭 하길 바라요. 오늘부터는 체력을 많이 비축해둬야 할 테니까요.”

1시간 뒤에 데리러 올게요. 도훈이 방문을 나가자 밖에서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의진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도훈을 의진의 방에서 돌아서며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처음으로 의진에게 거절이란 걸 당해봤다. 이런 적대심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입안이 약간 씁쓸했다.

*

정확히 한 시간 뒤 하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 나온 의진은 어제 봤던 실험실에 던져졌다.

“으….”

워낙 정부 소속 가이드를 일개 실험체로 구분 짓는 그들이라 조심성이라곤 눈에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의진의 머리채를 쥐려는 일개 손을 제지한 도훈이 그들을 쳐다봤다.

“조심히, 대해주세요. 각별한 실험체니까요.”

도훈의 날카로운 말에 넙죽 고개를 숙인 그들은 의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구겨진 종이 뭉치처럼 굴려지는 제 꼴이 우스워 의진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의진이 실험대에 앉혀지자 그들은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식사를 안 했다고 들었어요. 그럼 의진 씨 손해일 텐데요.”

“…지금 제가 목구멍에 뭘 넘길 처지 같아요?”

부쩍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도훈은 주사기와 약통 하나를 꺼냈다. 주사기에 약을 주입한 뒤 의진의 마른 손목을 쥐었다. 어제 진정제가 투여된 혈관이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비타민이에요.”

“…….”

멍든 혈관을 빗겨 찌른 도훈은 의진의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며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또 식사를 거르면 링거를 맞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꼭 챙겨 먹도록 해요.”

“……차라리 다른 가이드처럼 산 채로 죽여버리지 그래요.”

“…그 방식으로는 실험을 성공시킬 수 없어서요.”

도훈은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전달했다. 그를 실험관으로 들여보내라는 신호였다. 멀어졌던 그들은 다시 다가와 의진을 결박했다. 발버둥 치는 발은 자꾸만 다른 곳을 헛디뎠다. 도훈이 비타민이라고 투여한 것은 사실 소량의 환각제였다.

일단은 흥분 감각을 조금만 올려볼 생각이었다. 실험관과 연결된 헤드를 머리에 쓴 의진이 원기둥 유리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은 의진은 양팔에 두세 개의 전극이 꽂혔다.

실험관 옆 모니터엔 의진이 정상 상태에서 방출하는 에너지가 기록되고 있었다.

며칠간은 에너지 효율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무형의 파장으로 분류되는 가이딩 에너지를 일단 눈에 보이는 물질로 변경하는 것에도 수일이 필요할 터. 그때까지 실험으로 쓸 자원은 기존 가이드들에게서 추출한 에너지로 대신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의진의 에너지가 어느 정도 고점에 올라와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도훈은 발가락을 꼼질 거리는 의진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레버를 올리기 시작했다. 설치된 기계에서 에스퍼 파장과 흡사한 물질을 의진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환각제와 상응하며 의진의 가이딩 에너지가 방사될 것이었다.

“의진 씨, 최대한으로 에너지를 방출해주세요.”

“으, 으윽… 아…….”

에스퍼와의 교감으로 방사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고인 에너지를 자극해 분출하는 방식이라 의진에게도 고통이 가해지는 모양이었다. 살아있는 생물체에서 피를 뽑아간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무색무취의 에너지가 의진에게서 서서히 빠져나갔다. 다리를 베베 꼬고 엉덩이를 들썩이던 의진은 헉, 헉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날개 달린 벌레가 온몸을, 장기 안을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듯했다.

“응, 읏… 아흑…!”

“조금만, 조금만 더요.”

에너지를 측정하는 그래프가 빠르게 올라갔다. 순식간에 오십 퍼센트를 초과하자 레버는 자동으로 내려졌다.

“그읏, 하아…….”

속이 울렁거렸다. 승오와 섹스할 때 느꼈던 쾌락과 정반대되는 이질감이었다. 몸이 뜨거워지며 몸 안에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걸 피부로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의진은 살짝 고인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의자에 힘을 빼고 몸을 기댔다.

“역시, 대단하네.”

아마 다른 가이드를 대상으로 했다면 진작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본래 가이드 에너지는 에스퍼에게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피부로, 점막으로, 온기로. 도훈은 축 늘어진 의진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충격을 감내했다는 건, 좀 더 익숙해졌을 시엔 더 많은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다는 걸 야기했다.

“조금만 더 테스트할게요. 최대한으로 버텨줘요.”

“그, 응…!”

겨우 눈을 깜빡이고 있던 의진은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도훈이 레버를 올리자 잠잠했던 감각들이 고개를 들고 온몸을 활보했다.

만족스러운 첫 실험에 도훈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천음도 의진을 눈여겨보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검사는 빠르게 끝이 났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의진을 끄집어냈다. 녹초가 된 의진을 일으켜 세운 그들은 곧바로 실험대에 눕혀 의진의 손목과 발목에 사슬을 고정했다.

“힘들겠지만 잠깐만 있어 줘요.”

의진은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도훈을 순간 승오라 착각했다.

“승….”

그러나 말은 더 나오지 않았고 어지러웠던 정신이 잠시간 눈을 감았다.

탈수와 과한 자극으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도훈은 바늘 자국이 여러 군데 난 팔목을 유심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주삿바늘을 꽂았다. 이번엔 진짜 수액을 맞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모로 누운 의진에게 담요 한 장을 올려놨을 때 천음이 실험실로 들어왔다.

“이런. 구경거리가 끝난 모양이네요.”

“천음님.”

“어때요. 공을 들인 보람이 있었나요?”

천음은 미소를 머금은 채 걸어와 잠든 의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지 손등으로 볼을 어루만지자 의진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에너지 수치가 기존 가이드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이 정도 충격을 버티는 가이드조차 없었으니까요.”

도훈이 서울 센터에서 기록한 훈련 일지를 휙휙 넘기던 천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에스퍼 등급을 높인 위인이라 그런지 기록이 훌륭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없는 이곳에서도 제 능력을 맘껏 펼쳐줄지는 의문이었지만.

“유일무이한 가이드인 건 확실합니다, 다만.”

“흐음, 다만?”

“체력이 증진되지 않으면 앞으로 있을 실험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에너지가 많이 필요로 하는 실험이다 보니….”

“그렇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적응할 때이니 밥이고 잠이고 넘어가겠어요?”

천음도 에스퍼라 느낄 수 있었다. 의진은 여태껏 죽어 나간 가이드와 달랐다. 피가 꿈틀거릴 만큼 신선한 에너지가 미미하게 느껴졌다. 천음은 훈련 일지를 덮고서 살짝 부은 의진의 눈두덩이를 어루만졌다. 도톰한 살갗을 느끼다가 허리를 펴고 도훈을 바라봤다. 의진의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이 우스웠다가도 묘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도훈 닥터가 아끼는 자이니 특별히 제가 힘을 써보도록 하죠.”

“천음님, 께서요?”

“네.”

대답을 마친 그는 천천히 의진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일단은 도훈 닥터에게 맡기도록 할게요. 정,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때.”

천음은 의진의 입술을 엄지로 쓰윽, 쓸어보고는 도훈을 바라봤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의감과 순결을 직접 짓밟아줄 생각이에요.”

“…….”

도훈은 천음의 말에 왼쪽 눈을 살며시 찡긋거렸다. 천음의 발밑에서 짓밟히는 의진이라…. 천음은 자비란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전에 잘 구슬려 놓는 게 도훈 닥터한테도 좋겠네요.”

천음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의진의 온기가 묻은 엄지를 제 아랫입술에 갖다 댔다. 잔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자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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