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29)화 (29/114)

#29

“그자가 윗선에 알린 거 같더군요. 이곳에 스파이가 숨어든 걸 말이에요.”

도훈은 천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거 같진 않았는데 꽤 당찬 작전이었다. 미지근해진 차를 홀짝인 도훈이 ‘EGI’ 소속만 소유할 수 있는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군요. 이곳에서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천음님.”

“3일입니다.”

“…….”

“3일 안에 그 가이드를 이곳으로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아마 승오는 저를 지목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의진을 데려오는 작전도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앞당겨졌지만, 상관은 없었다. 도훈은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파일을 집어 들었다.

“아, 의진 씨. 어서 와요.”

“와… 가차 없네요. 대우해줄 땐 언제고!”

“하하, 그러게요. 얼른 옷 갈아입어요.”

“네에.”

가이딩 평가 토대로 훈련 일정이 짜인 터라 의진은 뒷번호로 밀려난 상태였다. 오후가 되어서야 훈련실에 입성한 의진은 입술을 삐죽이며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쏘다닌 승오 덕에 불편한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만은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이 든 의진이었다. 매일 훈련 나가기 전 나눴던 키스가 없어 허전했다. 옷을 다 갈아입고 헤어밴드를 쥔 의진은 버석한 입술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훈련 시간은 좀 짧아요. 두 시간 정도? 그 대신 강도를 높일 거예요. 그래야 다음 평가 때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해해줄 거죠?”

“당연하죠.”

의진의 씩씩한 대답에 도훈은 활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스킨십이 익숙해져 있었다. 의진도 따라 웃고선 훈련실로 들어갔다.

그 시간, 비워진 도훈의 사무실에 들어간 감사단은 사정없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의진의 모든 기록이 담긴 파일부터 가이드에 관한 연구 자료, 컴퓨터 아래 잠겨있는 서랍까지. 그리고 그들은 잠겨있는 서랍 안에서 한 실마리를 발견했다.

도훈은 원래 채용 예정이었던 트레이너의 ID를 조작해 들어온 것이었다. 그의 서랍엔 그 사람의 ID카드가 들어있었다. 검은 장갑을 착용한 감사단 중 한 명이 그것을 보관팩에 집어넣었다.

“그거, 돌려주실래요?”

바로 귓가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 선명한 목소리가 감사단원 모두에게 파고들었다.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 그들의 눈앞에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슈트를 입고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천음이었다.

“그게 당신들 손에 들어가면 조금 골치 아파지거든.”

“당신은 누구지?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 으윽!!”

순간 머리가 깨질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그들의 고막을 찢을 기세로 엄습했다. 두 귀를 막아도 소리는 귓가에 엉겨 붙은 것처럼 정신까지 어지럽게 흩어놓았다.

“…흐음. 생각보다 맷집이 센 모양이네.”

천음은 방 구석진 곳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귀를 부여잡고 쓰러진 감사단원들에게 유유히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ID 카드를 집어 들었다.

“내 정신 좀 봐.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되지. 가만 보자… 도훈 닥터가 알려준 대로 전두, 측두, 후두 쪽을 흩어놓으면 된다고 했었나?”

잠깐 고민하던 천음은 후우, 입바람을 불어 고막이 찢길 정도의 강력한 음파를 만들어냈다. 방에 있던 네 명의 인원 전부 발작을 일으키고서 기절했다.

천음의 창백한 손가락이 ID 카드를 부드럽게 쥐었다. 수수한 얼굴의 여자 얼굴이 박힌 ID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는 곧바로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30분 후 눈 뜰 감사단은 기억을 잃은 채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갈 터였다.

“남은 건, 그 가이드뿐이겠군.”

도훈의 사무실에 마련된 캐비닛을 열자 탈출구로 연결된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은밀하게 방을 빠져 나갔다.

*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평소보다 아주 짧은 훈련을 마친 의진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강도를 높였다 해도 그 전부터 힘든 훈련을 해온 터라 시간이 짧은 게 함정이었다.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훈련실을 나온 의진은 쭈욱, 기지개를 켜며 몸을 늘렸다.

“빡세게 할 땐 엄청 힘들더니, 또 이렇게 하니까 한 거 같지도 않네요?”

“흐음, 그렇죠? 제가 내일은 어떻게 하든지 더 늘려볼게요.”

“히히, 아니에요. 결과에 승복할 줄도 알아야죠.”

의진은 마른 상판을 탁탁 두드리고선 캐비닛 문을 열었다. 오늘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뽀송뽀송한 살내음을 맡은 의진이 벗어둔 옷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승오 씨랑은 잘 풀었어요?”

“아… 음, 뭐 그냥 그래요.”

“괜히 제 탓인 거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네요.”

“아니에요. 선생님 탓 전혀 아니에요.”

의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도훈의 말을 부정했다.

“그럼 저랑 조금 이야기하고 가도 괜찮을까요?”

도훈은 클립보드를 꼭 안아 든 자세로 의진에게 조심히 물었다.

“그럼요!”

별관 뒤 숲길은 오직 도훈과 의진만이 이용하는 듯했다. 어쩐지 아지트가 된 거 같은 기분에 의진은 슬쩍 웃으며 도훈을 바라봤다.

“여기, 왜 아무도 안 올까요? 이렇게 좋은데.”

“원래 가까이 있을수록 소원해지는 법이니까요.”

“으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네요. 저도 선생님이랑 오기 전까진….”

도훈은 슬쩍 웃으며 의진과 걸음을 맞춰 걸었다.

“의진 씨.”

“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곧 여기를 떠날 예정이에요.”

“네? 왜요?”

의진은 진심으로 놀랬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을뿐더러 도훈은 정말 실력 있는 트레이너였다. 설마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의진이 도훈에게로 몸을 틀어 되물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누군가가 이의제기를 한 모양이에요. ‘도시’ 작전과 맞물려 들어온 제가 스파이로 의심된다고요.”

“……설마.”

“아마 본사로 돌아가 확인 절차를 밟고 다른 센터로 다시 발령 날 거예요.”

“혹시, 그 이의제기를 한 사람이… 승오인가요?”

의진은 도훈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노을 진 의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훈은 곤란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하. 주승오 진짜. 의진은 잡았던 도훈의 손목을 놓고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가실 필요 없어요. 제가 승오한테 얘기해볼게요.”

“…승오 씨한테 얘기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의진은 화가 났다. 승오는 왜 이렇게 도훈을 밀어내고 싶어 하는 걸까. 길게 고민하던 그는 안 되겠다 싶은지 왔던 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요! 선생님, 절대 못 떠나게 할 거예요.”

승오는 아직 훈련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타닥, 타닥. 의진의 굽 낮은 스니커즈가 시멘트질 된 바닥을 밟으며 뛰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의진을 바라보던 도훈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야, 주승오!”

에스퍼 가상 훈련실은 층고가 높아야 했기 때문에 본관 제 2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승오의 이름이 적힌 훈련실 문을 세게 연 의진이 수십 개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맵 구현을 진행 중이던 여울은 윙윙 울리는 침입 경보를 해제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자 승오는 고개 돌려 씩씩거리는 의진을 내려다봤다. 보나 마나 도훈과 관련된 일일 거였다.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울리는 듯했다.

“정말 네가 그랬어?”

“뭘.”

컨트롤실에서 빠져나온 여울은 승오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야기가 끝나면 부르라는 뜻이었다. 승오가 계단을 오르는 여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길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 의진을 바라봤다.

“선생님이 스파이 같다고, 네가 위에다가 보고했냐고.”

“…어, 그런데.”

“하, 너 진짜 왜 그래? 왜 선생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러는 넌!”

승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의진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넓은 훈련실은 승오의 고함을 천장까지 널리 옮겼다. 하아. 숨을 내쉰 승오가 몸을 틀고서 말을 이었다.

“그러는 넌, 왜 그렇게 그 새끼를 감싸고 도는 건데?”

“야, 주승오. 말이 심하잖아.”

“너는 한 번도 내가 우선이었던 적, 있기라도 해?”

“…….”

“네가 살고 싶어서 내 제안을 거절한 거? 괜찮았어. 그렇게 해서 네가 진짜 살았으니까. 다치지 않았으니까.”

승오는 의진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건 맞는지부터 의심됐다. 이렇게 되면 도훈의 계략에 넘어가는 걸 알면서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벗겨진 믿음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금세 헐거워졌다. 의진은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도훈을 향한 굳건한 신뢰를 지켜냈다. 그것만큼은 사실이었기에 불붙은 의심이 더 쉽게 타올랐을지도 모른다.

“내가 김도훈을 너에게서 떨어뜨리려는 게, 정말 웃기지도 않는 질투심 겨우 그것뿐일 거 같아?”

“……주승오.”

“아니면, 이제 나보다 그 사람이 더 좋아졌어?”

의진은 승오의 마지막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밤색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더니 눈물이 차오르는 게 여실히 보였다. 승오는 잠시 멀어져 잠시 숨을 골랐다. 실수로 뱉어진 말이었다. 서로가 그걸 알았지만 이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너야말로 나를 그렇게 생각했던 거네.”

“…….”

“너 좋을 대로 생각해. 어차피 그럴 거잖아.”

“지의진.”

“너 같은 거, 진짜 싫어.”

의진의 볼 위로 눈물 한줄기가 뚝 떨어졌다. 승오는 그마저도 부정하지 않는 의진이 미웠다. 소리 없이 우는 의진의 손목을 붙잡은 그는 빠른 걸음으로 밖을 나갔다.

“놔!”

속절없이 승오에게 끌려가던 의진이 팔을 흔들며 반항해봤지만, 승오는 타격조차 없었다. 비 일반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금방 숙소에 도착한 그가 문을 열어 의진을 밀어 넣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소나기. 수천 개의 별이 떨어지는 황홀경. 의진이 승오에게 전하는 가이딩은 수많은 미사여구와 함께했다. 처음 키스했을 때, 생화 향이 가득한 정원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았다. 처음 손을 꿰어 목덜미를 애무했을 때, 사막 한가운데에서 맞는 폭우처럼 버석한 머릿속에 파도가 범람하는 것 같았다.

“흐, 싫어!”

늘 그랬듯, 의진의 가이딩은 물감이었다. 건조하고 황량했던 내면에 색을 입혀왔던 건 의진이었고, 의진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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