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28)화 (28/114)

#28

의진은 도훈과 내려오면서 혼자 있을 승오가 마음에 걸렸다. 순간적인 감정에 못 이겨 승오에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안함에 의진이 한숨을 쉬었다.

“승오 씨가 걱정돼요?”

캐모마일 차를 우린 도훈이 의진에게 차를 내밀었다. 의진은 하얀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함이 어린 작은 얼굴은 종일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훈은 지금 소용돌이치고 있을 의진의 감정을 대충 어림잡아 짐작했다. 사랑이란 건, 굉장히 견고한 감정의 결들로 이루어진 집합체라고 했다. 그 모든 걸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개중 몇 개를 집어 크기를 키울 생각이었다. 예전에도 의진을 건드렸던 불안함, 살고자 하는 욕망, 어쩌면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을 열등감. 그것들을 자극해야만 했다.

“조금요. 제가 너무 모진 말을 한 건 아닐까, 싶어서요.”

“…승오 씨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에스퍼잖아요. 의진 씨의 심정을 다 이해 못 할 수도 있어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해요.”

도훈은 의진의 곁에 앉아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른 어깨 끝이 한숨으로 들썩였다.

“그럴까요. 그래도 내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해주는 아이인데…. 왜 자꾸 선생님과 저를 오해하는지 모르겠네요.”

“의진 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아요.”

도훈의 말에 의진은 애써 웃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숙소로 돌아가서 승오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잡다한 생각이 가득한 머리는 언제 터져도 무방할 정도로 복잡했다.

“일단 오늘 훈련은 쉬는 거로 할게요. 충분히 머리 식히고 우리 내일 만나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마음이 힘들 때일수록 쉬어야 하는 법이에요.”

의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닿아오는 손 온도가 제법 따뜻해서 그것만으로도 위로로 느껴졌다.

의진은 일찍 숙소로 돌아왔지만, 승오는 저녁이 넘어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훈련실은 최대 저녁 8시까지만 개방했기 때문에 이제 상주할 수도 없을 거였다. 소파에 앉아 승오를 기다리던 의진은 숲에서 했던 도훈의 말을 상기했다.

정말 승오와 있어서 결과가 형편없게 나왔던 걸까. 승오와 입을 맞추고, 살을 비비면 행복감이 솟구쳤다. 물론 그런 뒤에 몸이 조금 힘들긴 했어도 가이딩의 분출이나 효율이 떨어지는 것까진 느끼지 못했다.

“하아… 모르겠어.”

도훈의 말이 틀릴 일이 없다는 건 알았다. 선생님도 혹시 모를 추측이라 했으니까. 의진은 오늘은 승오를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매듭지었다.

도어락 해제 소리와 함께 돌아온 승오에게서 공용 샴푸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

승오는 거실에 서 있는 의진을 보고 머뭇거렸다. 할 말이야 많았지만, 섣불리 나오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의진도 마찬가지인지 손톱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왜 이제 와?”

오늘따라 무거운 더플백을 들고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의진이 말을 건넸다.

“운동 좀 더 하느라고.”

훈련실과 체력단련실이 차례대로 닫히면서 어쩔 수 없이 여울의 사무실 안에 있는 러닝머신을 이용했다. 분명히 다 나은 줄로만 알았던 햄스트링이 세 시간이 지나자 슬며시 뻐근해지며 콕콕 통증까지 생겨났다. 운동을 핑계로 아예 여울의 사무실에서 눈도 붙일까 생각했던 승오는 샤워를 마치고 느지막하게 숙소로 올라온 것이었다.

“아… 그래.”

처음으로 같이 있는 공기가 어색했다. 의진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승오는 탁, 탁 손톱 주위 살을 뜯고 있는 의진을 바라봤다.

“미안해.”

“……어?”

“널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야.”

승오의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의진에게 닿았다. 물론 의진도 알고 있었다. 실수로 나온 말을 줄곧 곱씹었을 승오를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의진의 얼굴이 죄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아니야. 내가 말이 심했어. 괜히 너한테 화풀이했던 거 같아. 미안해….”

승오는 의진의 무해한 마음씨를 이용하는 도훈에게 더더욱 화가 났다. 자신이 의진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면 이딴 식으로 굴진 못할 거였다. 아니, 알고 있기에 더 승오를 자극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그 자식을 이곳에서 내보내야 하지.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 먼저 물러서지 않을 도훈을 생각하니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의진아.”

“으응.”

“나는 그 사람이 불안해.”

“…도훈 선생님 말하는 거야?”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널 너무 믿으니까 이런 말 하는 거야.”

“…….”

“가까이하지 마. 제발.”

도훈은 승오를 멀리하라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승오가 도훈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팽팽히 당겨지는 줄다리기 가운데 걸린 승부점이 된 심정이었다.

“…….”

결국 의진은 승오의 부탁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

“좋은 아침이에요.”

“원하는 게 뭡니까.”

아침이 밝자마자 승오는 도훈에게로 향했다. 며칠 전만 해도 뜨거운 숨소리가 스며들었던 침대에 홀로 누워 있으려니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달이 저물고 해가 뜨는 걸 그대로 지켜본 승오는 의진이 자는 걸 확인하고 이곳으로 온 거였다. 그가 여기 있는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도훈은 의진의 훈련 일지를 종합한 자료를 프린트하고 있던 참이었다. 뜬금없는 승오의 출입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트레이너 가운 주머니에 꽂아둔 금테 안경을 고쳐 쓴 도훈은 문 근처에 서 있는 승오를 바라봤다. 초능력을 다루는 직업에 걸맞은 체격과 용맹한 외모였다. 거기다가 우직한 충성심까지. 만약 승오가 정부의 눈길에서 벗어난 버려진 ‘에스퍼’였다면 천음은 승오를 제 편에 세우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을 수도 있을 듯싶었다.

그만큼 악으로 삼기 좋은 인물이었다. 도훈은 승오의 훈련복 왼쪽 가슴에 박힌 정부 소속 에스퍼 로고를 훑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결론적으론 부질없는 가정에 불과했다.

“의진 씨를 제 곁에 둘 거라 했습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제 생각쯤은 너끈히 읽으시지 않던가요?”

탁탁. 프린트된 종이 뭉치의 바닥 수평을 맞춘 도훈이 파일에 서류를 끼워 넣으며 말했다.

“의진 씨를 도시에 데려가려고 합니다. 당신과 의진 씨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는 날에요.”

“…….”

“제 대답을 들으셨으니, 저도 질문 하나 하죠.”

승오의 앞에 선 도훈은 미소 하나 없이 그와 마주 봤다. 다른 온도의 시선이 허공에서 계속해서 부딪히고 있었다.

“의진 씨를 믿나요?”

“당연히.”

“당신이 ‘도시’에서 들었던 그 소리는 정말 천음님이 만들어낸 환청이었을까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훈이 말하는 건 승오가 무너진 원인이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번뜩 깨어난 승오는 도훈의 멱살을 쥐고서 낮게 읊조렸다. 가까이 다가온 승오를 빤히 바라본 도훈은 매섭게 힘준 손목을 순간적인 힘으로 확, 떨어뜨렸다.

“이해한 그대로예요. 그게 정말 가짜일 것 같은지.”

“……수작 부리지 마. 네 거짓쯤은 쉽게 구분할 수 있으니까.”

“글쎄요. 당신은 고작 사람의 머릿속을 엿보고 치졸하게 지배하는 능력자일 뿐이에요. 참과 거짓을 구분해내는 건 별개의 문제죠.”

피식 웃은 도훈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창가 주변으로 멀어졌다.

“의진 씨에게 그랬죠. 저를 너무 믿지 말라고.”

“…….”

“그럼 저는 반대로 승오 씨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닥쳐.”

“의진 씨를 너무 믿지 마세요.”

블라인드 살을 비스듬히 세우자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훈은 그 앞에서 승오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의진 씨는 당신의 부탁이 아니라, 제 부탁에 따라 제 발로 저와 함께 ‘도시’로 갈 테니까요.”

“이 쓰레기 새끼가…!”

승오의 주먹을 가볍게 막아낸 도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승오에게 속삭였다.

“이것 보세요. 누굴 경계해야 하는지, 무엇을 노려야 하는지, 목표가 누군지도 모르니 쉽게 수를 보이는 겁니다.”

혼란스러웠다. 승오는 도훈의 사무실에서 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중앙 공원 벤치에 앉은 승오는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허벅지에 놓인 손을 펼쳐 손바닥을 뒤집었다.

“…….”

만일 내가 지닌 능력이 폭발이었다면, 불기둥을 솟게 하는 거라면,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시간 지기라면. 지금쯤 도훈을 먼 곳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도훈의 말대로 승오는 정신을 지배하는 에스퍼였다. 핵심 멤버로 꼽힐 순 있다 한들 단독으로 임무 수행을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정신계 에스퍼.

그런 타이틀을 가진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알량한 도덕심으로 도훈의 머릿속을 건드려보지도 않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음의 부하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머릿속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확신까지 마쳤지만.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의진을 꿰차기 위한 개짓이라면. 승오는 도훈의 진짜 정체가 뭐든 간에 제 옆에 있는 의진을 지키고 싶었다.

손바닥을 스치는 바람을 쥐락펴락하던 승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본관으로 걸어갔다.

“팀장님, 주승오입니다.”

승오가 들어간 출입문 위엔 전략기획본부실 팻말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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