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적으로서 경계하는 것인지. 알아야겠거든요.”
“…당신,”
“의진 씨 가이딩 실력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어요. 그건 승오 씨 때문일 수도 있고, 저 때문일 수도 있죠. 저는 물론 후자이길 바라지만요.”
“…….”
승오의 짙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눈앞에 놓인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가 오늘따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도훈은 그런 승오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먼 미래를 바라본다면, 의진 씨에게 도움 되는 쪽은 당연히 제가 될 겁니다. 가이드의 에너지를 사사건건 축내는 에스퍼가 아니라.”
“…그래서, 의진이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뭐야.”
“저에겐 의진 씨가 필요해요. 제 곁에 둘 생각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승오는 그 순간 능력을 사용해 도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곧바로 보이는 건 천음이었다. 천음에게 충성을 바치며 입 맞추는 도훈이 승오의 시야에 가득 찼다. 서서히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본 도훈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방금 승오 씨가 본 그분의 말씀대로죠.”
“나한테 정체를 드러내서 좋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달라질 게 없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
승오와 도훈이 대치 상황을 이루고 있을 때 먼발치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은 슬쩍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고는 승오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앞으로 기대되네요. 재주껏 의진 씨를 지켜내길 바랄게요.”
“너 같은 새끼한테 절대 안 뺏겨.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꺼져.”
승오가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도훈은 그런 승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 활짝 웃으며 단단한 어깨에 손을 올려 살며시 주물렀다.
“마음에 들어요. 그런 열정.”
서늘한 손이 어깨를 닿는 촉감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불쾌했다. 도훈의 손을 거칠게 치워낸 승오가 도훈과 눈을 맞추자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의진의 말처럼 음모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그런 얼굴.
“하지만 전 의진 씨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전 욕망하는 걸 절대 놓지 않아요. 주인이 있건, 없건.”
“이 새끼가….”
“승오 씨가 무엇을 해도 의진 씨는 나를 내칠 수 없으니까… 유예기간을 드리겠습니다.”
“또 무슨 개소리야.”
-텁!
승오는 도훈의 멱살을 구겨 쥐었다. 목이 옥죄여 오는데도 불구하고 도훈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침착한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평온한 모습에 당황한 건 승오였다.
“제가 의진 씨를 도시로 데려가기 전까지 승오 씨의 방해를 묵인하겠다는 뜻입니다.”
“……!”
도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승오의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지금 뭐라고… 의진이를 도시에…?”
“아, 의진 씨가 오는군요.”
도훈이 제 목을 감은 승오의 손을 감싸 쥐고는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황망하게 서 있는 승오를 향해 그럼 이만. 도훈은 승오에게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곤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도훈에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숨이 턱 막히는 건 사실이었다. 승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을 때 막 평가를 마치고 온 의진이 헉헉거리며 다가왔다.
“하아, 하아. 나 왔어. 선생님은?”
“…….”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도발이었을까? 진심이었을까? 차라리 마음을 읽어봤을 걸 그랬나.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에 도저히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거듭될수록 승오는 더 깊이 침잠할 뿐이었다.
“주승오!”
상념의 바다에 가라앉는 승오를 꺼낸 건 의진이었다.
“의진아….”
승오는 무릎을 굽혀 헉헉대는 의진을 내려다보다가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제 품에 꽉 안기게 하고선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제 품에서 의진이 숨을 내쉴 때마다 안개 가득했던 머릿속이 맑게 개는 듯했다. 딱히 가이딩이라는 자각 없이도 살이 맞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가이딩이 시작됐다.
“야아, 여기 밖이야. 왜 그래!”
“걱정하지 마.”
몸부림치던 의진도 승오의 미미한 떨림에 천천히 손을 뻗어 토닥여주었다. 의진에게도 그렇듯, 승오에게도 의진이 전부였다.
“뭐야. 그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었어.”
그러니 의진에겐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제가 지킬 거니까. 승오는 그 다짐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선생님은 어디 가신 거야?”
“아, 뭐 일이 생겼대.”
승오는 맞잡은 손에서 퍼지는 의진의 에너지를 느끼다가 아예 손깍지를 꼈다. 밖에서는 스킨십을 잘하지 않는 편이라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괜히 어깨가 움츠러드는 의진이었다. 의진이 은근히 손을 빼내려 하자 승오가 다시 한번 손을 세게 쥐었다.
“왜 빼?”
“내, 내가 언제.”
“빼려고 했잖아.”
“어색하니까….”
“그냥 잡고 있어.”
의진의 손을 바투 쥔 승오는 고민에 휩싸였다. 도훈은 천음의 부하였다. 그걸 아는 사람은 저 혼자였고.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오히려 도훈이 수를 쓴다면 내부 분란을 일으킨 인물로 찍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진을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데. 지킬 수 있을까. 지킬 수 있겠지. 지켜야지. 스스로를 향한 의문을 확신으로 바꾸려 애썼다.
“주승오!”
“어?”
“훈련 어땠냐고 물었잖아. 진짜 무슨 일 없는 거 맞아?”
손을 확 놓은 의진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승오를 노려봤다. 누구처럼 직접 생각을 읽을 수는 없어도 애인의 기분 정도는 표정 하나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도훈을 만나고 나면 꼭 이랬다. 오늘은 더 심한 편이었고.
“선생님이랑 싸웠어?”
“…싸우긴 왜 싸워. 오랜만에 훈련 들어가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 미안.”
“치, 한 번만 더 딴짓하기만 해!”
“알았어.”
의진의 어깨를 감싼 승오가 마른 팔뚝을 손으로 쓸었다. 이제야 신경이 제게 쏠린 게 만족스러웠는지 의진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이딩 평가는 잘하고 왔어?”
“아, 응. 내가 누구야. 주승오 승격시킨 사람이잖아. 내일 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줄게.”
수습생 시절, 주로 훈련 기관에서 시행하던 평가가 급하게 도입된 건 아무래도 ‘도시’ 탓이 컸다. 에스퍼를 지원할 수 있는 가이드 파이를 늘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평가를 통해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 안에서 상위권을 산출하고 자잘하게 세분화시켜 효율적으로 트레이닝 강도를 높인다고 했다. 조용하지만 센터 안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로 정신이 없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그래, 1등이면 더 좋고.”
“당연히 1등 해야지.”
대부분의 식사가 끝난 식당은 한적했다. 배식을 받은 뒤 구석진 자리에 앉은 둘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주린 배를 채웠다. 승오도 의진과 있는 동안은 도훈을 신경 쓰지 않으려 정신을 다잡았다.
“승오야, 너 오후 훈련 몇 시야?”
“나 두 시. 넌?”
“나도. 그럼 우리 시간 조금 남는다. 그치?”
“어, 그러네.”
의진은 밥을 먹는 내내 오래간만에 훈련해 피곤하다는 승오의 말이 주변을 동동 떠다녔다. 자신은 승오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이드였다. 승오가 빠른 회복 궤도를 탄 후부터 내심 직업 프라이드가 상당했다. 지금도 얼른 숙소로 가서 입술을 비비든 배를 맞대든 승오를 회복시켜주고 싶었다.
그런 의진의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오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꿰어온 손을 잡은 채였다.
“방으로 갈까?”
언제나 먼저 묻는 건 의진이었다. 가이딩이 더 필요하지 않았지만 언제나처럼 두 사람의 일과가 조용히 시작됐다.
숙소로 돌아와 물기 덜 마른 욕실에서 입성한 의진은 승오에게도 칫솔을 물려줬다. 한 시간 밖에 안 남은 시간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의진은 시간을 확인하곤 막 입가에 물기를 닦아내는 승오를 뚜껑 닫힌 변기에 앉혔다.
“의진아.”
“아까 너 피곤하다고 했잖아.”
“…….”
“내가 충전시켜줄게.”
승오의 키가 작아지자 의진이 조금만 허리를 숙이면 금방 입술이 맞닿았다. 촉촉한 입술에서 상쾌한 치약 맛이 났다. 혀를 섞을 때마다 민트 입자가 톡톡 터지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거 가이딩 받을 때 느끼던 감각이랑 똑같지 않아?”
“그러게. 아니면 가이딩 받는 중이라 그렇게 느끼는 건가?”
이유야 어떻든 기분 좋은 건 똑같지 않느냐는 결론이 빠르게 지어졌다. 승오는 의진을 제 허벅지에 앉히고 본격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물기 묻은 입술이 떨어졌다 맞물리는 소리가 욕실에 촉, 촉 울려 퍼졌다. 상쾌한 민트향과 함께.
*
승오와 점심시간을 보내고 훈련실로 돌아온 의진은 진득했던 키스를 되새기며 입술을 매만졌다. 제가 원해서 한 거였지만 다리가 풀릴 만큼 부드러웠던 입맞춤은 너무나도 설렜다. 간지럽고 촉촉하고 따뜻하고 물컹하고…. 마지막에 숨이 모자라 입술을 떼려 하자 승오가 뒤통수를 붙잡고 더 문질러오던 장면을 떠올린 의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악! 텅 빈 훈련실에 짤막한 비명이 외쳐졌다.
“주승오는 왜 날이 갈수록 섹시해지냐고!”
입술을 무는 힘과 혓바닥을 세워 훑는 모든 것들이 평소보다 더 간지러움을 유발했다. 가끔 키스하다 눈을 뜰 때면 늘 감겨있던 긴 눈매가 오늘은 뜨인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깊고 진한 승오의 향이 입안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의진은 유달리 아득했던 승오의 눈빛이 약간 신경 쓰였다. 물론, 너무 좋았어. 너무 좋아서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지. 그런데… 승오는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으, 모르겠다.
의진이 귀를 붉게 물들이고 잔뜩 부끄러워하는 중에 도훈이 클립보드를 들고 훈련실 안으로 들어왔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의진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 의진 씨.”
“선생님, 왜 그냥 가셨어요!”
“제 일도 깜빡했지 뭐예요. 아까는 정말 미안해요.”
도훈이 양손을 모아 사과했다. 여전히 생긋 웃는 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