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인 더 시티 (16)화 (16/114)

#16

─선생님이 제 트레이너셔서 너무 좋아요!

─의진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승오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사위를 살폈다. 기존 훈련 시간을 훨씬 지난 시간인데도 의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의심되는 건 아니었지만, 걱정됐다. 그 잠깐의 공백으로 인해 자신이 의진에게서 잊힌 건 아닐까. 짝사랑할 때도 이렇게 마음 쓰인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몸을 반쯤 세운 승오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헝클였다.

“비겁하고 졸렬한 새끼. 내가 저번처럼 속을 거 같냐?”

의진과 떨어져 있을 때면 간혹가다 환청이 들려왔다. 주로 도훈과 의진의 대화들이었다. 승오는 아직 불편한 팔과 다리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의미 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

천음의 짓이 분명했다. 그자는 소리를 옮기는 에스퍼라고 말했지만, 승오 생각은 달랐다. 아마 소리 자체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일 것이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힘을 느꼈을 때 결코 그런 시시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자가 트레이너를 아는 거지?”

일개 가이드 트레이너를 ‘도시’ 수장이 왜…. 천음이 만들어낸 환청은 승오의 불안을 콕 집어 만든 것이었다. 마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도훈에 대한 경계심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골몰하던 승오는 좁혀지는 의심에 고개를 저었다.

의진에게 말했다간 오히려 저를 책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의진을 도훈에게서 조금 떨어뜨려 놔야 할 필요는 있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시계를 바라본 승오는 불편한 몸을 끌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승오야! 어, 화장실 가게?”

슬리퍼를 고쳐 신으려던 차 벌컥 문을 연 의진이 짐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아니. 네가 너무 안 와서 찾으러 가려고 했지.”

“아아. 나 훈련 너무 빠져서 오늘 배로 하느라고. 그리고 씻는 김에 숙소에서 필요한 것 좀 가져왔어. 여기서 좀 더 지내야 하잖아.”

간이침대에서 사용할 베개와 이불, 훈련복 등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의진은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승오에게 다가갔다. 불편하게 서 있는 승오를 앉히고 곧바로 쪽쪽 입을 맞췄다.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의진에게선 익숙한 바디워시 향이 났다.

“우리 승오, 나 많이 기다렸어?”

승오는 아까까지 너울거렸던 복잡한 감정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의진의 동그란 눈동자를 바라보니 싹을 틔웠던 의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감췄다. 마른 허리를 꽉 끌어안는 팔이 단단했다.

“어. 기다리는 거 못 해 먹겠다.”

“흐흐, 나도. 그거 못 해 먹겠더라.”

서 있던 의진이 승오의 머리통에 이마를 부비작대며 말했다. 매일 목 아프게 올려다보던 애를 내려만 보고 있으려니까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귀여웠다. 팔다리가 한 짝씩 묶여있어 그런가. 귀엽기도 하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의진은 안겨있는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는 것으로 하루 피로를 풀어내고 있었다.

“의진아.”

“응?”

“그, 도훈 트레이너 말이야.”

“또 뭐. 무슨 소리 하려고.”

승오가 도훈을 언급하자마자 몸을 떼어낸 의진이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저렇게도 저 선생님이 좋을까. 약간 씁쓸함을 느낀 승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가 말을 이었다.

“뭐 수상한 점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선생님이 왜 수상해?”

“뭘 숨기려고 한다든가, 가끔 어디로 사라진다든가….”

“…지금 도훈쌤을 스파이로 의심하는 거야?”

의진은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도훈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심성이 바르고 매사에 다정한 선생님. 어릴 적부터 꿈꿔온 너무나 이상적인 정신적 지주였다. 항간에 작전이 수포가 되면서 이곳에 첩자가 있을 거란 추측이 돌긴 했다. 그래도, 도훈은 아닐 거였다.

“그냥 혹시나 해서. 그분 여기 센터 온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의심하지 마! 정말 좋은 분이란 말이야.”

더는 도훈을 의심하는 듯한 말을 들을 수 없던 의진은 아예 승오의 입을 틀어막았다. 승오는 졌다는 표시로 손을 들었다. 의진에게 더 말했다간 미움만 살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안 그럴게.”

“치…. 그건 그렇고 답답하지 않아? 산책하러 나갈래?”

승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곧바로 표정을 푼 의진은 가장자리에 있는 휠체어를 꺼냈다. 산책로를 나가는 건 좀 그렇고. 건물 옥상이라도 나가 바람을 쐬게 하면 좋을 듯했다. 승오도 나쁘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서 밤으로 지나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옥상엔 나부끼는 바람 외엔 드나드는 이가 없었다. 휠체어를 끄는 손길이 한없이 투박한데도 승오는 구박 한번 없이 의진을 바라봤다. 낑낑거리면서 애쓰는 얼굴도 사랑스러웠다.

“병실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하지?”

“널 마음대로 못 보는 게 더 답답해.”

다행히 하늘은 오늘의 별을 선명히도 비추어주었다. 의진은 꾸며진 화단 근처에 멈춰 서서 승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없던 게 다행이었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난 너한테 같이 가자고 제안조차 하지 않을 거야.”

“왜? 내가 네 가이드인데?”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승오는 제 가슴 근처에 둘려진 마른 팔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정말 천음과 만나고 건물이 폭발했을 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그곳에 의진을 데려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내가 살아서 간다면, 앞으로도 의진을 안전한 곳에 두고 싶다고 다짐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의진은 한참 승오를 껴안고 있다가 크읍, 울음을 삼켰다. 안 그래도 요즘 눈물 참는 법을 여기저기서 알아보려고 하고 있는데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아 곤혹이었다. 젖은 눈가를 대충 손등으로 비빈 의진이 폭 한숨을 쉬었다.

“나는 반대였어.”

“……뭐가.”

“네가 떠난 날부터 줄곧 후회했단 말이야. 그냥 너랑 같이 갈걸. 뭐가 무섭다고 거절했는지…. 나 너무 이기적이었잖아.”

울먹거리는 의진의 목소리에 승오는 잠시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가끔 승오가 약 기운에 옅게 잠이 들면 종종 들리던 울먹거림과 똑같았다. 매번 미안함에 울고 있었나 보다. 휠체어 바퀴를 돌려 의진을 바라본 승오가 또 훌쩍거리는 의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 놔아….”

“왜 울어. 나 멀쩡한데? 휠체어 타고 있으니까 뭐 곧 죽으러 가는 사람 같아?”

“야, 그런 소리 좀!”

바람이 차서 그런지, 불쑥 치미는 미안함 때문인지 의진은 코끝을 발갛게 물들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승오는 우는 모습마저 예쁜 것 같다고 다소 팔불출 같은 감상을 속으로만 했다.

“야, 너 일어나면 안 돼!”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하도록 감아놨을 뿐이지 사실 움직이는 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발을 디딜 때 약간 통증만 있을 뿐이었다. 승오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아직 눈물방울이 매달려있는 의진의 얼굴을 닦아주고 품에 안았다.

“괜찮아, 걷는 거 아니잖아.”

“……승오야.”

의진도 내심 승오의 커다란 품이 그리웠는지 곧바로 허리에 팔을 두르고 힘을 줬다. 따뜻하게 맞닿아오는 심장 소리와 절절한 체온이 밤인 것도 잊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너는 여기에 있어. 그리고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 그때 살려줘.”

“…싫어.”

“위험해. 너를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괜찮아. 내가 너를 지켜주면 돼.”

의진은 여전히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본 얼굴은 꾀죄죄한 환자임에도 빛이 났다. 반짝반짝. 하늘에 뿌려진 별보다 더.

“……응? 다음엔 너랑 무조건 같이 갈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

촘촘하게 빛나는 밤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승오가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의진을 두고 가지 못한다면 제가 더 힘을 키우는 수밖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의진만은 지킬 수 있어야 했다.

승오의 입맞춤에 눈을 슬쩍 감았던 의진은 발꿈치를 들어 멀어지는 입술을 찾았다. 키스만으로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건 서로가 유일했다.

“…하아.”

의진이 살짝 뒤로 물러서자 승오는 곧바로 의진의 뒤통수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슬쩍 물었다가 떼고서 혀를 미끄러트리니 세워진 혀끝이 승오를 반겼다. 벌린 잇새로 나뒹구는 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승오는 혓덩이가 비벼질수록 몸을 타고 흐르는 의진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릿했던 다리 통증이 사라지고 복잡했던 머릿속이 휘발됐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케 했다.

“하고 싶다.”

“…너 다 나으면.”

입술을 떼며 승오가 나지막하게 속삭이자 의진은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얘는 환자복을 입어도 섹시하네. 낯부끄러운 것을 몰랐던 의진이 처음으로 수줍어하는 순간이었다.

의진의 붉어진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승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작은 얼굴을 부여잡고 길고, 끈적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간간이 닿는 혀끝은 마치 섹스어필 같기도 했다.

“얼른 나아야겠네.”

“……미, 미쳤어.”

퍼엉. 의진이 만약 만화 캐릭터였더라면 지금쯤 머리 위에서 한 차례 폭발이 일어났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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